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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운 Apr 13. 2022

가족 간에도 거리가 필요하다.


“너 뭐하는 새끼야?”

   

   15년도 더 지난 일이다. 친구 H와 함께 동대문에서 쇼핑을 하며 모처럼의 휴일을 만끽하고 있던 중,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S였다. 그는 내 전화가 맞는지 확인을 거치더니, 다짜고짜 육두문자를 난사하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단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S는 고 2 때 활동하던 온라인 소설 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사람이다내가 활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얼굴도 모르고본명도 모르고 심지어 나이도 나보다 많다는 것만 아는그런 사이였기 때문에 연락처조차 없었다.


   생판 남이라고 해도 무방한 S가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내 연락처를 찾아내고나에게 육두문자를 날린 이유는 다름 아닌 메신저였다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만났기 때문에 핸드폰 연락처는 없어도 메신저로는 종종 연락을 주고받았었다. 여느 때처럼 그가 나에게 메신저로 말을 걸었는데 메신저 상의 가 반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어이가 없어서 뭐라고 따지니 죽고 싶냐?” “죽여봐~”하는 식의 말장난을 하길래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고 했다.


   불행 중 다행히도 함께 있던 H도 S와 서로 아는 사이라서 나의 알리바이는 완벽하게 증명되었다어쨌든 메신저 상의 가 한 실수이니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를 했지만 도대체 누가 그런 장난을 쳤는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한숨을 푹 쉬더니 S가 물어봤다.

   “동생 있냐?”

   “없는데요...”

    “그럼 누군데누가 니 메신저로 그런 식으로 장난질을 해?”

    “...... 확실하진 않은데... 짚이는 게 있어요... 아버... 님이... 하셨을 수도...”

    “아버지가 그러셨다고장난하냐? 지금x?”

    “이해가 안 되시겠지만... 그게... 그러고도 남으실 분이라... 하하...”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아버지가 아들 메신저로 장난을 쳤다.’ 내가 생각해도 황당한 변명에 S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지만 완벽한 알리바이 덕분에 더 이상 뭐라고 따지지는 않았다. 차라리 해킹당했다는 말을 믿겠다며 다음부터는 주의하라며 두고 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솔직히 나조차도 내 친구 아버지가 내 친구 메신저로 내게 그런 장난을 쳤다면믿지 않았을 거다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집에 돌아와 확인해보니 역시 아버지가 내 메신저를 사용했었다.


   내가 동대문에 나간 사이 아버지가 컴퓨터를 켜자 자동 로그인 상태의 메신저도 함께 켜졌고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니 친구겠거니 하고 편한 마음으로 몇 마디를 주고받으셨다고 했다상대방이 좀 화가 많이 난 거 같아서 마지막에는 전 xx 아니에요~ xx한테 화내지 마세요.”라고 친절한(?) 해명까지 남기셨다고 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황당하고화가 치밀어 올랐다물론 그만큼 부모님과 내 사이가 다른 가정에 비해 친밀했기 때문에 가능한 해프닝이고완벽한 알리바이 덕분에 큰 문제없이 넘어가긴 했으니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적어도 나는 최소한의 사생활은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그것이 부모 자식을 떠나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입장을 바꿔 아버지 메신저로 내가 아버지 회사의 직장 상사에게 막말을 했다고 가정해보자그야말로 대형사고일 것이다물론그런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배웠기 때문에 아버지 메신저를 이용하는 일은 정말 부득이한 경우 외에는 없을 것이다.


   비단 막말이 아니더라도 아버지의 메신저로 제삼자와 불필요한 말을 주고받는 일이 기본 예의가 아닌 이유는 자식과 부모라는 관계 때문만은 아니다나이성별지위 모든 것을 떠나 우리 모두에게는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그렇기 때문에 제아무리 친하더라도내가 윗사람이더라도 타인의 메신저를 허락도 없이 이용하는 행위는 예의에 어긋난 행동인 것이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그날 이후로 부모님께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감추기 시작했다. H의 증언 덕분에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지만 그날 S은 오프라인으로 나를 찾아와서 따지려고-주먹다짐까지-생각했었다고 말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두 번 다시 부모님의 장난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고 갈등을 겪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부모님은 S를 비롯해 온라인상에서 내가 만나는 친구들을 썩 좋아하지 않기도 하셨고.


   솔직히 말해서 내가 겪은 메신저의 사례는 부모 자식의 관계가 극단적으로 친밀한 경우에나 발생할 수 있는 그야말로 드문 해프닝이었다문제는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부모님들의 과도한 사생활 침해가 빈번하다는 것이다.


   아끼던 물건을 너 요즘 안 쓰니까 동생 주자~”라며 열심히 모은 수집품(장난감이라든가 책이라든가)들을 생판 처음 보는 이웃집 동생에게 줘버린다거나아끼던 옷을 정리한다며 버려버린다거나혹자는 대부분 부모님의 돈으로 구매했고여태까지 부모님의 지원을 받고 성장한 만큼 부모에게 그만한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내 생각은 그와 다른데가장 큰 이유는 장난감을 사준다거나책을 사주고옷을 사주었다면, 누가 돈을 지불했는지와 상관없이 소유권이 넘어갔기 때문이다쉽게 말해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 설정을 떠나서 친구에게 사준 선물을 ‘너 이 선물 요즘 안 쓰지? 내가 돈을 주고 산 거니까 내 마음대로 처분할게라고 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세상에서 제일 치사한 짓이 줬다 뺏는 짓이라는 말처럼 절대 상식적으로 이해되는 상황은 아니다. 유독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만 구매자(부모)’의 권리를 주장하는 건 모순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그동안 먹여주고 재워줬으니 어느 정도는 부모 뜻대로 할 수 있지 않느냐라고 할지 모르겠다. 나는 자식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은 부모의 의무일 뿐 그에 따라 부모가 마음대로 자식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만일 그 논리대로라면 고아원에서 아이를 입양 후 20년 동안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장난감을 사준 후 내가 이 아이를 이렇게 키웠으니 내 마음대로 할게.”라며 노예처럼 부려먹어도 된다는 뜻인가? 당연한 얘기지만 말도 안 된다. 슬프게도 스카이캐슬이니 펜트하우스니 하는 부모의 비뚤어진 애정을 그린 드라마들이 여전히 인기를 끄는 것을 보면 아직까지도 부모라는 이유로, 먹여주고재워주고입혀줬다는 이유로 자신의 뜻대로 자식들의 A부터 Z까지 컨트롤하려는 부모들이 많은 것 같다. 잊을만하면 안녕하세요에 부모님의 과도한 간섭이 고민이라는 사연이 올라오기도 하고.


   자식은 부모의 꿈을 대신 이뤄주는 존재도 아니고, 부모를 위해 살아야 할 존재도 아니다. 엄연히 별개의 인격체이기 때문에 존중받아 마땅하고, 그만큼 일정 거리가 필요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부모님이 자식의 생활에 대해 그 어떤 터치도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다부모님의 은혜를 외면하고 내 멋대로 살아도 된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부모님에게 받은 은혜를 고마워하고 언젠가 갚을 준비를 하는 것은 자식 된 도리이자 의무이다1촌이라고 부를 만큼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다한없이 베풀어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 부모님의 마음이고또 그런 부모님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자식의 마음이다다만 지나치게 가까운 나머지 제삼자에게는 하지 않을 행동들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는 말자는 얘기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이에게사랑한다는 이유로 상처를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가끔씩은 모르는 척바쁜 척 한 발 떨어져 바라봐주는 것만으로도 상처를 주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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