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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익재 Sep 26. 2019

나의 유학 이야기, 1년 차.

4년 차, 그 해 가을, 한국에서.

한국에 잠시 들어온 지 정확히 3주일 째다.


올해 한국에 들어와서는 무엇보다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참에 나의 유학 이야기 그리고 한국에 들어오면서 느꼈던 감정 내지는 기분 변화에 대해 적어보고자 한다.


2016년, 유학 1년 차 / 2016년 12월, 첫 한국 방문.

2016년 2월 말 유학길에 올랐으니 약 10개월 만의 한국 방문이었다.

학부를 졸업하고 이틀 만에 오른 유학길. 졸업 후 한국에 계속 머물며 다른 생각을 하기 싫다는 생각에 내린 결정이었다.


학부시절, 교환학생으로 잠시 미국에 있었던 적은 있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돌아올 날이 있다는 것과,
그 기약이 없다는 차이가 나로 하여금 힘들게 만들었다.

유학의 시작

학부에 진학하고서부터 대학원까지 진학해서 연구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항상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유학을 가게 될 지는 나도 전혀 생각치 못했다. 다만, 학부 1학년 때 교환학생으로 잠시 다녀온 미국에서 유학에 대한 꿈이 싹트기 시작했고, 2학년 때 지도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갑자기 독일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으며, 그 관심은 이윽고 독일어 공부를 시작케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졸업 후 독일로 떠나게 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


당시, 나의 독일 첫 정착지는 독일의 대표적인 경제도시, 프랑크푸르트 암마인(Frankfurt a. M)이었다.


통상 많은 유학 준비생들이 선택하는 유학지는 아니었다.

아마, 타 지역보다도 비싼 물가 그리고 크게 볼 것이 없는 도시 광경도 작지만 한몫을 했을 것이다.


물론 나에게는 아니다. 물가 비싼 것은 언제나 인정하지만, 도시 광경은 참 예쁘다.

가끔 고민이 생기거나 속이 뒤틀리면 가는 곳이니.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런 것이 될 수도 있다.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중앙역을 등지고 찍은 사진. 금호타이어 광고가 눈에 들어온다.

유학을 떠나기 한 해 전, 독일에서 공부하신 학부 지도교수님의 권유로 독일 여행을 한 번 떠난 적이 있는데,

거기서 처음 만났던 그리고 헤어졌던 도시가 프랑크푸르트여서 그런지 기억에 많이 남았던 연유로 그곳을 선택했다.


2월 21일, '여행자'가 아닌 '유학생'으로 도착한 2월 말의 프랑크푸르트는 꽤나 추웠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모든 것이 낯선 환경 속에서도 행운이 따랐다.

유학을 떠나기 한 해 전, 여행으로 와서 잠시 머물렀던 프랑크푸르트의 한인민박 사장님과 인연이 되어 살 방을 구하기 전까지 약 열흘 간 저렴한 가격에 혼자서 머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셨다는 점 그리고 현지 물가보다 훨씬 저렴한 월세로 중심가 근처에 방을 하나 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였다.

처음 유학생으로 독일에 왔을 때 잠시간 머물었던 숙소.

처음 둥지를 튼 방의 크기는 크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 중심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갈루스 바르테(Galluswarte) 인근의 슈발바허 거리(Schwalbacher Straße)에 있는 한인 1.5세 집의 2층 방 하나를 얻었다.


처음 둥지를 튼 프랑크푸르트의 집. 확실한 것 하나 없는 해외생활에서 그래도 유일하게 나만이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래, 여기가 내 집이구나.
확실한 것 하나 없는 해외 생활에서 그래도 유일하게 나만이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을 얻었다는 안도감에 기분은 좋았다. 그래, 여기가 내 집이구나.



어학원 생활, 주거지 등록 그리고 첫 비자.

독일에 도착하고 이틀 후인 2월 23일, 어학원에 등록했다.

안그래도 물가 비싼 프랑크푸르트에서 독일문화원(Goethe-Institut) 같은 곳에 등록하긴 힘들었다.


프랑크푸르트 외곽의 뢰델하임(Rödelheim) 지역에 위치한 어학원 한 곳에 등록을 할 수 있었다.


원비는 월 250유로에 교재비 별도. 나름대로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어학원이 있던 뢰델하임(F-Rödelheim)에서 갈루스 바르테(F-Galluswarte)까지 날 태우고 다닌 광역전철(S-Bahn). 장소는 어학원이 있던 뢰델하임역.
어학 생활하던 당시 공부하던 책들, 배경은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교 Westend 캠퍼스

독일어는 유럽 언어 공통기준(CEFR)에 따른 총 6단계로 '외국어로서의 독일어(German as a Foriegn Language)' 수준이 나뉜다.


크게 기초적 언어 수준을 뜻하는 A단계, 중간 수준을 의미하는 B단계 그리고 자립적 언어 수준을 뜻하는 C단계로 구분되며 각 단계는 1, 2(A1, A2, B1, B2, C1, C2)로 나뉜다. 이렇게 총 여섯 단계가 된다.


한국에서 나름대로 공부를 해서 A1, A2자격증은 손에 쥐고 있는 상태라 바로 B1단계에 등록을 했다.


B1, B2 각 3개월씩 6개월 간 공부를 하면서 대학(원) 진학에 요구되는 C1을 함께 준비하겠다는 계산이었다.


더불어 독일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비자'또한 획득해야 했다.


독일 체류허가(Residence Permit)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선결조건들이 요구된다.

크게,

1. 해당 지역 주거지 등록(전입신고, 한국과 같이 독일은 전입신고제를 유지하는 국가이다.)

2. 은행계좌 개설(전입신고 후에 가능하며, 이 계좌에 유학에 필요한 폐쇄계좌 안에 돈을 입금한다.)

3. 슈페어콘토 입금(계좌 개설 후, 1년 간 생활할 수 있는 외국인법 상 정해진 금액을 입금한다. 2016년 당시, 1년 생활비로 책정된 금액은 7,980유로)

4. 어학원 등록 (학업 준비 비자(Studienvorbereitungsvisum)를 득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요건. 더불어 어학 비자 획득을 위한 어학원 등록에도 조건이 있는데, 1) 매일 출석하는 어학원일 것. 2) 하루에 3시간 이상 수업하는 인텐시브(Intensive) 코스일 것. 등이다.)

내 독일 생활 첫 체류허가(Residence Permit). 유효기간 1년의 어학연수비자다.
프랑크푸르트 전입신고 증명서 (Amtliche Meldebestätigung für die Anmeldung), 2016년 3월 2일 기준.

독일로 올 당시에 나는 많이들 받는 '워킹홀리데이'비자가 아닌 무비자로 독일 땅을 밟았기에 나에게 주어진 90일 내에 체류허가(영. Residence Permit, 독. Aufenthaltsgenehmigung)를 득해야만 했다.


여기서도 역시 많은 행운이 따랐다.


내가 살았던 프랑크푸르트 외국인청의 비자 신청은 미리 예약을 잡아서 갈 수도 있었지만,

통상 아침 일찍 줄을 서서 기다려 받는 것이 더 편했다.


그리고 난 독일어를 잘하지 못하는 상태여서 걱정을 많이 했지만, 당시에 알게 된 한국-독일 혼혈인 형과 알게 되었고, 비자뿐 아니라 내가 독일에 정착하는 거의 모든 과정에서 성심성의껏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개인적으로 참 감사한 사람이다.

(한국-독일 혼혈인 그는 처음에 부산에서 자랐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전형적인 서양인 얼굴과 풍채에서 구수한 부산 사투리가 나올 때면 뭐라 말 못 할 놀람이 있었다.)


결과적으로만 따지고 보면, 당시의 내 계산은 완전히 까지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는 맞아떨어졌다.

6개월을 예상했던 어학이 조금 더 늘어졌고, C1레벨을 획득하면 독일 대학에서 생활하고 공부하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내 안일함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리고 그 해 10월, 나는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내가 가고 싶었던 프랑크푸르트대학교(Goethe Universität Frankfurt am Main)는 아니었다.


프랑크푸르트가 위치한 헤센(Hessen) 주가 아닌, 서부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ordrhein-Westfalen) 주에 학교가 있었기에 이사를 가야 했다.


여러 군데 머물 방을 찾던 와중에, 학교 인근의 저렴한 사설 기숙사 한 곳을 찾을 수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이사 온 첫 집. 공동주거형태의 집이라 불편하기는 했지만, 사람 냄새가 났던, 간혹 떠오르는, 그런 곳.
화장실, 샤워실, 주방을 18명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주거공동체(WG, Wohngemeinschaft)'이긴 했지만, 최소한 세평 반(12m²) 크기의 내 방만은 혼자 쓸 수 있었다.

저 기숙사에서는 약 8개월 정도를 머무르고 지금껏 혼자 사는 원룸에 살고 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주거공동체 기숙사에 살았던 저 시간들이 그립기도 하다. 불편하긴 했어도, 사람 냄새가 났던 시간이어서 그랬을까.


2016년 10월, 학기 시작.

바라던 독일에서의 첫 학기가 시작되었다. 입학에 요구되는 어학 증명만 취득하면 대학 수업에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던 나의 안일함이 처참하리만큼 부서진 나머지, 학교에서 제공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별도의 독일어 코스를 들으며 학업을 시작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전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공부하고 떨리는 손을 들어 질문을 했으며,

교수님으로부터 대답을 들었을 때 기뻐하던 그런 순간들이었다.


그리고 난 독일에서의 첫 학기에 이어 첫 '방학'을 맞이한다.

내 첫 한국 방문의 시작이었다.


처음 한국에 들어오던 비행기 티켓.

2016년 12월, 크리스마스 방학, 한국, 설렘.

한국과는 달리 4월, 10월에 학기가 시작되는 독일에서는 10월 시작하는 가을학기가 2월 내지는 3월에 끝나는 관계로 12월 중순부터 약 3주 간 '크리스마스 방학'을 시행한다.


앞서 기술했던 약 10개월 간의 시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어서 그렇지, 절대적인 시간은 크게 흐르지 않았던 탓일까. 한국에 잠시 다녀와야는 생각이 그리 크게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던 찰나, 한국에서 부모님으로부터 잠시 들렀다 가라는 권유에 처음 한국행 비행기를 발권했다. 그렇게 한국에 들어왔다.


이윽고 자동입국심사대에서 울리는 기계음.

"띠링!"
"귀국을 환영합니다."


약 10개월 만에 들어온 한국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약 3주. 그 안에 만나고 싶었던 사람, 가고 싶었던 곳들을 다 둘러볼 생각... 을 했지만


"현실은 술파티"


간만에 들어온 한국에서 부모님들과 함께 시간도 보내고 했어야 했는데, 그저 친구들과 술먹고 노는데 정신이 팔려 거의 3주를 다 보냈었던 것 같다. 참 어리석었다.


유학생활을 하면서 유학지에 대한 자부심 내지는 말로 하지 못할 무언가가 가득 찬 상태를 두고 자조 섞인 이야기로 "뽕이 찬다."고들 한다.


그리고 저물어가는 나의 유학 1년 차의 끝, 그 어딘가에 있던 나는 누구나 그렇듯 확실히 '독일 뽕'이 가히 치사량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른바 '독일 뽕'으로 가득했던 유학 1개월 차의 어느 날. 헤센 주 주도인 비스바덴(Wiesbaden)에서. 작품명 '피죤 마스터'

한국에서 크리스마스와 2017년 새해를 맞이하고서 다시 돌아간 독일.

2년 차 생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글을 마무리하며

언젠가 내 독일 유학생활이 어떻게 끝나게 되든지 간에, 지나온 시간들을 한 번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쭉 했었습니다. 그 결심을 하고서 이 글을 쓰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네요.


쓰기 전에는, 글을 쓰면 무지막지하게 막 내용이 길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쓰고 보니 그렇게 내용이 길지가 않네요. 물론, 중간중간 세부적인 여러 이야기들을 배제하고 쓴 것도 있지만, 유학생활 속에서 '나의 이야기'만을 최대한 담으려 찾다 보니 그렇게 된 연유도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유학생활이라는 것이 그렇게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른바 '로망'이 가득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지나고 보면, "저 때 내가 더 노력했더라면 어땠을까", "조금 더 했다면 어땠을까" 같은 생각들이 더 많습니다.

우리네 일상에서 하는 고민들처럼 말이지요.


사람들마다 각자 나름의 '삶의 이유'를 가지고들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삶의 이유를 누군가 건드리는 순간, 그것은 때로는 하나의 '역린'을 건드는 행위가 되기도 하지요.


다음 글들에서도 연차별로 이어나가겠지만, 4년 차의 어딘가를 지나고 있는 지금, 생각해보면 1년 차 때 제가 가지고 있던 삶의 이유는 '자부심'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안 좋은 말로는 앞서 기술했던 '독일 뽕' 정도가 될 겁니다.


그땐 "독일은 이런 거 안 하는데", "독일이었으면 이랬을 거야" 등의 이야기를 막 남발하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역시 무식하면 용감합니다.


하지만 '독일 뽕'이 빠진 지금은 때론 저 때가 그립기도 합니다.


어학생으로 있을 때는, 정규 학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참 부러웠습니다. 

아마도 안정된 비자, '학위'라는 목표를 향해서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이유였지요.


반대로 지금은 어학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언제 학교가 될지, 어학생 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에 대한 막연한 고민들은 있지만, 반대로 어학 이외에는 큰 고민거리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람 생각이라는 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상황을 부러워하고 때로는 그리워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 의미로 참 간사하지요.


유학 1년 차,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생각치도 못했던 많은 경험들을 할 수 있었으며, 여러 도움을 많이 입었습니다. 이 글에 담지 못했지만, 훨씬 더 많은 여러 일들도 있었구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가운데, 유학을 준비하시는 분께서 계시다면 이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방황해도 괜찮습니다. 무조건 빨리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학위를 받는 것 만이 성공은 아닙니다. 독일에서 공부를 하고 지내본 것만으로도 삶의 큰 경험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실 저 이야기는 저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일 수도 있겠네요.


마지막으로, 핑계지만 지나온 유학생활에 대한 글을 쓰지 못했던 혹은 않았던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전을 생각하면 할수록 후회와 자책만이 남을 것 같아서였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그때의 저를 마주하니 반갑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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