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어둠이 내려앉으면, 나는 재즈를 틀고 인스타그램을 켠다.
이렇게 어둠이 내려앉으면, 나는 재즈를 틀고 인스타그램을 켠다.
그러면 어찌나 고요한지. 대부분의 이 세상의 사악함, 불안함, 슬픈 모든 것들은 가라앉아서 눈에 보이지 않는 느낌이다. 인스타그램의 피드는, 그 속의 어떤 이미지들은 사람들의 자신감 가득한 어떤 무언가로서 내비쳐지니까. 적어도 그 모습들이 슬픈 그것의 순간들은 아니니까.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같이 흘러나오는 재즈는 그러한 사소한 근심과 의심 따위를 어딘가로 가져가 버리고. 그러고 나면 옛날 디즈니나 픽사 애니메이션을 볼 때와 같이 용감한 모험과 행복이 가득한 세상이 나를 맞이한다.
그래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내 속에 있는 어떤 날이 바짝 서는 것 같다. '날이 선다'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예민해진다. 어떤 버스에서 봤던 티비의 프로그램을 아직 기억한다. 세계는 지금이었나. 세계 뉴스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죄다 지구 어딘가에서 큰 사고가 나서 많은 사람이 싸우고 다치고 죽고 있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아나운서의 나긋한 목소리와는 반대로 흘러가는 그런 세상이 참 충격이었다. 당시 정신적으로 힘들 때라서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지고 싶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였을까. 꼭 세계 뉴스가 아니더라도 뉴스에는 자극적이고 잔인하고 좋지 않은 이야기 투성이라는 것. 내가 지치고 힘들고 슬프거나 즐겁고 웃기고 행복한 순간에도 세상 속 어딘가에서는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환희의 순간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 아마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내가 겪는 세상의 일부는 절대적으로 세상의 일부구나. 나는 이게 전부인 줄 알았지만, 나의 인지에서조차 한계란 것이 있고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구나.
청년의 초입이었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나는 아직도 나를 제외한 다른 곳의 또는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그것에 대해 대하여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분명 내가 사는 이 조그마한 지구에는 미사일과 총을 쏘아대며 전쟁을 하는 곳도 있고,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싸우고 죽이고... 그런 갈등도 아직 남아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는 즐겁거나 사소한 것으로 슬퍼한다. 반대로 내가 슬프거나 죽을 것 같이 괴로울 때도 어딘가에선 아이가 태어나고, 누군가는 염원을 이루거나, 어떤 꿈을 이루어내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그 사실을 겪거나 떠올릴 때마다 생각한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어도 되나?'
그러나 결국 어쩌겠는가.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것이고. 견딜 수 없는 기쁨 또는 슬픔이란 없는 것이어서, 어떻게든 몸을 떨며 즐기든 슬퍼하든 하여서 이겨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날 것이고. 그 속에서 나의 삶도 여러 가지를 느끼며 이어지겠지. 그러다 끊기는 날도 오겠지만. 결국 그뿐이겠지만. 어찌하랴. 계속 살아나가야 하나보다.
흘러나오는 재즈에 여유를 느끼며 다시 인스타그램을 본다. 페이스북도 가끔 확인하고. 넷플릭스, 왓챠도 들어가 봤다가... 영화도 보고 책도 보고 글도 쓰고 디자인도 좀 하다... 이렇게 잠 못 드는 밤들 중의 하루가 또 내 인생에 있을 것이며. 흘러가면 흘러가는 대로, 그저 지나가는 날들이 있을 것이다.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듯, 흘러나가 훨훨 사라지는 대로. 지금 좀 이러고 있어도 될 것이다.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