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케이크를 예약한 손님이 어제 다녀가셨다. 오븐에 굽지 않고 만드는 로(raw) 당근케이크는 흙당근, 피칸, 호두, 대추야자로 갈아 만든 시트 위에 캐슈넛과 코코넛밀크 베이스의 크림을 올려 냉동으로 굳혔다가 취식 30분 전쯤 꺼내는 케이크다.
12시 픽업을 예약하셨는데, 포장 중인 12시 3분에 전화가 와서 오후 4시쯤 오게 될 것 같다고 하신다. 게다가 갑자기 (포장이 아니라) 매장에서 드실 것 같다고 했다. 조금 당황했지만 상자를 접고 냉동실에 다시 케이크를 넣었다.
다른 시간은 다 괜찮다. 하지만 12시 픽업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서는 당일 매장 라인업을 하나 줄여야 한다. 매장 베이커리 준비시간과 겹치기 때문에. 그런 포기를 감수하고 시간에 맞춰 정성껏 준비했는데 별안간 4시라니, 맥이 풀렸지만 우선 알겠다고 말씀드렸다.
시간은 흘러 흘러 어느새 4시, 그리고 15분이 더 지나도록 손님이 오지 않는다.
조금씩 쌓이는 스트레스를 스트레칭으로 풀어본다.
스트레칭과 스트레스는 왜 철자가 비슷할까? 하고 찾아보니 무언가를 잡아당긴다는 뜻에서 나온 어근 stre-가 동일하게 적용된 게 맞다. 쓰지 않던 근육을 양쪽에서 잘 잡아당기면 스트레칭이 되지만, 잡아당기는 긴장이 지속되면 스트레스가 되는구나.
끝나고 다시 핸드폰을 보니 4시 33분. 여전히 안 오신다. 와서 드시려면 적당한 타이밍에 미리 꺼내야 하는데 , 연락이라도 주시면 좋으련만!
스트레스가 방금 한 스트레칭의 효과를 잠식하기 시작한다. 간혹 짧은 시간에도 예약을 완전히 잊어버리거나 급박한 사정으로 못 오는 손님도 있기에 전화를 드렸다.
그런데… 아무 일 없다는 듯 '가고 있다'며 전혀 미안하거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한 목소리. 가슴속에서 작은 불씨 하나가 화르륵 타오르며 입에서 딱딱한 말이 흘러나왔다.
나 : "미리 이야기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손님 : "응~ 제가 아까 차 마시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 해동하는 데 30분 걸린다고 하셔서 있다가 먹으려고 일부러 전화 안 드렸어요."
나 : "그런 말씀은 안 하셨고 케이크를 먹을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정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셔서요. 여기서 드실 때랑 포장하실 때 준비가 다르거든요."
손님 : "아하 이야기 안했나요? 제가 일행이 있거든요. 좀 있다가... 먹을 것 같아요."
나 : "네... (머리가 더 복잡해진다) 우선은 여기서 드시는 걸로 생각하고 있겠습니다."
불편하다. 언제 도착할지 모를 이 손님이 오시기 전까지 케이크에 완전히 신경을 끌 방법은 없나? 짧게라도 글을 쓰자고 계획했던 시간이었지만 통 집중이 되지 않아 오전에 읽던 책을 펼쳤다. 어째서 이 손님은 이렇게 태연하실까…
1시간쯤 지나 도착한 그는 들어오자마자 오히려 눈을 흘기며 말한다.
"사장님이 완벽주의자셔."
답답했지만, 별 수 없이 웃었다.
"아니에요. 미리 연락만 주시면 돼요. 계속 신경 쓰고 있으니까요."
그는 매장에서 먹겠다던 케이크를 또 한 번 포장으로 바꾸었다. 나는 얼려둔 케이크를 잘게 다져둔 피스타치오로 장식하고, 접었던 상자를 다시
꺼내 케이크를 넣어서 드리며 냉장 보관을 당부드렸다. 케이크를 받은 손님은 나가면서 아이를 달래는 듯한 투로 내게 말한다.
"사장님 다음엔 늦지 않게 올게요…“
(늦은 게 문제가 아닌데… 휴)
"미리 말씀만 해 주시면 돼요. 이건 손님이 정말, 빵집을 해 보셔야 알아요.”
합의된 약속을 한 타인에게 일방적 변경을 통보하고 변경된 약속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실을 다시 알려주지 않는 행동이, 어째서 누군가에게는 전혀 미안한 일이 아닌지 궁금한 날이었다.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 감정을 소모하지 않고 빨리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했고, 고작 케이크 하나에 얽매여 다른 일을 못하는 스스로가 실망스러웠다.
생각 끝에 그 날 내린 결론은.
‘카르마구나.‘
나는 매 순간 계획을 세우느라 많은 에너지를 쓰는 계획형 인간이었다. 정해진 틀에 맞춰야 하는 습관에서 전보다 많이 벗어난 줄 알았지만, 여전히 계획대로(약속도 일종의 계획) 되어야 한다는 에고가 강했고 케이크 예약을 받을 때마다 필요 이상의 긴장(계획대로 문제없이 전달되어야 한다는)을 우주로 발산했을 것이다. 대개 케이크의 예약일은 누군가의 기념일이다. 실수 없이 잘 전달되어야 할텐데, 예약 상담을 시작할 때부터 발생하는 여러가지 변수들은 달갑지 않다. 그리고 우주는 내게 받은 부정적인 것들을 모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이런 성향을 깨닫고 제대로 흘려보내지 못한다면 또다시 나는 그분, 혹은 유사한 상황을 만나고 혼란스러워할 윤회의 씨앗을 남기게 된다.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못한 감정과 집착에는 나를 자꾸만 그 자리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으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일수록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 일을 통해 얻어야만 하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