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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장 Nov 19. 2022

덩굴은 어디에선가는 멀쩡히 살아있다

심리적 문제의 근원. 특별한 대상 되고자 하는 욕구.

  게스트하우스에 함께 묵었던 사람이 곶자왈 해설 투어를 가겠느냐 물었다. 특별한 일정이 없었던 나는 곧장 따라가겠노라 했다. 해설 투어를 추천받은 적인 있으나 지루하지  않을까 하여 망설였던 터였다.


  곶자왈에는 유독 덩굴식물이 많다 한다. 나무를 따라 오르는 덩굴 때문에 나무의 일부분은 이파리를 피울 수 없고 살아남기 어렵다고도 한다. 때로 나무를 살리기 위해 덩굴을 잘라버리곤 하지만 그래도 살아남을 덩굴은 살아남고 죽을 나무는 죽는다고 한다.


  해설사님의 설명 중 가장 와닿았던 부분은 덩굴이 죽었다 해서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덩굴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덩굴은 여기저기로 뻗어나가는 거라 어디에 선가는 잘 자라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저 자연의 일부분을 설명했을 뿐인데 나에겐 매우 신선한 일이었다. 우리는 덩굴의 죽은 부분만 보고 안타까워할 뿐이다. 그렇지만 다른 곳에선 살아있는 덩굴이 사람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이 어느 한 영역에서 나약하고 부족해 보일지라도 어떤 영역에서는 분명 강하고 건강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어떤 부분에서 무너져 내려 아무것도 못하는 것처럼 보여도 일상생활을 지속하며 나름의 역할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평소에 한 사람의 약한 부분을 보면 달려드는 경향이 있다. "내가 보듬어줄 수 있어."라는 마음으로. 그의 아픔을 보면 내가 아픈 듯 힘들고, 왜 그럴까 조금 덜 힘들면 좋겠다 생각한다. 상대를 위한 거라 생각하지만 실은 그에게 중요하고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내 욕심이기도 하다. 이 틈을 타 그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어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나의 특기가 따뜻함과 위로라고는 하지만 상대방 입장에서는 반칙일지도 모른다. 약점을 가지고 따뜻하게 흔드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해설사님의 "덩굴은 어디에 뿌리가 있는지 몰라요."라는 말은 마치 고통의 이유를 꼭 찾아야 할 필요는 없어요 하고 말하는 듯했다. 대학교 이후로 나와 타인의 심리적 문제의 근원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 보통은 내가 왜 이러지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 내가 좀 이상한 것 같아 라는 마음이 들 때 그 근원을 찾곤 한다. 힘들어 죽겠는데 그 힘든 것에 집중할 수 없을 때, 이렇게까지 힘들어도 되나 하는 의구심이 들 때 말이다. 내가 내 감정을 믿을 수 없을 때, 이럴만하다 인정이 되지 않을 때 말이다.

  그렇지만 해설사님은 덩굴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지 몰라요. 어쨌거나 그들은 잘 살고 있는 걸요 라고 말하곤 한다. 누군가 내게 보여주는 모습이 나약할지라도 어느 부분에선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고, 누군가는 밝은 모습만 보여줘도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내게 나약해 보이는 사람을 굳이 과하게 안타까워하거나 헌신적으로 도울 필요 없다는 깨달음을 얻어본다. 나를 던질 필요도, 나를 끼워 맞출 필요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가 왜 그러는지 굳이 뿌리를 찾을 필요가 없는 거였다. 내게 어떤 사람인지,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되는 거였다. 표현하지 않은 마음에 무엇이 있는 줄 알고 이해하려고 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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