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정리하고 가겠다. 가족을 두고 혼자 갈 수 없어 이런 선택을 했다.” 두 아이와 아내를 살해하고서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아버지가 남긴 유서 중 일부다. 한의사였던 A씨는 지난달 13일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한 아파트 15층에서 투신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부인과 5살, 1살짜리 아이들의 목 주위에는 압박 흔적이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A씨가 지난해 개원한 한의원의 운영에 대한 고민, 그리고 대출 문제, 아버지와의 갈등 등으로 심적 부담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내가 아니면 우리 가족도 이 힘든 세상을 살 수 없다’는 그릇된 판단을 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2020.3.1. 서울신문, ‘일가족 동반자살. 엄연한 자녀 살해’>
A씨와 같은 일부 부모들의 극단적 선택은 ‘일가족 동반 자살’이라는 말로 기사화된다. 그러나 이는 동반 자살이 아닌 ‘자녀 살해 후 자살’로 보아야 한다. 아이들은 자살에 동의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특히 영유아들은 자살에 동의할 판단력이 없으며, 만약 청소년기의 자녀가 동반 자살에 동의했다 하더라도 이는 올바른 판단에서 비롯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다. 이와 같은 사건은 부모가 자녀를 하나의 독립된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소유물로 보는, 지극히 잘못된 인식에서 발생한다.
타인을 살해하는 것은 윤리, 도덕적 측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엄격한 법적 처벌 또한 뒤따른다. 그렇다면 스스로의 선택으로 자신을 죽이는 행위는 처벌이 따르지 않으므로 괜찮은 것일까. 온전히 개인만의 선택이자 자유일까.
자살의 사전적 의미는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다. 국내 통계자료에서 자살은 ‘고의적 자해’로 표기되는데 이는 ‘의도를 가지고 (자신의 신체를) 손상을 입히는 행위’를 뜻한다. 따라서 자살에는 ‘의도성’과 ‘살해’가 포함되며, 넓은 의미에서 보면 다른 종류의 살인인 셈이다.
최근 몇 년간 여러 매체에서 OECD 회원국 중 한국의 자살률이 1위라고 공공연히 말해왔지만 사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는 리투아니아가 1위였고 한국은 2위였다. 그러나 최근 OECD 데이터를 살펴보면 유감스럽게도 한국은 인구 10만 명당 24.6명으로, 24.4명의 리투아니아를 제치고 다시 1위를 탈환했다. 3위는 러시아, 4위는 헝가리, 5위는 일본이었다. 더 비관적인 점은 2007년부터 2017년까지 러시아, 헝가리, 일본 등 타 국가의 자살률이 20명대에서 15명대로 진입했지만 한국은 여전히 20명대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2019년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자살예방백서〉에 따르면 10대부터 30대까지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이며 40대부터 50대까지의 사망 원인 2위도 자살이다. 자살의 동기는 ‘정신과적 문제’가 가장 높았고, ‘경제생활 문제’ ‘육체적 질병’ ‘가정문제’ ‘직장문제’ 순이었다. 다만 보건복지부 자료에서는 정신과적 문제의 배경을 밝히고 있지 않다. 정신과적 문제는 쉽게 말해 정신질환을 의미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우울증이 있다. 사실 자살과 우울증은 연관성이 높다. 그렇다면 우울증을 일으키는 원인은 무엇일까.
〈자살예방백서〉에서는 기초생활 수급자가 일반인보다 자살 생각 경험률이 4배 이상 높고 소득수준이 하위권인 경우 상위권보다 자살 생각률이 3배 이상 높았다고 밝히는데, 여기서 그 원인을 추론할 수 있다. 우울증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경제적 이유라는 것이다.
실제로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국내 자살률은 18명대에서 24명대로 급증했으며 특히 45~55세의 연령층에서 자살률이 급격히 증가했다. 그리고 1997년부터 2000년대까지 남성 자살률이 여성보다 높게 나타났다. 이는 경제활동을 주로 책임지던 남성이 IMF 사태로 인한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물론 경제적 이유가 자살의 모든 동기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살을 택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현시대의 행복, 성공의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은 돈이다. 드라마나 영화, 예능에서는 한강을 내려다보며 커피를 마시는 장면, 값비싼 외제차를 몰면서 여유롭게 음악을 듣는 장면, 높은 건물 최상층에서 정장 차림으로 우아하게 업무를 보는 장면 등 부와 관련된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화면 밖 세상은 다르다. 새벽부터 인력시장에 출근해 서성이다가 겨우 일을 하나 받고,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온종일 벽돌을 나르다가 끊어질 듯한 허리를 부여잡고 고시원 쪽방에 들어와 라면을 끓여먹는 사람들. 음식점에서 온종일 테이블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다가 종종 갑질하는 손님에게 걸려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기계처럼 죄송하다고 말하고는 집에 돌아와 고된 몸을 누이는 사람들. 그들에게 TV 속 장면은 사막의 신기루와 같다.
가공된 장면을 보여주는 영상매체뿐 아니라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SNS에서도 추천 수를 올리려고 인테리어를 예쁘게 한 집, 새로 산 명품가방, 고급 리조트 수영장에서 여유를 만끽하는 모습 등을 업로드한다. 거의 모든 대중매체에서 돈을 미화하고 물질 중심사회를 건설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연봉, 거주지, 생활수준에 따라 성공과 행복의 기준이 설정된다. 그리고 자신이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스스로의 삶을 폄하하고 가족을 원망한다. 만약 기준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자기 자신, 혹은 가족의 목숨까지 강제로 종료시켜버리기도 한다. 현시대 자살 문제의 배경에는 부와 물질 중심주의가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물론 단순히 경제적 이유만이 자살의 모든 동기를 설명하는 건 아니다. 자살 연구에 관한 선구자인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은 자살 동기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자살론》에서 자살의 원인을 비사회적 원인과 사회적 원인 두 가지로 구분하며 비사회적 원인에는 정신질환, 유전, 모방이 있고 사회적 원인에는 아노미(anomie) 상태가 있다고 말한다.
정신질환의 예로는 조증(쉽게 흥분하는 상태가 지속되는 증세. 환각, 착란, 비약 등 급격한 감정의 변화를 동반), 우울증(의욕 및 기분이 저하된 상태), 강박증(특정 생각이나 장면에 집착하고 불안해하며 어떤 행위를 수십 차례 반복하는 증세)이 있다. 그리고 유전은 단순히 어떤 자살을 일으키는 DNA 같은 것이 아니라 부모의 성격이나 기질, 성향을 물려받는 측면에서의 유전이다.
모방은 ‘베르테르 효과’로 바꿔 말할 수 있다. ‘베르테르’는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인공 이름으로 그는 약혼자가 있는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고 사랑을 이룰 수 없게 되자 그녀와의 추억이 깃든 옷을 입고 권총 자살을 하게 된다. 소설은 1774년에 발간되었는데 당시 유럽의 많은 젊은이들이 소설 속 베르테르의 모습을 모방해 자살했다. 이에 사회학자 필립스(Philips)는 유명인의 자살이 언론에 보도된 후 일반인의 자살이 증가하는 경향을 발견하고 이를 ‘베르테르 효과’라 이름 붙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 인기 걸그룹 멤버들이 연이어 스스로 삶을 종료시키는 안타까운 선택을 했다. 여러 포털사이트는 이 일을 계기로 연예 뉴스 댓글을 폐지했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들은 댓글을 통해 그들의 삶을 점검하는데 악성 댓글에 장기간 노출되면 자존감이 무너지고 극단적인 경우 자살을 택한다. 자살은 당사자에게도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더 큰 문제는 그들의 선택이 타인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쳐 또 다른 자살이 일어날 잠재력을 키운다는 것이다.
자살에 대한 사회적 원인인 아노미 현상은 경제 위기로 인한 자살률 증가의 원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아노미는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공통가치나 규범의 기준이 무너져 혼돈에 빠진 상태를 의미한다. 만약 경제적 위기가 발생하면 질서가 흔들리고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살률도 증가하게 된다. 인간은 가계 수입, 집값, 자가용, 여가를 누리는 수준 등 가정의 경제적 상태를 기준으로 삼고 정신적 측면에서의 사회적 지위를 중시한다. 그러나 만약 경제 위기 등으로 인해 사회적 지위가 하락하면 의식주와 관련한 욕구를 참아야 하고 또한 자신이 누렸던 것들을 절제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들은 변해버린 상황에 적응하고 자신이 처한 현실을 수긍하기 힘들어한다. 오랫동안 하나하나 쌓아 올려왔는데 모든 것이 무너졌다. 미래는 막막하기만 하다. 그래서 어떠한 노력을 시도해보기도 전에 초라하게 쪼그라들어버린 삶을 지레 포기해버리기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생존본능을 탑재하고 태어난다. 다시 말해 어떠한 경우에서도 살아남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자살은 살고자 하는 강력한 욕구를 인위적으로 파괴해버리는 행위다. 자살을 택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살아가는 것이 죽는 것보다 고통스럽다. 오로지 죽음만이 유일한 탈출구인 것이다.
어느 누가 감히 자살을 택하는 사람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해할 수 없으니 자신의 목숨은 자신이 알아서 하라고 그저 내버려 두어야 하는가. 만약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한다면 ‘절대로 자살은 하지 마세요’라고 말할 만한 어떤 확고한 무엇이 있을까. 솔직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자살의 입구에 서 있는 그들에게 ‘제발 자살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하고 정확한 근거를 들어 설득할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첫 번째로 자살은 가족, 또는 자신과 관련 없는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행위라는 점이다. 동반 자살은 말할 필요도 없고 홀로 자살을 택하는 것도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 넓은 관점에서 보면 생명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뭇 생명이 같은 공간에 함께 얽혀 공존한다. 공연음란죄는 타인에게 직접 행하는 성범죄와는 달리 스스로 노출된 장소에서 음란한 행위를 하는 죄이며 1년 이하의 징역, 500만 원 이하의 벌금, 구금에 처할 수도 있다. 자살 또한 자신이 스스로에게 가한 행위지만 누군가에게 직접 목격되고 매체를 통해 수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내 목숨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외치는 건 지극히 이기적인 발상에서 나온 투정인 셈이다.
두 번째는 자살이 바른 생각과 판단에서 결론 내려진 행위가 아니라는 점이다. 많은 경우 자살은 충동적이다. 충동적이란 말은 어떤 행위가 합리적인 사고 없이 짧은 기간에 갑작스럽게 일어난다는 뜻이다. 자살 전문가 토머스 조이너(Thomas Joiner)는 금문교 자살 투신 생존자들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한 생존자는 “난간에서 뛰어내린 순간, 내게 있던 문제가 해결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라고 했으며 다른 생존자는 “뛰어내리며 처음 떠오른 생각은 ‘방금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였다. 내 몸이 강물 속으로 떨어지고 있는 동안 정말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라고 전했다. 조이너는 자살을 시도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공통점은 ‘후회’였다고 말한다. 삶이 괴롭고, 앞날이 보이지 않아 뛰어내리긴 했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있었고, 또한 자신이 지금 막 시도한 행위가 오랜 시간 깊이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조이너는 “투신한 순간부터 수면에 닿기까지는 4초 정도 걸린다. 그러나 그 4초 동안 그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한다. 인터뷰가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생존했기 때문이다. 돌아오지 못한 수많은 이들이 만약 인터뷰를 한다면 어떤 말을 해주었을까.
자살 결심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상상력에서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빚을 3억 내어 권리금을 주고 가게 인테리어를 하고 장사를 시작했다. 3년간 밤낮없이 일해서 드디어 빚을 거의 다 갚고 이제는 저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 같은 갑작스러운 전염병으로 인해 손님의 발길이 끊긴다. 조금만 버티면 되겠지 하고 다시 빚을 내고 몇 개월간 묵묵히 버틴다. 그러나 5개월, 1년이 지나도 이전처럼 손님이 오지 않는다. 과거에는 빚 3억을 내서 3년간 갚았는데, 1년이 지난 지금 대출받은 금액을 계산해보니 5억이다. 그러면 앞으로 5년을 더 일해야 흑자가 난다. 그러나 그 5년 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인간은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 지나간 과거를, 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을 토대로 미래를 계산한다. 그리고 그려본 미래에 희망이 없으면 더 이상 나아가기 힘들어한다. 꿋꿋이 이겨내고 미래를 향해 다시 시작해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그 과정이 너무나도 힘들고 괴롭고 재미없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되풀이되다 보면 ‘더 이상은 못 하겠다. 이제는 끝났다’라는 결론을 내리기 시작한다.
종종 인생을 등산에 비유하기도 한다. 산 입구에 잠시 서서 저 멀리 보이는 산 정상을 보고 ‘저기에 올라가서 아름다운 풍경을 내려다보자’ 마음먹고는 출발한다. 그러나 중턱은커녕 얼마 올라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지겹고 지친다. 다시 저 멀리 정상을 보면서 성급하게 발걸음을 재촉하지만 땀이 비 오듯 흐른다. 중턱에서 마시려 했던 물은 입구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을 드러내고, 정상에서 맛있게 먹으려 했던 도시락은 중턱도 가지 못한 채 까먹는다. 그리고 다시 정상을 바라보면서 가려는데 너무나 힘들다. 도저히 못 가겠다. 다시 입구로 돌아가버린다.
정상은커녕 중턱도 가지 못하고 포기한 이유는 시선이 오직 정상만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빨리 저곳에 도달해 멋진 풍경을 내려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차근차근 천천히, 내 페이스대로 걸어가면서, 발 앞에 돌부리는 없는지, 부러진 나뭇가지 등은 없는지 확인하면서 등산로 옆에 핀 꽃을 보면서 걸어간다면 어떨까. 바로 옆에서 지저귀는 새소리, 은은하게 흘러가며 소리 내는 시냇물 소리를 들으면서 걸어간다면 어떨까. 차근차근 산을 한참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중턱이고, 어느새 이만치 와서 저만치 아래를 내려다보게 될 것이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성공을 먼저 생각하고, 심지어 성공 후 누리는 삶까지 상상한다. 이는 시선을 정상에 고정하고 뛰어가고 있는 상황과 유사하다. 걸어가는 도중에 만날 새소리, 냇물소리, 꽃은 전혀 생각지 않고 정상에서 내려다볼 풍경만을 상상하는 것과 비슷하다. 남에게 자랑할 만큼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지 못하더라도, 그저 주어진 오늘을 내 방식대로 천천히, 차분하게 살아가다 보면 어느새 저만치까지 도달하지 않을까.
앞서 본 동반 자살을 택했던 A씨는 자영업체 운영, 대출 문제, 아버지와의 갈등 때문에 어린 자식과 부인을 살해하고 자살했다. 번듯한 집도 있고 결혼도 했고 아이들도 있고, 한의원까지 개업한 상황이었음에도, 다른 누군가는 부러워할 만한 형편이었음에도 그는 가족을 죽이고 자살을 택했다. 아마도 사업 운영이 예상했던 것보다 어려웠고 대출은 늘어갔고 그런 힘든 상황 속에서 아버지는 그를 응원하지 않고 원론적인 훈계만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바로, 지금’의 현재에 산 것이 아니라, 계산해도 답이 안 나오는 ‘암담한 미래’를 살고 있었을 것이다.
괴로웠던 과거를 마음속에 되풀이하거나 미래 또한 괴로울 것이라 상상해선 안 된다. 비록 남들은 저 위의 화려한 정상에서 큰 소리로 웃고 있지만 나는 그저 바로 지금의, 내 앞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발만 보며 나의 갈 길을 걸어갈 뿐이다. 힘들면 쉬었다 가고 목이 마르면 잠시 앉아 목을 축이고 차분하게 걸어가면 된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자그마한 둔덕에 앉아 나름대로 걸어온 자취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미소 지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