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의 과학 에세이
라부아지에가 죽고 100년 후,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크게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는 물질을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이며, 다른 하나는 그 물질을 이루고 있는 물리적인 성분인 질량이었다. 아인슈타인 이전까지 과학자들은 세상은 이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고, 이 둘은 각각의 서로 다르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갓 스물 중반을 넘긴 젊은 아인슈타인은 이것들과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빛’이란 것에서 새로운 질서를 찾고 있었다. E=mc2 에서 c의 의미 속에 포함된 빛이 그것이다. 그리고 빛의 속도와 에너지, 질량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를 붙잡고 연구를 했다.
아인슈타인은 대학에 다닐 때까지도 실험과학이나 다른 여타의 과목에는 흥미가 거의 없었다. 그에겐 오로지 물리와 수학만이 흥미를 주고 있었다. 끝없는 호기심은 대부분 선생님을 피곤하게 했다. 그는 놀라우리만치 강한 집념으로 자신의 호기심에 파고들었다. 특히 그를 몰두하게 하였던 것이 바로 빛이었다. 그가 열여섯 살에 쓴 편지를 보면, 얼마나 빛에 대해 궁금해하고 깊이 빠져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친구나 스승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궁금증에 대해 질문을 해댔다.
과연 빛은 무엇일까? 빛의 속도로 여행하면 무엇이 보일까?
그런데 그의 대학 시절의 수업에서도 그러한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물리학과 학과장인 하인리히 베버 교수와 심각한 충돌을 빚기도 했다. 베버 교수는 물리학의 생명이 이미 70년 전에 끝났다고 믿었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빛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한 실험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고민은 그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에게 빛의 세계는 일종의 놀이터였다. 아인슈타인은 16살 이후 나이가 들 때까지도 빛을 타고 가는 상상을 했다. 빛의 속도로 움직이면 특이한 현상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했다. 빛과 나란히 달린다면 빛이 나보다 먼저 앞을 비추지 못해 어두워지지 않을까 상상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과 여행을 계속하기 위해 먼저 ‘빛이란 무엇인가’를 알아보자.
그 시대 사람들은 빛은 ‘파동’이라고만 믿었다. 호수 위에 물결이 일듯이 빛도 물처럼 어떤 매개체를 통해 이동한다고 생각했다.
파동이란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졌을 때 물결이 퍼져 나가는 것을 말한다. 파동(波動)은 물결이(波)움직인다(動)는 뜻이다. 호수 위의 물결은 점점 퍼져 멀리 있는 물 위의 솔방울을 움직이고 호수 전체로 퍼져 나간다. 하지만 물결이 움직인다고 물 자체가 이동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돌이 빠진 곳 근처의 물과 물고기, 떠다니는 배까지 모두 바깥쪽으로 이동할 것이다. 이때 물이 이동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자리에서 위아래로만 움직일 뿐이다. 물이 위로 올라가거나 아래로 내려간 다음 제 위치로 안정되게 돌아가기 위해 원래 물의 높이에서 위아래로 왔다갔다하는데 이것을 우리는 ‘진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기 위해 움직이는 힘을 ‘복원력’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파동은 물방울의 진동들을 모두 포함한 전체를 말한다. 파동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고도 어떤 정보를 전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산에서 소리를 지르면 공기가 밀려나는 것이 아니고 파동만이 이동해 먼 산까지 전달된다. 지진도 마찬가지이다. 땅속 깊숙이 들어가지 않아도 지진은 땅속 어딘가에서 부딪히고 갈라져, 큰 폭발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땅의 파동으로 우리에게 알려준다.
쓰나미도 파동에 의해 일어난다. 바다 밑의 땅속에서 지진이 발생하거나 화산이 폭발하면 그 위에 있는 바닷물도 파동에 의해 움직이다. 그 결과 거대한 파도가 생기고 이 파도는 해안으로 다가오면서 에너지가 누적되면서 더욱 커져 육지를 덮친다. 이것이 바로 ‘쓰나미’다.
당시 사람들은 빛도 이러한 파동과 같다고 보았다. 우주의 모든 공간은 파동을 전달할 ‘에테르’라는 물질로 가득 채워져 있고 이것을 통해 빛이 이동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에테르로 가득한 우주에서의 빛의 속도는 어떨까? 빛의 속도가 빨라질 수도, 느려질 수도 있는 것일까?
우리가 바람 부는 운동장을 달릴 때를 생각해 보자.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달리면 공기가 우리에게 부딪혀 속도가 느려진다. 반대로 바람 방향으로 등을 지고 달리면 더 빨리 달릴 수 있다. 운동장은 지구이고 바람은 에테르, 달리는 사람을 빛이라고 생각해 보자.
지구가 초속 32킬로미터의 속도로 에테르를 통과해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면 지구가 에테르를 통과하면서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효과를 느끼게 된다. 에테르가 존재한다면 지구가 달리는 방향으로 빛을 쏘았을 때보다 지구의 뒤쪽으로 쏜 빛이 빠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가정을 증명하기 위해 실험을 했지만, 불행히도 어느 방향으로 빛을 쏘건 빛의 속도는 모두 똑같았다.
우주에 에테르는 없었던 것이다. 빛은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데 에테르가 없다면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법칙에 어긋난다. 빛이 파동이라면 말이다.
우리가 산에 올라가 소리를 지르면 건너편 산에 부딪혀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소리는 파동으로 움직이고 공기가 이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달에서 우리가 소리를 지르면 들을 수 없는 것은 이러한 매개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빛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움직일까? 빛의 속도는 우리로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알려져 있다. 지구를 1초에 일곱 바퀴 반을 도는 속도다. 달에서 출발한 빛은 2초 후에 지구에 도달할 수 있다. 태양의 빛도 8분 30초면 지구까지 온다. 과학자들이 광속을 c로 표기하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c는 ‘빠르다’란 뜻을 가진 Celeritas의 약자이다.
이러한 빛의 속도는 19세기 이전에 이미 계산이 되었다. 이것은 덴마크 출신의 젊은 과학자의 새로운 생각 때문에 가능했다. 네덜란드의 안경제작자에 의해 망원경이 발명되고, 갈릴레이는 그것을 응용해 사물을 30배 이상 확대해 볼 수 있는 망원경을 발명했다. 당시 사람들은 지상의 경치나 물체를 보는 데 이용했지만, 갈릴레이는 하늘을 보는 데 이용했다.
즉 오늘날의 천체 망원경이 처음으로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이를 이용해 갈릴레이는 목성 주위를 도는 4개의 위성을 발견했다. 바로 이오와 에우로파, 가니메데, 칼리스토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수천 년을 내려온 지구중심설(천동설)이 대세였다. 그 이론대로라면 지구가 세상의 중심이니 목성의 위성도 지구를 중심으로 돌아야 한다. 그런데 그 4개의 위성은 지구가 아닌 목성을 중심으로 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인류는 2천 년 이상 잘못된 우주론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천동설은 기독교와 기득권을 가진 과학자들 사이에 확고히 자리 잡고 있던 이론이었다. 그래서 이들 목성의 위성에 대한 관찰은 과학계에 아주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뢰머가 이오에 집중한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
그런데 그가 목성의 위성들을 관찰하던 중 특이한 현상을 발견했다. 이오가 그의 시야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이오는 쉼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문제는 이오가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하느냐 아니면 목성을 중심으로 공전하느냐 하는 것만 남았다. 만일 이오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면, 모든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천체는 나타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반복해야 한다.
그런데 달만 보더라도 상황이 좀 다르다. 달은 한 달에 한 번꼴로 지구를 돌며 모양을 바꾸고 있지만, 가장 얇게 보이는 초승달조차도 그 모양을 완전히 감추고 사라지지는 않는다. 즉, 지구를 공전하는 천체는 다른 천체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한, 크기는 바뀌어도 완전히 사라지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천동설만으로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일관성 있게 설명하기가 불가능해진다.
이번에는 이오가 목성을 공전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오는 목성을 옆으로 돌아서 뒤로 갔다가 다시 앞으로 나올 것이다. 이때 이오가 앞이나 옆에 있으면 볼 수 있지만, 목성 뒤로 가면 목성이 이오를 가리기 때문에 볼 수가 없다. 이는 이오가 목성 둘레를 공전한다면, 나타남과 사라짐을 반복할 것이란 결론이 나온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뢰머는 이오의 공전주기를 수차례에 걸쳐 세밀하게 측정했다. 그런데 주기를 잴 때마다 그 값이 약간씩 다르게 나왔다. 그는 공전주기는 공전에 걸린 시간을 재는 것으로 측정은 두 가지 요인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먼저 움직이는 물체의 위치, 즉 이오의 위치다. 또 하나는 시간을 재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오의 위치란 이오가 어떻게 공전하느냐 하는 것이고 과학자가 움직이는 위치란 지구가 어떻게 운동하느냐는 것이다.
이오는 목성에서 멀리 떨어져서 돌 수도 있고, 가까이에서 돌 수도 있다. 그러나 안에서 돌면 공전주기가 짧고, 바깥에서 돌면 공전주기가 길다. 그 차이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공전주기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공전주기가 바뀐다면 이오가 일정한 하늘의 길(공전궤도)을 따라 돌지 않고 어느 때는 가깝게, 또 어느 때는 멀게 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천체의 공전궤도는 천체의 질량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데, 이오의 공전궤도는 목성과 이오의 질량에 의해 결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목성과 이오의 질량은 매번 바뀌는 것이 아니다. 즉 일정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목성 둘레를 회전하는 이오의 공전궤도는 바뀌지 않는다. 이오의 공전주기가 변하는 것과 이오가 움직이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얘기다.
남은 문제는 과학자의 움직임이다. 그런데 과학자는 지구에 있다. 그리고 과학자의 위치는 지구의 위치와 같다. 지구가 멈춰 있다면 이오가 목성을 도는 것이 항상 같아 보일 것이다. 즉 이오의 공전궤도는 달라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전주기도 일정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다. 지구가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은 과학자의 위치도 따라서 이동한다는 것이다. 위치가 변한다는 말은 보는 위치가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움직여서 보는 위치가 바뀌게 되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옆면을 볼 수가 있다.
이처럼 보는 위치에 차이가 생기면 공전 시간에도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시간은 거리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거리가 멀어지면 그만큼 빛이 날아오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이오가 목성을 한 바퀴 공전하는데, 지구가 목성에서 멀어진다면 빛은 더 많은 거리를 달려야 하니, 이오를 보는 시간은 좀 더 걸릴 것이다. 반대로, 지구가 목성 가까이 다가간다면 이오를 보는 시간은 단축될 것이다.
이오가 목성을 한 바퀴 돌고 난 시간이 바로 공전주기인데 지구가 멀어지고 가까워짐에 따라 이오를 마주하는 시간이 달라졌다. 그러니 결국 이오의 공전주기가 변한 것이다. 측정할 때마다 이오의 공전주기가 매번 다른 이유가 이렇게 해서 밝혀졌다.
뢰머가 내놓은 답은 바로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이는 천동설을 부정하는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이오의 공전주기는 43시간 남짓이다. 즉 43시간 이후에 이오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오가 공전하는 동안 지구가 멈춰 있는 것이 아니다. 지구도 태양 둘레를 공전한다. 뢰머는 여기에 착안해 새로운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구가 목성에서 가장 가까울 때와 가장 멀 때 목성의 월식이 22분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지구가 공전하는 궤도의 지름만큼 빛이 더 달려오느라 22분 늦게 월식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여 빛의 속도를 계산했다.
이러한 현상을 뢰머는 빛의 속도가 유한하다는 가정하에 설명하였고 또한 빛의 속도를 구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지구 공전궤도의 지름(3억km)을 22분으로 나눈 초속 22만km가 나왔다. 비록 그 속도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값보다 1/3 정도 작은 값인데 이 오차는 그 당시의 천문학에서의 거리 측정이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는 광속을 실질적으로 구한 최초의 업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많은 과학자가 그의 뒤를 이어 빛의 속도를 조금씩 더 정밀하게 측정해 나갔다. 이렇게 해서 나온 빛의 속도가 초속 30만km 다.
이제 빛의 속도가 얼마인지까지 알아냈다. 문제는 빛의 정체가 남아 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과 여러 과학자가 빛이란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란 사실을 밝혀냈다. 하지만 빛이 ‘파동이다’, 혹은 ‘입자다’라며 논쟁만 많았을 뿐 진정한 그 정체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던 중 빛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등장했다. 바로 앞서 만난 마이클 패러데이다.
패러데이는 데이비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가 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과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럼에도 그가 주장한 전기와 자기는 같은 현상에 대한 두 가지 모습이라는 주장은 크게 설득력을 갖지 못했는데, 더 나아가 그는 또 다른 파격적인 주장을 했다.
그는 전선으로부터 방사된 전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자석과 태양의 빛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빛 자체도 전기처럼 파동을 일으키는 전자기파의 일종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15년 동안이나 빛도 역시 전자기파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던 그의 수학 실력은 이론을 뒷받침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그의 이론을 뒷받침할 조력자가 나타났다. 바로 제임스 클럭 맥스웰이었다. 맥스웰은 패러데이의 주장이 옳다고 믿고 있었고, 그 이론을 수학적으로 증명할 능력도 있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인류 문명의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미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된 패러데이를 위해 젊은 맥스웰은 멋진 선물을 한다. 패러데이의 이론을 증명할 수학적인 토대를 만든 것이다.
전기에서 자기가 발생하고 자기에서 전기가 발생하는 것은 아주 특수한 속도에서만 가능한데, 맥스웰의 방정식에서 그 속도를 구할 수 있었다. 그 속도는 초속 30만 킬로미터였다. 바로 빛의 속도였던 것이다. 이로써 빛은 전자기파라는 것을 증명했다. 맥스웰은 패러데이의 연구를 완성한 것이다.
전기와 자기는 같은 힘의 두 가지 다른 측면이다. 이제 이 힘은 1초에 30만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전자기파로 불린다. 보이는 형태로서의 빛, 바로 그 자체이다.
이제 아인슈타인의 E=mc2에서 에너지와 물질과 빛의 속도란 무엇인가가 자리 잡았다.
아인슈타인은 한가지 문제를 더 풀어야 했다. "왜 빛의 속도는 일정할까?"였다. 그의 이론에서 "c"는 변하지 않는 값이어야 한다. 대학을 갓 졸업할 때까지 아인슈타인은 그것을 증명할 수 없었다. 시간이나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러다 그가 베른의 특허청에서 일하게 되면서 가정도 안정되고 아이까지 태어나 심리적으로 편안해졌다. 서서히 그가 지난 10년 동안이나 고민해왔던 빛과 그것의 움직임에 대한 의문도 풀리기 시작했다.
그는 강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생각했다. 만약 한 아이가 배 위에서 그 배가 가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배 밖에서 그 아이를 볼 때 그 아이는 배보다 약간 더 빠르게 움직이는 셈이다. 반대로 배가 나아가는 방향의 반대 방향을 움직인다면 배의 속도에서 반대로 움직인 속도만큼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 된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우리가 달리는 기차를 밖에서 보고 있는데 기차가 시속 100km로 달리고 있고 기차가 달리는 방향으로 시속 20km로 달린다면, 그 사람의 속도는 100km의 속도에 20km의 속도를 더한 120km로 달리는 셈이다. 반대로 기차의 반대 방향으로 시속 20km의 속도로 달린다면 밖에서 본 그 사람의 속도는 80km가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속도는 이렇게 상대적인 개념이다. 움직이는 물체를 기준으로 했을 때,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커질 수도 혹은 작아질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속도이다.
이 배나 기차 위의 사람들은 모두 자연의 법칙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빛의 문제는 다르다. 아인슈타인은 제자리에 서 있는 사람과 빛에 가까운 속도로 달리는 배 사이로 빛이 지나간다면 그 빛의 속도는 제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나 배 위의 사람, 누가 보더라고 속도가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배를 타고 가는 사람은 빛의 방향으로 빛의 속도에 가깝게 움직이고 있다면 빛의 속도에서 자신이 움직이는 속도를 뺀 만큼 빛은 느리게 움직여야 하는데 여전히 배 위에서 보더라도 속도는 변하지 않는다.
배를 타고 움직이는 사람이나 강둑에 있는 사람 모두에게 빛의 속도가 같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인슈타인은 바로 이 문제에서 해답을 찾았다. 속도는 움직인 거리를 시간으로 나눈 것이다.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면 다른 무언가가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시간이나 거리다.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빛의 속도가 일정하고 시간의 속도가 일정하지 않다면 어떨까? 뉴턴 이후 모든 사람은 시간에 대해 절대적이고 결코 변하지 않는 일정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시간이 일정치 않다는 것은 아인슈타인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점차 그의 생각은 답을 찾아갔다. 모든 사람에게 시간이 다르다는 말은 움직이는 사람과 움직이지 않는 사람에게 시간이 다르다는 것이다.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이라도 정말 시간상으로 같은 시간에 일어난 것일까를 상상해 보았다.
두 아이가 기차역에서 시계를 맞추고 한 시간 후에 만나기로 하고 한 아이가 먼저 기차를 타고 떠난다. 그런데 이 기차는 빛의 속도에 가까운 초속 28만km로 달린다. 이때 밖에서 달리는 기차를 보던 아이의 눈에 기차의 길이는 줄어들어 보인다. 기차에 타고 있던 아이에게도 창으로 보는 밖의 풍경이 홀쭉하게 줄어 보인다. 그러다 기차가 잠시 정차해 밖의 시계를 보면 30분이 흘렀음을 알 수 있지만 기차 안에 있는 아이의 시계는 10분이 흘렀을 뿐이다. 빨리 달리는 기차 안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간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두 개의 거울을 평행하게 마주 보고 한쪽 거울에서 빛을 쏘아 다른 쪽 거울로 돌아오는 시간을 1초라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두 거울을 이동시키면서 빛을 쏘면 이 빛은 그림처럼 사선으로 이동하면서 돌아온다. 즉 빛이 움직이는 거리가 늘어난 것이다. 그래서 1초도 늘어나게 된다.
정지해 있는 거울에서의 1초가 ‘똑딱’이라면 움직이는 거울에서의 1초는 ‘또오옥딱’이 되는 것이다. 시간이 늘어난 것이다.
그럼 밖에서 달리는 기차를 보면 왜 축소될까? 거리는 시간 곱하기 속도이다. 시간이 2초에서 1초로 느려졌다면 길이 역시 줄어든다. 그래서 멈춰 선 아이가 본다면 길이는 줄어들어 보이고 시간은 느려지는 것이다. 길이가 축소되는 이유는 뒤에서 더 설명할 것이다.
그럼 기차 안으로 이동해 실험을 해보자. 세 명의 아이가 빛의 속도에 가깝게 달리는 기차를 타고 가다 두 아이가 기차의 양쪽 끝으로 가고 한 아이가 기차의 한가운데 있을 때 가운데 아이를 향해 동시에 빛을 쏘면 어떻게 될까? 가운데 아이가 보기에 빛은 동시에 도착한다. 그럼 밖에서 이것을 지켜보던 아이의 눈에 그 빛은 어떻게 보일까?
밖에 있는 아이의 눈에는 기차가 가는 방향에서 뒤쪽에 있는 아이가 먼저 빛을 쏜 것으로 보인다. 왜 그럴까? 밖에서 볼 때 가운데 있는 아이는 기차가 가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아이에게 동시에 빛이 닿으려면 밖에 있는 아이가 볼 때 뒤쪽의 아이가 먼저 빛을 쏘아야만 한다. 빛이 도달하는 동안 가운데 아이는 기차가 가는 방향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기차에 타고 있는 아이에게 빛이 동시에 쏘아졌지만, 밖에 있는 아이에게 뒤에 있는 아이가 먼저 쏜 것이다. 누가 옳을까? 두 아이 모두 맞다.
열차에 타고 있는 아이에게 동시에 일어났지만, 운동상태가 다른 열차 밖의 아이에겐 동시에 일어난 일이 아닐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지금까지의 절대적인 시간 개념을 무너뜨려 버렸다.
약간 상황을 바꿔 다음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열차의 아이는 움직이고 ‘가’와 ‘나’의 빛이 열차 밖에서 동시에 켜진다면 열차 안의 아이에게 어떻게 보일까? 이것도 마찬가지로 열차의 관찰자에게는 ‘가’의 빛이 먼저 켜진다.
열차를 탄 아이는 ‘가’를 향해 가고 있어 빛과 아이와의 거리가 좁혀지지만 반대로 ‘나’의 빛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된다. 그래서 ‘가’의 빛이 켜진 것을 확인하는 순간 ‘나’의 빛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켜지지 않은 것으로 보이다.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각기 다르게 움직이는 시계를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결국, 지구에서의 시간과 화성에서의 시간, 목성에서의 시간도 다르다. 우주 곳곳의 시간이 모두 다르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흘러가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우리는 움직이는 물체에서의 시간이란 항상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 앞에서 기차가 줄어드는 것처럼 거리도 줄어들까?
이제 다시 아인슈타인이 고민한 거울을 들고 뛸 때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우리가 거울을 본다는 것은 내 얼굴을 비춘 빛이 거울로 가서 다시 되돌아오면 나의 얼굴이 보이게 된다. 그런데 만약 거울을 앞에 들고 빛의 속도로 여행한다면 어떨까?
시속 30km로 흐르는 강을 따라가며 시속 30km로 달리는 배 위에서 강물을 보면 강은 어떻게 보일까? 강물이 흘러가는 속도와 배의 속도가 같아 배는 멈춰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이렇게 강물에 흘러가는 배처럼 빛을 생각한다면, 빛의 속도로 달릴 때 빛은 거울에 도달하지 못하고 난 보이지 않을 것이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다.
이러한 모순으로 아인슈타인은 빛은 다른 파동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만약 누군가가 손전등을 들고 달리면 손전등에서 나오는 빛의 속도는 그 사람이 달리는 속도를 더한 만큼 더 빠르게 갈까? 만약 그 사람이 속도를 점점 높여가며 뛴다면 빛의 속도도 따라서 점점 더 커질까?
우리가 차 안에서 차가 진행하는 방향으로 공을 던지면 그 공은 차의 속도와 공의 속도를 더한 만큼 빨리 날아간다. 이것은 갈릴레이가 내놓은 ‘속도덧셈법칙’이라고 한다. 만약 갈릴레이의 속도덧셈법칙을 따른다면 당연히 빛도 그렇게 될 것이다. 이 사람이 빨리 뛰면 빨리 뛸수록 빛의 속도도 점점 더 커지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다르게 생각한다. 갈릴레이의 속도덧셈 법칙이 빛에는 적용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움직이는 관찰자가 보든 정지해 있는 관찰자가 보든 빛은 똑같은 속도로 보인다고 가정했다.
이러한 가정에 이르자 문제가 풀리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이 빛의 속도로 달리면서 거울을 보든 정지한 상태에서 빛을 보든 그 속도는 같으므로, 내가 빛의 속도로 달리면서 거울을 보면 내 얼굴을 떠나 거울로 간 빛이 반사되어 다시 내 눈에 들어오게 된다. 결국,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 거리는 속도×시간이기 때문에 빛의 속도가 변하지 않고 이동 거리도 그대로라면 하나가 달라져야 한다. 바로 시간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이 만약 빛의 속도로 달까지 간다면 달까지의 거리가 변함이 없으니 결국 시간이 멈춰야 한다.
이제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결론에 이른다. 내가 만약 빛의 속도로 여행하면 시간이 멈추거나 시간이 흐른다면 길이가 축소되는 것이다.
앞에서 달리는 기차가 밖에서 본 관찰자에게 길이가 줄어 보이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