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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완주 Jan 25. 2021

Mourn to move on

다시 넘어질 나에게(2)

1. 한 의사가 있었다. 레지던트로 일하던 중에 군의관이 되기로 결심하고, 일하던 병원에 사직서를 이제 막 내고 나선 참이었다. 길을 건너려던 그는 버스에 치일 뻔한 사람을 살리려다 대신 사고를 당하고 매우 심하게 다쳤다. 방금 작별을 고했던 병원으로 후송된 그를 살리려는 동료들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뇌사상태에 빠졌고 결국 죽었다.


그 버스사고로 죽을 뻔했던 여자는 그의 장례식에서 오열하고, 날마다 병원 앞에 앉아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눈물을 흘렸다. 동료들은 매일같이 그 여자를 보면서도 복잡한 마음으로 못 본 체한다. 여자의 슬픔은 길었다. 그리고 마침내 동료들 중 한 사람이 일어나 그 여자에게 간다.


2. 한 남자가 있었다. 여섯 아이의 아버지이자 세계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밴드의 보컬이던 그는 새 앨범을 발매한 지 이틀 만에 가장 절친했던 친구를 자살로 잃었다. 그리고 두 달 후, 죽은 친구의 생일이던 날 그는 술을 마시고 친구와 같은 방법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보컬이자 형제를 잃은 밴드는 활동을 멈추었다. 새 앨범은 발매와 동시에 유작이 되어버렸고, 밴드의 홈페이지에는 우울한 사람들에 대한 메시지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연락처들이 추가되었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독보적인 보컬이었던 그를 누가 대체할 수 있는가.




1. 이 이야기는 <그레이 아나토미> 시즌 6의 첫 번째 에피소드, Good Mourning이다. 자신을 구하려다 죽은 의사 조지의 죽음에 자책하며 슬퍼하는 그 여자에게 조지의 절친인 이지는 뚜벅뚜벅 걸어간다. 그리고 한 말은 '꺼지세요.' 였다. 이지는 눈물을 흘리는 여자에게 거칠게 소리쳤다. 이렇게 한심하게 앉아있지 마! Go! Go get your life! 가, 가서 니 인생이나 살아.


2. 체스터가 죽은 지 2년 후에 밴드의 리더인 마이크 시노다는 런던에서 공연을 했다. 공연 중간에 한 노래의 전주가 흐르자 관중이 술렁였다. 체스터의 마지막 노래이자 그를 보내며 불렀던 One more light였다. 전주가 흐르는 동안 마이크는 청중에게 손짓으로 함께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많은 청중들이 흐느끼며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그 노래를 불렀고 체스터의 이름을 외쳤다.




1. 조지의 장례식에서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서둘러 자리를 뜬 이지를 뒤따르는 동기들의 당황한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절친이었으니까 폭풍눈물이 당연할 거 아닌가.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그들의 낯선 반응은 몹시 도발적이었다. 배를 잡고 웃는 이지에게 크리스티나는 내 마음을 대신 말해준다. "진짜 돌았구만." 이지는 말한다. "야, 지금 우리 너무 웃기지 않아? 난 암에 걸렸고, 조지는 죽어버렸어. 심지어 너는 무슨 결혼을 포스트잇으로 했냐? 이게 믿어져?" 그들은 배를 잡고 웃는다. 정말 이 에피소드의 제목처럼 good mourning(좋은 애도)이다. 웃음은 결코 마음먹은 대로 살아지지 않는 이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반격의 선포였다. 교통사고란 세상에서 가장 부조리한 죽음이 아닌가.


2. 친구의 죽음에 깊이 잠겨있는 노래를 부르는 내내 마이크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고통과 그리움과 그걸 딛고 일어서려는 책임감이, 함께 노래를 불러주고 친구를 기억해주는 이들에 대한 감사가 투명하게 머물렀다. 노래를 마친 후 마이크는 말했다. "할리우드볼에서의 추모공연 이후 저는 이 노래를 부를 수 없었어요.(중략) 여러분의 도움으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됐네요. 감사합니다. 체스터의 이름을 불러주신 것도요."




우리가 슬픔을 다루는 방식, 비극 이후를 살아가는 방식은 개인적인 동시에 집단적이다. 감정의 표현과 감정 대응의 패턴은 개인의 무의식에 축적된 오랜 관습과 학습이 내면화된 결과물이고 사회적 클리셰다. 나는 감정이 가장 집단적 속성이 강한 관습이라 생각한다. 가족이라는 집단, 민족이라는 집단. 그래서 같은 상황에 다른 감정적 반응을 보이는 사람에게 우리는 강한 이질감과 경계심을 보인다. 언제 웃는지, 언제 화내는지, 어떻게 그 감정을 다루는지... 우리는 자기 속의 것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니, 다들 그러지 않아?'에 대한 대답은 '아니, 다 똑같지 않아.'다.


오래전에 일본에서 쓰나미로 많은 사람이 죽었을 때 뉴스에서 보도되었던 일본인 유족들의 '조용한 슬픔'은 나에게 몹시 충격이었다. 나와, 내가 사는 사회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그 일 이후, 어차피 감정을 ‘학습’해야 하는 나에게 내 집단뿐 아니라 다른 집단의 감정도 중요한 텍스트가 되었다. 매일같이 조지의 죽음을 슬퍼하던 여자의 관습적 반응도, 도발적인 이지의 웃음도 마찬가지로 중요했다.


조지를 보낸 동기들의 폭소와, 체스터를 보낸 마이크가 부르는 노래에는 많은 의미가 있었다. 그들의 애도는 단지 슬픔 자체나 분노나 비난을 위한 것이 아니라 비극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감정의 폐허를 딛고 서있을 때 혹은 거기 주저앉았을 때 시간은 정지한다. ‘왜지?’라는 질문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백 년도 묶일 수 있다. 어차피 답이 없으니 말이다. 나의 시계는 아주 오랫동안 2001년 7월에 멈춰있었다.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움직여도 되는지 알지 못한 채로.


그러나 <그레이 아나토미>는 시즌 17을 맞이했고 린킨파크는 해체되지 않았다. 이제 마이크 시노다는 무대에서, 체스터는 관중의 목소리로 함께 노래한다. 어제 우연히 마이크의 one more light 공연 영상을 보며 나는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Thank God, he is moving on...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도한다. 고통 위에서, 멈추었던 노래를 다시 시작한 마이크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은 경이로웠다. 마이크의 one more light는 나에게 새로운 내일을 말해주었다. 어쩌면 그들이 나와 함께 늙어가는 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몰라. 메러디스의 주름진 얼굴을 아직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야. 영영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린킨파크의 내한공연도 볼 수 있게 될지도 몰라. 그러면 체스터의 파트를 함께 노래해야지. 그 노래에 온 힘을 실어 남겨진 이들에게 말해야지. 우리는 같이 남겨진 거라고, 지금 여기 우리가 함께 있다고.


상실의 폐허에 단지 주저앉아 있는 것은 슬프려고 슬퍼하는 것인지도... 나를 위한 슬픔인지도 모른다. 거기 머무르지 않아도 나는 잃어버린 이들을 충분히 애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마이크처럼,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그리워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러니 잊지 말자. 우리는 나아가기 위해 애도하는 것이다.


Mourn to move on. It’s time to go get a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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