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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공 Jul 29. 2020

죽음, 그리고 공포와 불안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까. 어떤 이들은 마치 잠들어 보이는 듯한 시신의 모습을 연상하며 죽음은 영원한 휴식 같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죽음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공포, 그리고 불안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죽음을 공포스러운 것, 불안한 것으로 느낄까? 나아가 우리는 왜 공포를, 불안함을 느껴야 할까?     


‘공포’(恐怖)에서 ‘공(恐)’은 ‘두려운’이라는 뜻이다. 공을 쪼개보면 ‘굳을 공(巩)’과 ‘마음(心)’으로 나뉘는데 이는 ‘마음이 굳어버린 것’을 의미한다. ‘(긴장이나 무서움으로 인해) 얼어붙다’란 말도 굳어버린 마음과 유사한 표현이다.      


어스름한 어느 가을 저녁 날, 혼자 등산을 한 적이 있었다. 낙엽이 한가득 떨어진 산길을 걸을 때마다 들리는 바스락 소리, 그리고 낙엽이 풍기는 향기에 취해 점점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걸어가다 저 멀리에 황금빛 낙엽과는 유달리 구분되는 거무스름한 색의 물체가 있었다. 순간 흠칫한 뒤 몇 발짝 앞으로가 멀찍이서 유심히 보니, 그 물체는 다름아닌 옆으로 돌아 누워있는 멧돼지였다. 순간 내 온몸은 굳어버렸다. 나는 아주 천천히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조심스럽게 움직여 낙엽 밟는 소리를 죽여가며 뒷걸음으로 천천히 꽤나 먼 거리를 이동했다. 그리고 멧돼지가 시야에서 멀어지자마자 재빨리 산을 내려간 적이 있다. 보통 갑작스럽게 놀라게 되는 상황을 마주하면 우리의 움직임은 굳어버리는데 어떤 공포스러운 대상 때문에 몸이 굳어버린 듯한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 바로 ‘공(恐)’이다. 



‘포(怖)’라는 한자 또한 ‘두려운’이라는 뜻이다. 이를 쪼개보면 ‘흩어질 포(布)’와 ‘마음(心)’으로 나뉘는데 이는 ‘마음이 흩어지다’란 의미이다. ‘혼비백산’(魂飛魄散)이란 말이 있다. 혼과 백은 둘 다 ‘넋’(정신)을 뜻하며 혼비백산은 ‘넋이 날아가고 넋이 흩어지다’, 다시 말해 정신이 요동치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머리카락이 쭈뼛하게 선 느낌’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 친구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는데 친구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하는 와중에 갑자기 어떤 개가 갑자기 짖으면서 내게 달려왔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뒤돌아서 신발 한 짝이 벗겨진 것도 모른 채 우리 집 방향으로 뛰어간 적이 있다. 그때의 느낌. 그리고 한밤중에 귀가하는 길에 나무 위에서 펄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올려다보니 하얀색 옷을 입은 여자가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춤을 추는 것을 보았던 (알고 보니 큰 비닐이 나뭇가지에 걸려 바람에 나부꼈던) 그때의 느낌, ‘쭈뼛한’ 감정이 바로 ‘포’를 말한다. 포(怖)와 공(恐)이 합쳐진 ‘공포’는 외면의 몸을 일시적으로 굳혀버리고, 내면의 마음은 요동치며 흩어져 버리게하는 정서를 표현하는 말이다.       


이렇듯, ‘두렵고(恐), 두려운(怖)’이란 의미의 공포는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죽음의 공포에도 종류가 있을까.      


첫 번째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고통에 대한 공포’이다. 고통은 육체적 통증을 말한다. 통증의 종류로는 욱신거리는, 타는 듯한, 쏘는 듯한, 찌르는 듯한 등의 감각이 있고 기간에 따라 급성 통증, 만성 통증이 있다. 또한 통증은 단순히 육신을 자극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우울증, 수면장애, 식욕부진 등 여러 질환까지 수반한다. 통증의 강도는 의학적으로 규정되어 있으며 증상에 따라 마약성 혹은 비마약성 진통제를 처방한다. 죽음이 공포스러운 대상이 되는 이유는 지독한 육체적인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과 관련된 공포의 다른 종류로는 ‘고독에 대한 공포’가 있다. 이는 다시 말해 자기 혼자 죽음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공포이다. 입대, 실연, 이혼, 불합격, 파산 등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겪는 고난들은 사실 각자가 홀로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곁에서 그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으면 그 고통이 덜할 수도 있다.      

군에 입대하면 훈련소에서 먼저 몇 개월을 보내야 하는데 첫날밤이 참 괴롭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모님, 특히 엄마의 슬픈 모습을 보기 싫어서 집에서 인사를 드리고 혼자 훈련소로 갔다. 입대 첫날에는 내무반을 배정받고 훈련복, 전투모, 군화 등을 받고 소지품을 박스에 담아 보낸다.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밥인지 그저 물질인지 모를 저녁밥을 씹어 삼킨다. 밤이 되어 카키색 담요를 덮고 처음 보는 사람들 사이에 누워 눈을 감으니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 방에서 잤는데, 어느새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누워있다. 밤이 되면 마루에서 새어나오는 아버지가 틀어놓은 TV 뉴스 소리, 낡았지만 포근했던 내 방의 침대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입에 맞지 않는 음식과 낯선 잠자리, 계속되는 긴장과 고된 훈련 등 힘든 상황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의 사진이 아니라 다름 아닌 곁에 있는 동기였다. 나 혼자만 힘든 것이 아니라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함께 힘듦을 겪으면서 비슷한 감정의 눈빛, 목소리, 표정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함께 겪는 고난은 한결 가벼웠다.      


그러나 죽음은 다르다. 죽음은 동시에 함께 겪는 것이 아니다. 개개인이 각자 다른 시간들 속에서 혼자만이 겪어야 할 일이다. 사랑하는 엄마, 아빠도 친구도 그 고통을 동시에 함께 공유할 수는 없다. 죽음은 오롯이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 죽음의 경험이 처음이자 마지막 경험이며 한번 가버린 자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그 누구도 죽음이 확실하게 어떤 것이며 그곳으로 들어가면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니 조심하라고 말해줄 수 없다. 이는 마치 칼을 든 살인자가 어딘가에 숨어 언제 급작스레 덮칠지 모르는 어두컴컴한 공간에 ‘홀로’ 걸어가는 듯한 공포를 자아낸다.



다른 죽음과 관련한 공포로는 ‘인간의 존엄성을 잃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다. 말기 환자들의 경우 항암치료가 진행되면 머리카락이 빠지거나 혹은 구토나 혈변 등의 증상으로 인해 육체가 몹시 야위게 된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삼시세끼를 잘 챙겨먹었는데 멀건 흰죽을 삼키기만 해도 모두 토해내 버린다. 몸이 멀쩡할 때는 외출하기 전에 항상 거울을 보며 로션을 바르고 머리도 만지는 등 단장을 하곤 했는데 병세가 악화 된 후 거울을 보니 피골이 상접하고 머리는 거의 다 빠져버린, 내가 아닌 다른 이의 모습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배변활동도 스스로 하지 못해 기저귀를 차고 다른 이가 나의 무거운 몸을 끙끙대며 움직여 배설물을 치워주어야 한다. 유아기를 지나 성장을 해서 스스로 밥을 먹고 배변 활동을 하고 나이가 들면서 직업도 얻고 가족도 꾸리며 어른으로서 살아오며 나름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켜왔지만, 다시 내 몸은 간난 아이로 돌아간 듯 밥도, 화장실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 가족이나 간병인의 손길을 기다리며 나의 치부를 보여주어야 한다. 나의 징그러워진 외모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그저 거울을 보지 않는 것 밖에 없다. 이러한 일들은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함, 자존심을 파괴해 버린다. 만약 나의 육신이 흉물스럽게 변하면 어쩌나. 혼자 거동도 하지 못해 사랑하는 이들에게 내 추한 모습을 보여주면 어쩌나 하는 생각들은 비참함과 끔찍함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공포와 더불어 죽음을 대표하는 다른 이미지로는 불안이 있다. ‘불안(不安)’은 ‘아닐(不)’, ‘편안한(安)’ 즉, 편안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사다리를 타고 높은 곳에 올라가 일을 하려면 사다리 양쪽 다리가 지면에 단단하게 고정되어야 안심하고 작업을 할 수 있는데 마치 한쪽 다리가 떠버려서 사다리가 흔들거리는 채로 올라간 듯한 상태이다.      


사실 공포와 불안은 모두 불쾌하고 두려운 감정이 담겨있는 말로, 이둘을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심리학자 폴 웅(Paul Wong)은 공포는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경우를 말하며 (귀신, 동물 등) 불안은 정확히 어떤 것이 원인인지 명확하게 알수는 없지만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두려운 상태라고 말한다. 공포는 강렬한 느낌이고 불안은 무언가 초조한 상태의 정서인 것 같다. 비유하자면 공포는 내 눈앞에 귀신이 등장해 나를 노려보고 있는 상태이고 불안은 왠지 귀신이 나올 것 같은데 아직 나타나지는 않은 상태랄까. 정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죽음에 대한 불안함의 종류로는 먼저 죽어가는 자신이 ‘가족에게 부담이 될 것이라는 불안’이 있다. 국내에서는 2018년부터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고 있다. 이는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지 않을 수 있도록 법적으로 보장하는 제도이다.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에게는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부착 등의 시술을 하는데 사실상 이러한 행위들은 치료나 회복보다는 단순히 임종 기간만을 연장하는, 말 그대로 부질없이 연명(延命)만 하는 시술이다. 당사자가 정신이 온전할 때 미리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면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 있다.      


사실상 연명의료결정법의 핵심은 돈이다. 연명시술을 하면 길면 몇개월 짧으면 며칠 혹은 극단적인 경우 몇 시간 밖에 더 살지 못한다. 그러나 시술 이후 가계에서 감당해야 하는 금액은 크다. 물론 환자의 가족은 단 하루라도, 단 몇시간만이라도 살아있기를 바라지만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가족에게 부담을 주고 싶어하는 환자는 드물 것이다. 무엇보다 환자는 매순간마다 반복되는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랄 수도 있으며 연명시술로 환자의 의식이 돌아오리라는 보장도 없다. 또한 연명시술은 정신은 혼미한 상태에서 심장만 멎지 않는 경우도 있다. 임종(臨終), 다시 말해 본인이 죽음으로 가고 있는 과정에서 남은 가족들에 대한 걱정은 불안이란 감정으로 환자의 가슴속에 간직되어 있다.  


두번째 불안의 종류로는 사후의 세계가 ‘미지의 영역’이라는 것에 대한 불안이 있다. 죽음 이후에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통을 감내하며 죽음까지 이르렀는데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지. 죽음 이후에는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말 그대로 ‘미지(未知)’, 죽기 전까지 ‘아직’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은 불안감을 일으킨다.     


죽음 이후에는 어떤 세계가 있을까.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 말하듯 천국과 지옥만이 있을까. 불교나 힌두교에서 말하듯 생전에 자기가 지은 업에 따라 좋은 곳에 태어나거나 나쁜 곳에 태어나 삶이 계속 이어질까. 혹은 유교나 일부 서양철학에서 말하듯 죽음은 완전한 소멸이며 사후는 존재하지 않을까.       

환생, 천국, 지옥 등 사후의 문제는 거의 모든 종교에서 다룬다. 생전에 돈을 기부하거나, 독립투사처럼 자신의 목숨을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행위, 혹은 염불이나 묵상과 같은 종교적 수행, 또는 성전에 있는 신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는 행위 등은 사후 극락이나 천국 혹은 유복한 집안에 태어나게 하는 조건이 된다. 반면에 이간질, 도둑질, 성범죄, 살인 등 악행을 저지른 자는 내생에 자신이 한 행위를 똑같이 당하거나 혹은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      



생전에 자신이 했던 나쁜 행위 때문에 사후에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걱정은 죽음에 대한 대표적인 불안일 것이다. 몇 년전 국내에서는 ‘신과 함께’라는 영화가 큰 인기를 끌었다. 영화는 1편과 2편으로 나뉘어 개봉했고 두편 모두 연이어 관람객 천만명 돌파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영화는 화재 현장에서 한 소녀를 구하다 사망한 소방관 자홍이 저승의 심판을 받으러 저승사자들과 동행하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저승사자는 주인공에게 업경(業鏡), 즉 생전에 자신이 지었던 업을 보여주는 거울을 비추며 낱낱이 그의 행위를 밝힌다. 자홍은 살인지옥, 나태지옥, 거짓지옥 등을 통과하며 그가 내생에 어떤 곳에 태어날지 판결을 받는다.     


특히 내 기억에 남는 장면은 나태지옥에 대한 묘사였다. 나태지옥은 생전에 게으른 사람이 사후에 가게 되는 곳이다. 나태지옥은 섬이며 섬 밖으로 빠진 사람들은 인면어가 이들을 뜯어먹는다. 섬 중심부에는 거대한 돌기둥이 있고 이 돌기둥에는 프로펠러 같은 모양으로 3개의 큰 돌기둥이 연결되어 끊임없이 땅을 굴러가며 뱅뱅 돈다. 3개의 돌기둥 사이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이들은 단 몇 초도 쉬지 못하고 계속해서 뛰어야 한다. 뛰지 않으면 돌에 깔려 처참하게 죽고 섬 밖으로 나가면 인면어에게 잡아먹힌다.            

    

내가 게으르기 때문에 나태지옥의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은 것일까. 지금도 부지런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자신은 없지만 나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참 게으르게 살았다. 시험이나 과제는 항상 닥쳐서야 꾸역꾸역했고 방학이 되면 아르바이트를 해서 등록금에 보태거나 혹은 해외에 배낭여행을 간적도, 내새울만한 취미생활을 한적도 없다. 그저 부모님에게 용돈을 받아 친구들과 PC방에 가거나, 술을 마시거나 노래방에 가기 일쑤였다. 게임을 하거나 만화책을 보다 새벽 3시가 다 되어 잤고 점심 즈음 일어났다. 문득 부모님께 죄송한 생각이 들어 공부하려고 학원을 가면 몸만 앉아있다 돌아왔다. 시간을 촘촘히 쓰는 친구들을 보며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란 마음은 오로지 말과 생각 속에서만 되풀이했고 나는 계속해서 같은 잘못을 반복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까지도 가끔 추진하는 일이 잘 안풀릴 때 ‘내가 과거에 게으르게 지냈던 죗값을 받고 있는건가’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건강하고 무탈할 때는 잘 떠오르지 않겠지만 거듭되는 실패의 상황이나 혹은 자신이 중병에 걸려 죽음에 가까워졌을 때는 지난날의 잘못이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그 잘못들은 나를 불안하게 할 것이다. 


지옥은 단순히 극악 범죄를 저지른 자들만이 가는 곳이 아니며 종류가 많다. 타인에게 베풀지 않고 이기적으로 산 사람이 가게 되는 도산지옥(刀山地獄: 칼로 된 끝없는 길을 맨몸으로 걸어 다니는 곳), 누군가를 이간질하고 헐뜯은 사람들이 가게 되는 발설지옥(拔舌地獄: 혀를 뽑아내어 짓이겨 넓게 펼친 다음 소로 쟁기질을 하는 곳) 등 현실에서는 법적으로 처벌 받지 않을 정도로 살았지만 도덕적으로 바르지 않게 산자들 또한 사후에 지옥에 떨어져 벌을 받는다. 이러한 일종의 신화 같은 상징들은 건강할 때에는 신경 쓸 대상이 아니지만 삶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안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왜 죽음을 공포와 불안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는 걸까.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공포와 불안을 왜 느끼는 걸까. 공포와 불안은 나쁘기만 한 것일까.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인간이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생존본능 때문이라 말한다. 일상의 삶에서 위험에 닥쳤을 때 공포와 불안의 감정이 일어나면 이는 자신의 생존을 위한 판단(공격할 것인가, 도망갈 것인가)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공포나 불안이 인간의 감각과 주의력을 예민하게 끌어올림과 동시에 근육에 신호를 보내고 신체의 운동성을 증가시켜 닥칠 상황에 대한 행동을 준비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불안이나 공포는 나의 생존을 위한 레이더이며 이 레이더에 적이 포착되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싸울 것인가 퇴각할 것인가를 판단하게 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나 불안은 바로 나에게 닥친, 혹은 닥칠 위험을 회피할 수 있도록 경고하는 장치인 셈이다. 사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원인은 ‘부주의’ 때문인 경우가 많다. 무단횡단으로 인한 사고, 건설 현장의 낙사 혹은 폭발 사고, 운전 중 스마트 폰 사용으로 인한 사고, 높은 곳이나 물가에서 무모한 행동을 하다 사망하는 사고 등 대부분의 사고들은 부주의에 기인한다. 이에 공포나 불안은 우리의 주의력을 ‘각성’시켜 길을 건너려는데 신호등은 녹색등인지 주위에 차는 오지 않는지, 혹은 현장에서 작업을 시작하기 전 안전수칙은 잘 준수되었는지를 살피게 한다. 


다시 말해 공포와 불안은 단순히 우리를 괴롭히기만 하는 부정적인 것 혹은 인간존재의 결함이 아니라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내면에 내장된 장치이다. 사실 인간을 제외한 타 동물도 생존본능이 있으므로 공포와 불안의 심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가진 공포와 불안의 역할은 생존을 위한 도구에만 한정될까.      



폴 웅은 죽음이 미지의 세계, 사후심판 등의 두려움으로 표출되는 마음의 뒷면에는 생전에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속죄 혹은 구원의 기회를 잡고 싶은 의도가 깔려 있다고 말한다. 살아오며 지은 잘못에 대해 딱히 반성 없이 살아왔는데 자신이 죽음과 가까워지게 되면 사후의 문제에 대한 불안함과 공포심이 일어난다. 불안과 공포의 정서는 죽음이 남의 것이 아닌 나의 것임을 자각시키고, 그동안 살았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삶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했던 일들을 떠올리고 반성한다. 이러한 일련의 심리 과정이 공포와 불안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바로 불안과 공포가 인간의 잘못을 성찰하는 ‘계기’임을 뜻한다. 이에서 보면 불안과 공포의 또 다른 역할은 바로 자신이 했던 행위를 불러일으키는, 즉 ‘환기(喚起)’의 역할이다.       


죽음 곁에 매달려 있는 공포와 불안은 막연한, 습관적인, 안일한, 무감각한 삶의 태도들 사이를 파고들어 비상벨을 울린다.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공포스러운 상황에 짓눌려 옴짝달싹 못하는 사람에게 혹은 넋이 나가 멍하니 있는 사람에게 누군가 뺨을 때려 정신이 바짝들게 하는 역할이 바로 공포와 불안인 것이다.      


죽음의 수하인 공포와 불안은 멍하니 앉아있던 우리의 마음을 때려 환기시킨다. ‘나는 죽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도 죽을 것이다’란 생각들은 공포와 불안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 공포와 불안은 사랑하는 사람들, 살아가는 이유, 나의 꿈, 지난날의 과오에 대한 참회를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게 보면 죽음의 공포와 불안은 마치 동전과도 같다. 앞면은 두려움과 무서움의 형상을 띠고 있지만 뒷면은 생명의 존속과 마음의 전환이란 모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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