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 계산대 직원이 종량제 봉투를 열어서 주면, 그게 그렇게 감사하다. 비닐봉지를 손으로 비벼 떼어내지 못할 정도로 건조한 손을 가진 탓이다. 나는 사람들이 모두 나 같은 손을 가진 줄 알았다. 어른이 되기까지도 나와는 반대로 손에 땀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심지어 건조인간인 나에게서 다한증인 딸이 태어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긴장하면 손에 땀방울이 맺히고 커지고 흘러내리는 것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다.
오리는 손과 발 모두 다한증이 있다. 그게 얼마만큼 불편한지 잘 모르는 나로선 늘 이해하기 어렵다. 어릴 때는 '손바닥에 로션 묻는 것'을 너무 싫어해서 몸이 쩍쩍 트는데도 보습제를 안 발라 야단을 많이 쳤다. 제 몸에 엄마가 손대는 것을 꺼리는 나이가 되니 억지로 발라줄 수도 없었다. 그땐 이성적인 대화가 되지 않았을 때라서 아이가 유난스럽다고만 생각했었다. 지금은 어른이 되어 자기 불편을 조곤조곤 설명해 주지만, 나는 일단은 뜨악하다. 그리고 T스럽게 한소리 했는데, 오리의 설명은 모든 게 다한증 때문이란다.
도서관에 가면 진득하게 자리에 앉아있질 못하고 자꾸만 밖을 들락거린다. "왜 자꾸 움직여?" 다한증 때문이란다. "손에 땀이 차서 볼펜이 자꾸 미끄러져."
친구들에게 아디다스 클로그를 생일선물로 받았단다. "엥? 곧 겨울인데 구멍 숭숭한 신발을 사달라고 했어?" 다한증 때문이란다. "운동화 신으면 발에 땀이 찼다가 얼어버려. 냉장고에 발 넣고 있는 기분이야."
아무래도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는 틀린 것 같단다. "뭐야, 벌써부터 포기하는 거야?" 다한증 때문이란다. "구두 신으면 지난 여름에 운동화 신었을 때처럼 발가락 사이가 다 짓무를 거야." 아뿔싸… 그 운동화 내가 사줬는데…
서류를 굳이 창구에 가서 떼겠다고 한다. "바쁘다면서, 학교 무인기에서 발급하면 되지 않아?" 다한증 때문이란다. "지문 등록한 게 다 뭉개져 있잖아. 기계가 인식을 못해."
이쯤 되면 만능치트키가 아니라 마이너스치트키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는 넘어섰다. 너무 달라서 자꾸 까먹고 발끈했다가 설명을 듣고 나면 나의 몰이해를 자책한다. 정말 슬프지만 자책도 그때뿐이다. 아마 다음에도 딸의 ‘유난스러운’ 말과 행동에 先뜨악 後자책 루틴을 똑같이 반복할 것이다. 너무 무심하다.
그걸 무심코 듣지 않기를, 매 순간 기억하고 배려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든다. 사랑하니까 정말 그러고 싶다. 흔히 ‘무심코 그랬다’는 말은 무죄의 항변이지만, 무심(無心)은 사실 변명이 아니라 죄의 자백이며 형량을 가중하는 요건이다. 적어도 사랑하는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말이다. 사랑한다면 무심해서는 안 된다. 아니, 처음엔 무심했더라도 사랑한다면 유심을 연습해야 한다.
결혼 초기에 나를 가장 어렵게 했던 것은 ‘무심코’ 혼자 결정하는 습관을 바꾸는 것이었다. 감정만으로도 사랑할 수 있었던 남자친구가 인생의 동반자인 남편이 된 후 어느 날 ‘평소처럼’ 혼자 결정한 사항을 남편에게 얘기하다가 문득 그 얼굴에 스친 씁쓸함을 보았다. 나는 그 표정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남편이 정말 중요한 사람(Significant other)이려면 내 삶에 그의 존재를 위한 방을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의 감정만으로도 자연스럽게 말과 행동이 변하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나는 그런 면에선 늘 뚝딱거린다. 그래서 ‘남편의 방 만들기’를 흡사 회사 프로젝트처럼 시작했다. To-do 리스트를 만들고 자꾸 되뇌었다. 쉽지 않았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치러야 할 대가도 컸다.
십수 년이 지나 어느덧 그 인위적인 과정이 자연스러워지고 남편의 방이 내 인생에 온전히 자리를 잡았다고 느꼈을 때, 나는 정작 그의 인생에는 내 방 한 칸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걸 당신이랑 상의해야 된다는 생각을 안 했어.” 남편은 그렇게 ‘무심코’ 한 실수라고 변명했지만, 차라리 그 말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의 거듭된 변명은 나의 무가치함을 자꾸 확증할 뿐이었다.
시험 기간인 오리는 지금 나와 함께 카공 중이다. 클로그를 신고 미끄러운 빙판길을 걸어왔다. 아이패드에 열심히 서술형 문제의 답안을 쓰다가 가끔 느닷없이 손을 파닥거린다. 요즘 나는 이 아이에게 유심(有心) 하기 위해 매일같이 이 글을 쓰고 다듬는 중이다. 다한증은 내 삶에 딸의 존재를 위한 방을 다시 만들 필요를 깨닫게 해 주었다.
오늘 아침에 함께 온라인 예배를 드리다가 아이의 팔을 만져보았다. 문득 ‘땀이 나서 볼펜이 미끌거리면 필기하는 데에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은 힘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런지 아닌지 사실 잘 모르지만 그냥 안쓰러웠다. 필기할 때 주로 쓰는 근육이 어디인지 떠올리면서 가만가만 아이의 필을 마사지해 주었다. “크으~ 극락이구만.” 거룩한 예배시간에 극락이라니, 선 넘네.
아직은 어떻게 배려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다한증 자체를 내가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 오리 스스로도 미래의 자신이 어떤 불편과 제한을 더 겪을지는 모를 테지. 우리를 격동하는 다한증의 낯선 발현들에 매번 뜨악해하고 아이에게 상처를 줄까 두렵다. 그러나 요즘 매일 이 문제를 생각하는 나의 유심이, 답을 찾지 못했어도 딸을 위한 방을 새롭게 만들고 있음을 분명히 느낀다. 어느 책에선가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맞다. 나는 사랑하기 위해 그 사람의 말을 기억하고 행동으로 표현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소소한 것들에 잘 감동하는 오리는 그걸 참 민감하게 알아차린다. 엄마의 노력을 알아주는 그 유심함이 그 아이의 인생에도 나의 존재를 위한 방이 있음을 일러준다.
그렇게... 서로의 삶에 서로를 위한 방이 공명하니 나의 메마른 손이 딸의 물기 많은 손을 붙잡고 이 미끄러운 빙판길을 함께 걸을 수 있는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