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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Jun 06. 2022

비건은 아니지만

나의 주방 일지-2

손님이 몰리는 바쁜 시간대에만 일하고 있어 아직도 나는 고기 내는 일이 익숙하지 않다.


사이드 주문이 뜸해져도 고기 주문이 많을 때는 주방장님에게 말을 붙이기가 민폐로 느껴진다. 마침 모든 주문이 잠잠해졌을 때 도마 쪽을 보니 주방장 님이 삼겹살을 잡고 있어 해보겠다고 나섰다.


내가 일하는 가게는 체인점이라 모든 고기는 부위별로 말끔히 랩핑되어 입고가 된다.  앞으로 갈수록 완만하게 좁아지는 사다리꼴 모양의 삼겹살 부위는 한쪽 면이 완전히 지방으로 덮여있다. 오래 쌓여 밀도 높은 눈길처럼 새하얀 모습이다.


먼저 포장을 걷어내고 키친타월로 핏물을 닦아낸 후 칼질을 시작한다. 세로로 길게 반을 가르고 가로로 두툼하게 썰어 차곡차곡 스테인리스 트레이에 옮겨 담으면 준비가 끝난다. 어려운 과정은 아니지만 손님에게 나갈 때 계량이 필요하므로 적절한 그램을 고려하면서 두께를 맞춰야 한다.


칼질하는 법을 알려주겠다며 삼겹살을 세로로 가르는

주방장님의 시범을 집중해서 바라봤다. 그런데 뜬금없이 칼 아래에 놓여 있는 것이 생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비건은 아니지만 지인 몇몇이 엄격한 비건인지라 종종 그들이 어떤 마음에서 비건을 실천하고 있는지 헤아려 본 적이 있었다.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날에는 직접 비건 요리를 만들기도 했고, 채식 요리 레시피와 가게를 찾는 일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걸 직접 체감하고는 그들의 노력에 존경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동물권 운동을 하는 지인의 얼굴이 스쳐지나가고 나니 주방장님 어깨 너머의 칼질이 도륙으로 다가왔다. 돼지 고기든 소고기든 닭고기든 어쨌든 인간의 음식이 되기 전까지는 살아있는 몸이었고 살이었을 것이다.


직접 칼을 들어 살을 가르면 동물의 몸은 너무 쉽게

썰린다. 죽어있므로 저항도 없고, 손질돼 있으므로 무리도 없다. 쉽게 절단되고 구분된다. 이렇게 편리하다니.


나는 오래 전에 다녔던 교회에서의 성찬식도 끔찍했던 사람이다. 왜 하필 우리는 예수님의 피와 살을 포도주와 빵으로 '먹어 삼켜'야만 하는 걸까. 검붉은 싸구려 와인을 담은 그릇 앞에서 나는 예수가 골고다를 오르며 흘렸던 피를, 가시면류관을 쓰고 얼굴 밑으로 흐르는 피를, 십자가 위에 올라 손목 발목에 흘린 피를, 창에 찔려 흘렸던 옆구리의 피를 모두 연상했다. 그 피를 먹는다면, 그 몸을 먹는다면 아마 우리는 경악하면서 동시에 조금은 더 착해질 것이다. 문화라고는 전혀 경험해본 적이 없고, 이야기라고는 전설과 성경밖에는 알지 못했던 옛 동화 속의 농부들처럼.


그런데 성찬식을 둘러보면 공허한 눈빛을 가진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잠깐의 엄숙이 신기하다는 듯 가벼운 어색함을 비추거나 적신 빵을 무던히 습관적으로 받아 먹는 사람들이 있었을 뿐이다.


돼지와 피와 예수의 피는 물론 다르다. 예수의 피는 기독교인에게 중요할 것이고 돼지의 피는 인간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돼지의 피와 예수의 피는 똑같이 피다.


그럼에도 며칠 후부터 주방장님을 도와 고기를 잡을 때,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됐다. 방금 전에 잘못 나간 주문을 생각하며 언제까지 여기서 일할 수 있을 헤아렸을 뿐이다. 아마 앞으로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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