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서울로 이사 간 언니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했다. 친척보다 더 친밀한 사이여서 가까이에 살 때는 자주 만나 함께 예배도 하고 밥도 먹고 그랬는데 벌써 1년째, 만남은커녕 전화통화도 자주 하지 못했었다. 언니네 둘째 딸의 재수 수험생활도 이유였지만, 피차간에 너무 잘 아는 서로의 팍팍한 삶에 대한 배려도 있었다. 우리는 인생의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되던 무렵에 만나 허황된 희망을 공유하며 함께 추락을 견디던 사이였다.
자존심이 강한 언니가 먼저 편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걸어올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으나, 수능을 며칠 앞두고 응원의 기프티콘이라도 보내주고 싶었다. 아이들도 수능이 다가오자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이 가까웠다고 생각해서인지 '이모한테 연락 좀 해보라'며 나를 들들 볶았다. 수험생활 내내 카톡을 아예 지워버린 조카 대신 언니에게 기프티콘을 보내고 전화를 했었다.
"여보세요." 고단함을 숨기지 않은 목소리다. 오래 통화하고 싶지 않다는 뜻, 5분 컷이다. 아이의 입시를 핑계로 전화를 걸었지만 정작 그 일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시험을 앞둔 아이를 비롯한 식구들 안부를 묻고, 우리집 아이들이 너무나 보고 싶어 한다는 그리움을 전하고, 언니의 녹록지 않은 직장생활 이야기를 짧게 들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언니가 물었다. "너는? 넌 요즘 어때?"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나? 나는 뭐... 똑같애."
좀 놀랐다. 아무런 설명도 필요하지 않은 간결한 답변은 통화를 짧게 마무리해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말이 너무 낯설어서일까, 통화한 후 두 달 가까이 '똑같애'를 되뇌고 있다. 어제와 오늘이, 작년과 올해가 다르지 않다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무료함과 나태함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에게는 큰 변화를 격발하는 사건이나 내적 충동이 없는 평정(equilibrium)의 상태라는 뜻이다. 전에는 모처럼 통화하는 지인들이 같은 질문을 하면, 나의 최신 근황을 어디서부터 업데이트해야 할지부터 늘 막막했다. 가끔 통화하는 친구 Y는 "하여간 다이내믹해..."라고 피식 웃곤 했다.
소소한 부침이 아예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BGM으로 깔려야 할 것 같은 생뚱맞은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놀랍게도 난생처음 몸무게가 2년째 비슷하게 유지되고 있다. 나의 몸무게는 항상 '올라가는 중'이거나 '내려가는 중'이었다. 범위가 20kg이나 되었다. 이제는 1, 2kg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한다. 이런 똑같음이 참 좋다.
이런 얘기를 했더니 친구가 말했다. "맞어. 너 요즘 목소리도 늘 한결같어."
그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막상 이런 평정의 상태에 이르고 보니 깨달아지는 것이 있다. 이제야 내일을, 내년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어제와 같은 오늘에 이어질 내일은 아마도, 어제와 오늘의 내가 했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축적된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 있을 것이라는 믿음... 아버지의 죽음 이후 깡그리 무너져버렸던 '연속성'에 대한 기대치가 이 평정으로부터 조금씩 자라고 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기 위해서는, 축적된 하루하루의 데이터가 결국 통계적인 신뢰를 부여하는 지점까지의 임계치를 넘어서야 가능했다. 여태까지 이 단순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아웃라이어의 좌표들을 오가며 살아왔는데 이제야 비로소 신뢰구간 내의 삶으로 진입했나 보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 나에게 축하할 만한 일이듯이 '오늘과 같을 내일', '올해와 같을 내년'은 마치 받고 싶은 상장처럼 기대된다. 물론 나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일말의 두려움은 온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언제든지 정규분포곡선 바깥 저 멀리로 튕겨나갈 수 있다. 그래서 소망하건대 내년에도 감사한 마음으로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늘 똑같아."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