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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운 Apr 24. 2022

아버지의 핸드폰 케이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

아버지의 핸드폰 케이스

   지난주에 아버지 생신을 맞아 핸드폰 케이스를 바꿔드렸다. 2019년 말에 바꿔드렸는데 어느새 많이 낡아 있었다. 문득 처음 핸드폰 케이스를 바꿔드렸을 때가 생각났다. 당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어머니가 용돈을(그때는 찐백수라 핸드폰 케이스 살 여유도 없었다ㅠ) 주시면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버지가 쓰실 핸드폰 케이스를 하나 사 오라고 하셨다. 별생각 없이 아버지 핸드폰 기종을 물어보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카드를 꽂을 수 있는 케이스를 하나 사 왔다.


   생각보다 아버지께서 많이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괜히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핸드폰 케이스는 정말 사소한 것이지만 아들인 내가 선물해줬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하시는데 그동안 특별히 해드린 것 하나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한 집에 살면서도 아버지의 핸드폰 케이스가 어떤 상태인지 아무런 관심조차 없던 내 자신이 못내 부끄러웠다.


   흔히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들 한다. 부모님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라도 자식이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자식이 부모님을 사랑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 없고, 나 역시 부모님을 사랑하고 있는 평범한 자식이다.


   내가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내가 부모님에 대해서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가를 돌이켜보면, 당당하게 ‘부모님을 엄청 챙긴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일례로 부모님이 나의 사소한 변화나 버릇–예를 들면 난 토하면 피부가 두드러기 난 것처럼 변한다. 그 얼굴 변화만으로도 ‘토하고 왔냐?’며 약을 챙겨주시는 모습-까지 챙겨주셨지만 이번 아버지의 핸드폰 케이스만 생각하더라도 나는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가정의 자녀들이 비슷하게 부모님에게 무관심했고, 나의 부모님 또한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상대적으로 무관심했기 때문에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왜 똑같이 서로 사랑하는데 부모님의 변화는 잘 보이지 않고, 자식의 변화는 잘 보이는 걸까?


   아마도 부모와 자식의 눈높이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TV에서 강아지의 눈높이에서 본 세상이라는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당연히 사람들이 볼 거라고 생각하는 식탁 위의 음식, 담벼락 너머의 세상, 자동차 위의 사람들을 강아지들은 보지 못하고 있었다.

출처 : 개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中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87537.html

   우리가 거리를 지나다닐 때 사람의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지만 강아지의 눈에는 사람들의 얼굴 대신 무릎과 허벅지가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모습이 신선했다. 사람들의 평균 키가 160(여자)~170(남자)가 넘는 반면 개들은 초대형견인 그레이트 피레니즈(1박 2일에 나왔던 상근이다.)조차 80cm를 겨우 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강아지들이 주인과 함께 산책을 가더라도 강아지들은 사람들이 아무런 관심 없는 흙과 풀냄새를 맡고, 나무 기둥에 영역 표시를 하며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는 곳까지 기어들어가곤 하는 이유다.


   갓 태어난 신생아는 평균 50cm 내외라고 하니 부모 자식의 눈높이도 견주와 반려견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는 셈이다. 기어 다니는 영유아 시절은 물론이고 걸음마를 막 걷더라도 아이들이 볼 수 있는 세상에는 한계가 있다. 성인이라면 손쉽게 닿을 곳이지만 식탁 위, 싱크대, 책장 위 등에 아이들에게 위험한 물건을 숨겨놓았을 때 아이들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부모님과 눈높이가 비슷해지는 고등학생 때까지 늘 부모님은 자식들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 마치 조물주가 피조물을 보살피듯이, 플레이어가 게임 속 캐릭터를 키우듯이. 피조물이 조물주의 세상을 볼 수 없고 캐릭터가 화면 밖 캐릭터의 세상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자식들은 부모님의 세상을 100% 볼 수 없다.

출처 : 구글 검색 아이들 中

  부모님과 물리적인 눈높이가 비슷해지더라도, 혹은 부모님보다 키가 훌쩍 커서 부모님을 내려다보게 되더라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경험하더라도 부모님은 늘 나보다 먼저 경험했었고, 먼저 경험한 사람을 알고 있기 때문에 평생 부모님의 심리적인 눈높이가 자식보다 높이 있을 수밖에 없다. 물리적인 눈높이가 높이 있는 사람이 더 넓은 세상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심리적인 눈높이가 높은 사람이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세상 부모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너도 자식 키워봐.’이고, 세상 자식들이 가장 많이 하는 후회가 ‘너무 늦게 깨달았다.’이다. 아마도 자식을 키우는 부모 입장쯤 되어야 부모님과의 심리적 눈높이가 비슷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자식을 키우다 보면 내 부모님이 나를 챙겨준 것처럼 나 역시 내 아이를 챙겨야 하니 당장 부모님께 눈을 돌릴 여력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겨우 여유가 생겨 부모님을 돌아보면, 이미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누군가는 내리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고 말한다. 굳이 부모가 바라는 대가가 있다면 자기 자식한테 잘하는 것이 내리사랑에 대한 대가라는 것이다. 또 누군가는 내리사랑 자체가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에 굳이 억지로 치사랑을 할 필요도, 못한다고 좌절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출처 : 구글 검색 폭포 中

   아무리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하더라도 받은 만큼, 아니 최소한 받은 것의 반의반의반의반만이라도 갚고 싶지만, 매번 마음처럼 잘 안 된다. 3년 전에도, 이번에도 난 아버지의 핸드폰 케이스다 헤질 때까지 아무 생각이 없었고, 작년에 아버지가 수술하셨을 때도 이상 징후조차 느끼지 못했다.


   언제쯤 내가 먼저 부모님의 사소한 변화를 눈치채고 챙겨드릴 수 있을까.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어야만 가능한 얘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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