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소식이 있어 그런지 요사이 엄청 덥다. 갑자기 더워진 날씨 탓에 낮엔 무기력함이 느껴지고 밤잠은 설치는 며칠이 계속되었다. 며칠째 아이들이 나와 함께 자길 바라와서 안방에서 셋이 나란히 누워 잠을 청했더니 세상모르고 자는 아이들만 행복하지 나는 너무나 더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오늘도 은근히 데워지는 나의 등의 온도를 느끼며 잠이 깨버렸다. 집안의 문을 열어 놓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시원한 바람이 우리 집을 관통했다. 베란다 카페에 앉아 테이블에 다리를 올려놓고 해변가에 온 듯 시원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오늘의 밤하늘은 구름과 별이 보이지 않는다. 밤이라 그런지 하늘의 상태가 온전히 보이진 않았지만 마냥 맑아 보이지는 않았다. 새벽의 소리는 고요하다. 정신없이 울려대는 풀벌레 소리가 가득하고 나무 사이를 오가는 바람이 창밖 세상의 적적함을 알려준다. 자정이 지난 새벽, 곧 월요일 아침을 맞이하게 되는 새벽은 특히나 조용하다. 주말을 만끽하던 나의 고삐를 바짝 쥔 채 월요일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인지 어느 때보다 조용하다.
가로등 사이로 곤히 잠자고 있는 차들만 보이고 오늘따라 항상 울던 고양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릴만도 한데 다들 자취를 감추었다. 사람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보니 다들 제대로 다음날을 준비하나 보다. 이렇게 홀로 베란다 카페에 앉아 있을 때면 알게 모를 희열을 느끼게 한다.
뭐랄까. 남들은 잠을 잘 때 나만 깨어 나의 일을 한다는 나만의 만족감.
20대 때 한창 열정이 많을 때도 나는 이런 새벽을 참 좋아했던 것 같다. 머릿속이 항상 부산하고 생각이 많은 내가 낮에 집중하며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새벽에 시도하곤 했다. 들려오는 건 풀벌레 소리뿐이고 불빛이라곤 내 책상의 스탠드에서만 볼 수 있다. 그렇게 나의 작은 세상이 완성되면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고 그런대서 알게 모르게 희열을 느꼈었다. 새벽은 나와 같은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20대의 내가 좋아했던 이 상황을 만끽하자니 기분이 좋아진다.
20대와는 다르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새벽 2시의 내 세상을 만끽하기엔 참 바른생활을 하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나의 생활은 참 건전하고 올바르고 인간적이다. 나는 원래 새벽을 좋아하고 자주 활용하곤 했다. 아이들 엄마가 된 뒤 조금 다른 변화가 생겼다면 새벽 6시쯤의 시간을 활용하게 되었다는 거다. 엄마가 되더니 체력을 최대한 보완해 가며 가족들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하다 보니 새벽을 좋아하던 나의 시간도 변화가 생겼다.
바뀌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패턴과 습관들이 내 상황에 맞게 맞춰진다는 게 참 신기하다. 컴퓨터를 밤새 하고 있던 젊은 시절 아이들을 보는 부모님의 잔소리 어택이 사실상 필요 없다는 걸 엄마가 되고 많이 느낀다. 부모는 아이들이 잘되라고 잔소리를 늘어놓지만 생각해보면 그때 그 시절은 그냥 그렇게 지나가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만이 할 수 있는 자유를 부모의 잔소리로 차단하고 막아 놓고 애 엄마가 돼서 그 자유를 찾겠다고 주장한다면 그것도 참 슬픈 일이다. 비정상적인 패턴, 말도 안 되는 객기, 멈출 수 없는 열정, 꼬꾸라지는 삶 등. 한 살이라도 젊고 소생 가능할 때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다.
흐르는 물이 고이지 않게 두는 것도 잔소리만큼이나 좋은 것임을 어느 순간 깨달으면 그 사이 어느 곳에서 균형을 이루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던 나의 패턴들이 어떤 계기에 의해 변화되는 것처럼 경험은 참 중요하고 결과물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삶도 바뀌어진다. 당장 내 아이가 기이한 행동을 한다 해도 스스로를 해할 만큼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면 그대로 믿고 봐주는 것도 괜찮은 부모의 덕목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