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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앨리스 10화

변신 II

이상주의자의 이름

by 유하



몇 주 전, 엄마와 전화 통화를 하며 엄마를 혼냈다. 맞다. 딸인 내가 엄마를 혼냈다. 몇 해 전 엄마에게서 들은 "너 좋은 딸 아니야."라는 말과 내가 받아야 마땅한 방식으로 애정을 주지 않은 것에 대한 복수였다. 잔인하게도 그 순간 엄마로서의 권위는 무너졌고, 독립된 인격체로서 나는 살아났다.



하지만 맹세하건대 단지 복수만은 아니었다. 그래도 가장 가까이에서 여러 굴곡과 상처를 지켜봐 온 입장에서 진정 어린 말들을 전하고 싶었다. 엄마와 딸의 관계로서보다는 사람 대 사람으로서. 나는 간절히 바랐다. 그녀의 자립과 행복을. 얼마나 더 내려놓아야 되냐고 울먹이는 엄마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 나는 냉정하게 엄마의 인생을 인정했고, 비판했다. 대화 속에서는 어김없이 아빠를 향해 응어리진 엄마의 감정들이 배출되었다. 아빠에 대해서 엄마가 사랑하는 신은 뭐라고 말하냐고 물었다. 처음이었다. 엄마가 모르겠다고 말한 건. 그 답을 들은 것은 며칠이 지난 엄마와의 점심 식사 자리에서였다. 엄마는 아빠를 위로해 주어야겠다는 마음을 고백했다.



이후로 종종 엄마와 아빠를 만나 식사를 하고 담소도 나눈다. 엄마는 어딘가 좀 달라졌다. 훨씬 사근사근해졌달까. 엄마가 다르게 행동하니 아빠도 내심 좋아하는 게 보인다. 예전보다 더 자주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 같다. 둘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같은 곳을 보며 함께 걸어왔다. 대판 싸우거나 서로에게 무심할 때도 언제나 함께였다. 그랬으면서 뭘 그렇게 서로를 불신했는지. 각자가 서로에 대해 털어놓는 얘기들을 듣고 있으면 똑같은 방식의 불신에 소름이 돋곤 했다. 어릴 적, 나는 그들이 서로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 이제서야 그 반대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 역시 오래도록 그들의 사랑을 불신해 왔다. 그들 서로 간의 사랑과 더불어 나에 대한 사랑 또한 불신했다. 나는 상냥한 딸이 되지 않음으로써 그런 불신을 표출했고, 뒤에서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올해 분가를 하면서 나는 어느 때보다도 강인해졌고 건강해졌지만, 불신만큼은 여전한 미제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한 발짝 더 가까워진 그들을 보며 나 역시 마음에 어떤 변화가 생겼음을 인정해야겠다. 부모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상냥하지 않은 딸의 도발에도 그저 묵묵히 듣는다는 것, 그 말들을 수용하고 삶에 적용한다는 것. 냉랭한 말 속의 상흔과 거친 배움의 과정을 보지 못했다면 모두 불가능한 일들이다. 사랑이 아니라 부정하기에 그들의 태도는 너무도 인자하다. 서툴다는 이유로, 나의 아름다운 이상에 빗나간다는 이유로, 나는 그들을 얼마나 매섭게 몰아붙였던가.








나의 마음에 각별한 손님처럼 찾아온 변화를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겠다. 세상을 보는 시각에 새싹과 같은 믿음이 자라나기 시작했다고. 나는 '믿음'이 종교적이고 비논리적인 개념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하지만 스스로 일어서 보려니 알겠다. 나에 대한 믿음, 타인과 세상에 대한 믿음은 너무도 중요하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믿음은 세계와의 건강한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을 하기 위한 단단한 토대로 작용한다. 믿음이야말로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심리적인 구멍을 메우고 보호막처럼 코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소였다. 믿음이 있어야 내면의 힘을 안정적으로 꾸준히 쌓아갈 수 있고 스스로의 능력이 가진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사춘기를 보냈던 미국의 학교. 그곳에서는 학기의 마지막 날, 롤링 페이퍼처럼 친구들과 서로의 연감(yearbook) 내지에 사인을 하고 쪽글을 적는다. 내 연감 안에 적힌,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한 친구의 문구가 있다. '변하지 마.(Don't Change.)' 그는 내가 과제로 썼던 소설의 '나를 바꾸는 것'이라는 제목을 의식한 것일까. 그의 말은 내가 나로서 불안할 때도, 나의 일부로부터 절실히 달아나려 할 때도, 나의 마음 한 켠에 다소곳이 앉아서 은은한 종소리 같은 것을 내며 자신의 존재를 고요히도 알렸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겪게 되는 기이한 변화들은 불신을 통한 변신으로 설명되었다. 언제나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상주의자로서 이제는 불신 대신 믿음을 통한 변신을 상상해 본다. 새로운 변신을 꿈꾼다. 불신에 대한 덤덤한 인정 이후에 이루어지는 믿음을 통한 변신, 그것은 훨씬 더 고차원적인 능력이다. 나 자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 위에 세워진 변신은 불신을 통한 변신과는 달리 서두르지 않는다. 외관적으로 화려하지도 괴상하지도 않다. 스스로의 가치를 믿기에 여유롭고 담백하다. 마치 디즈니 버전의 이상한 나라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앨리스의 뒷모습과도 같다. 이상한 나라에서 새로운 장소로의 탐방을 알리는 앨리스의 뒷모습처럼, 이 새로운 변신은 단지 본래의 모습 그대로, 호기심과 용기만을 치마 속 호주머니에 넣은 채 새로운 세계를 향해 발을 내딛는 것이다. 관람자로부터 몇 발걸음 앞서 있는 위치, 보이지 않는 앨리스의 얼굴은 앞으로 펼쳐질 그의 다양무쌍한 가능성을 의미한다.




디즈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①~⑦ 다양한 장면들에서의 앨리스의 뒷모습.








나의 이름에는 '진실'을 뜻하는 한자어가 있다. 얼마 전, 이 한자어를 검색했다가 '진실'이라는 단어 아래에 '믿음'이 써 있는 것을 보았다. 언제나 나와 세계에 대한 더욱 선명한 진실을 향해 나아갔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믿음? 나의 구멍, 구멍 중의 구멍, 그 근원, 믿음이라니. 결핍은 곧 욕망이다. 우리는 결핍되어 있는 것을 욕망한다. 무언가를 간절히 욕망하면 그것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기도 한다. 그리고 결국 바라던 것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결핍은 길고 멀리 본다면 내가 갈구하는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나에게 구멍 난 믿음이 믿음에 대한 간절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며 진실을 좇도록 추동한 것은 아닐까. 불신에서 믿음으로 이르는 삶. 그것이야말로 ‘진실'과 '믿음'이라는 나의 이름으로부터 부여받은 의미와 사명은 아닐지. 내 삶이 어찌 되었든, 이름처럼 살고 있었다. 나를 찾는 순간에마저 나는 나였다. 그 사실이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나는 이상주의자. 나의 이름은 진실. 나는 내 안의 앨리스를 부른다. 앨리스, 이제 너도 자신을 믿어 보지 그러니. 앨리스, 앨리스! 텅 비어 있던 구멍은 이제 믿음으로 채워진다. 뒤를 돌아보는 앨리스. 비로소 마주하게 된 나의 얼굴. 사랑했지만 불투명하게 희뿌옇던 얼굴들, 그들이 선명해진다. 이제서야 나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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