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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공 Sep 02. 2020

돌아다니는 시체

눈을 뒤덮은 하얀 막 사이로 눈동자가 희미하게 보인다. 피투성이가 된 몸의 군데군데 살갗이 벗겨지고 내장이 드러나 있다. 시선은 정면이 아닌 땅을 향해 있고 팔은 축 늘어뜨렸다. 발을 천천히, 질질 끌며 정처 없이 돌아다닌다. 인기척이 들리자 잠시 움직임을 멈춘다. 순식간에 얼굴을 돌린 뒤 소리가 난 방향으로 뛰어간다. 곧이어 누군가의 비명 소리와 함께 굶주린 짐승이 날고기를 먹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예상했겠지만 위 묘사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좀비의 모습이다. 살아 있는 시체인 좀비는 동서양의 콘텐츠에서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초점 없는 눈동자로 몸을 늘어뜨리고 흐느적대며 걸어 다닌다. 어떠한 판단이나 생각도 없이, 그저 막연히, 목적지 없이 먹잇감이 내는 소리에 따라 움직이기만 한다. 좀비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캐릭터다.      


그러나 어느 날 주변을 둘러보면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좀비처럼 느껴져서 섬뜩해질 때가 있다. 어둠 속에서 모두가 빛나는 스마트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어딘지 모를 목적지를 향해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긴다.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스몸비(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길을 걷는 사람들로, ‘스마트폰smartphone’과 ‘좀비zombie’를 합성하여 부르는 말)와 부딪히려는 걸 가까스로 피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저들은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아무런 의식 없이 매일 일상을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을까?’ …….



생각의 상실과 감염을 상징하는 좀비(zombie)는 부두교(Voodoo) 전설에 나오는 ‘주술로 움직이는 시체’를 뜻한다. 어원적으로는 콩고(Congo)어로 신을 뜻하는 ‘은잠비(Nzambi)’ ‘줌비(Zumbi)’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부두교는 본래 서아프리카 지역의 전통 종교로 토속 정령과 죽은 자의 영혼을 숭배하고 주술을 중시하는 종교다. 특히 부두교는 식민지 시대에 서인도 제도의 아이티(Haiti)로 팔려 온 흑인 노예들에 의해 퍼졌다.      


이들은 부두교의 사제인 ‘보커(bokor)’가 영혼을 뽑아낸 존재를 ‘좀비’라고 불렀다. 좀비는 생각을 잃고, 보커의 명령에만 복종한다. 좀비를 만드는 방법은 사망한 시체가 썩기 전에 무덤에서 파내 부두교의 주술을 행하면서 시체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시체가 관 속에서 일어나면 양손을 묶어 노예로 팔아버렸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노예로 부리기 위해 마약을 사용해서 정신을 마비시켜버린 것이 좀비의 기원이라는 설도 있다. 보커는 누군가에게 사망한 듯 보이게 하는 약을 먹인 뒤 다른 약으로 다시 깨어나게 한다. 그리고 환각에 빠진 사람들을 농장의 노예로 부렸다는 것이다. 아이티는 17세기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국가로 아프리카에서 팔려 온 흑인들의 비참한 역사가 흐르는 곳이다. 당시 흑인 노예의 평균 수명은 21세였고 사탕수수 농사에 이용되다 약 1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 좀비의 기원이 식민지 시대와 노예에 있다는 점은 인간의 탐욕과 잔인성을 드러내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좀비는 주로 B급 영화에서만 다루어졌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영화, 게임, 드라마 등에서 전성기를 맞이하며 주류 문화의 한자리를 차지했다.      


좀비는 1932년 빅터 핼퍼린(Victor Halperin) 감독의 〈화이트 좀비(White Zombie)〉에서 처음 등장한다. 주인공 마들린(Madeleine)이 부두교 주술사의 약을 먹고 죽은 뒤 좀비가 되어버린 사건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영화에서 좀비는 주술에 걸려 생각과 감정 없이 단순히 움직이기만 하는 시체로 연출된다.      


본격적으로 좀비를 공포의 대상으로 표현한 영화는 조지 로메로(George Romero)의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Night Of The Living Dead, 1968년)〉이다. 이 영화는 좀비 캐릭터의 기준을 세웠다고 평가받는다. 영화 속에서 좀비는 머리를 터뜨려야 죽고, 식인을 저지르며, 물리면 인간도 좀비가 된다. 이후 조지 로메로는 〈죽은 자들의 날(Day of the Dead, 1985년〉) 〈랜드 오브 데드(Land Of The Dead, 2005년)〉 〈서바이벌 오브 데드(Survival Of The Dead, 2009년)〉 등을 제작하며 좀비 장르를 개척했다.


좀비의 기본 특징을 세운 조지 로메로 감독의 영화에서 좀비들은 의지나 생각이 없이 그저 본능에 따라 천천히 움직인다. 좀비는 느리지만 뇌를 파괴하지 않는 한 쓰러지지 않고 끝없이 공격한다. 죽이고 죽여도 끝도 없이 몰려드는 좀비들의 무리는 관객에게 공포심을 자아낸다. 쓰나미처럼 몰아치는 좀비 웨이브 앞에서 인간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그런데 좀비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무작정 달려드는 것일까.


감각에만 이끌린 채 오로지 인간의 피와 살로 갈증을 해소하고 굶주림을 면하기만 하는 좀비의 습성은 현대인의 무분별한 소비, 물질과 부 중심주의를 상징한다. 한 예로 〈시체들의 새벽〉(조지 로메로, 1978년)에서 좀비와 인간의 사투가 벌어지는 곳은 대형 쇼핑몰이다. 좀비가 점령한 도시에서 살아남은 몇 명의 사람들은 쇼핑몰로 피신한다. 그리고 좀비들은 계속해서 쇼핑몰로 들어오려고 시도한다. 이때 생존자 중 한 사람이 “우리가 여기 있으니까. 여기로 들어오려는 거야”라 말하자, 다른 사람이 “아니야. 살아 있을 때 쇼핑했던 습관이 이곳으로 저들을 이끄는 거야”라고 대꾸한다. 이 대사는 현대인의 무분별한 소비와 자본주의 행태를 꼬집는다.


감독이 쇼핑몰이라는 공간을 무대로 선택하고 이곳에 무작정 들어오려는 좀비 군중을 연출한 이유는 바로 인간이 이성을 상실하고 자본주의에 먹혀버린 실태를 은유적으로 비판하기 위함이었고, 이 의도가 제대로 먹혀들면서 영화는 작품성과 흥행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그런데 초기 좀비 영화와 최근작에서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 바로 속도다. 초기 영화에서 좀비는 대개 흐느적거리며 천천히 걸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개봉한 〈28일 후〉(대니 보일, 2002년), 〈새벽의 저주(Dawn Of The Dead)〉(잭 스나이더, 2004년), 〈월드워 Z〉(마크 포스터, 2012년) 등 좀비를 주제로 한 많은 영화에서 좀비는 본격적으로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좀비를 공포스럽게 만드는 요소는 떼 지어 몰려다니는 좀비의 수량일 뿐이었는데 이제는 ‘속도’까지 겸비해 공포의 레벨을 올렸다.


게다가 근래부터 거의 모든 좀비 영화는 좀비가 인간을 물면 바이러스로 인해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기본으로 설정하고 있다. 좀비의 ‘확장성’을 첨가해 공포를 리얼리티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감염으로 좀비의 수가 순식간에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은 인구 증가와 난개발로 인한 부작용, 환경오염, 기후변화, 전염병의 창궐에 관한 메타포다.



우리 영화에서도 좀비는 빠지지 않는 소재다. 국내 최초의 좀비 영화는 〈괴시〉(강범구 감독,1981년)다. 〈괴시〉는 3일 전에 죽은 ‘용돌이’란 자가 되살아나 주변 인물들을 살해하는 이야기를 그려낸다. 사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이후 〈부산행〉, 〈창궐〉, 〈#살아 있다〉 등이 개봉하면서 한국형 좀비 영화가 흥행을 이어가고 있으며, 최근 넷플릭스에 진출한 〈킹덤(Kingdom)〉은 비단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뉴욕타임스〉에서는 〈킹덤〉을 시대극의 관습을 깨버린 작품이라 평하며 2019년 최고의 TV 프로그램 10위 안에 포함했다. 또 미국 인기 드라마 〈왕좌의 게임〉을 누르고 미국 내 넷플릭스 순위 9위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킹덤〉은 동양의 사극과 서양의 좀비가 융합된 새로운 형태의 좀비물로 시대적 배경은 임진왜란 후 조선이다. 드라마는 세자 이창이 생사가 불분명한 왕에 대한 진실을 알기 위해 어의를 찾아 나선 여정에서 시작된다. 이창은 동래에 내려갔다가 역병 환자(좀비)를 만나게 되고 어의의 제자인 의녀를 만나 역병이 퍼진 원인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이창이 만난 백성의 삶은 처참했다. 전란 때문에 식량이 바닥난 상황에서 민초들에게는 살아갈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어찌할 수 없이 감염된 인육을 먹었고 이것이 역병이 창궐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사실 식인은 실제로 왜란 때 벌어진 일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어 여자와 아이들은 바깥출입을 못 했다. 굶어 죽은 시체가 쌓이면 사람들이 다투어 살을 떼어먹었으며……”라는 언급이 있다.



〈킹덤〉에서 백성의 굶주림을 가속한 것은 무엇보다 지배층의 가렴주구다. 또한 역병이 창궐한 지역에 많은 백성이 있었음에도 그 지역을 폐쇄해버리거나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사대부의 모습은 인간의 탐욕과 비이성적 일면을 보여준다. 〈킹덤〉의 서사는 우리에게 진정한 인간의 의미를 묻고 있는 듯하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라고 정의하는 요소인가. 동물은 생식을 하고 각자의 일익을 담당하며 생태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드라마와 영화 속 좀비는 생식 능력이 없고 가족도 없다. 쉼 없이 보이는 대로 닥치는 대로 먹기만 한다. 외형은 인간이지만 오직 식육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한 개체일 뿐이다. 현대에서 중시되는 성공과 부 중심주의는 인간성을 상실한 좀비와도 같다. 만족을 모르고 끝없는 욕망만을 발산하는 좀비라는 괴물은 현대인의 실상을 반영하며, 우리의 내면이 투영된 모습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좀비가 상징하는 것은 하얗게 변해버린 눈이나 벗겨진 살갗처럼 단순히 징그러운 외면만은 아닐 것이다. 축 늘어진 몸으로 다리를 질질 끄는 형상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이성, 의지, 감정, 생각 같은 내면적 인간성의 상실이 아닐까.    

  

좀비라는 콘텐츠가 부각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어찌 보면 간단한 답변도 가능하다. 좀비가 지금의 우리 모습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돈과 물질을 중시하게끔 몰아넣은 자본주의라는 외적 상황, 그리고 그 안에서 언뜻 당연해 보이는 목표를 무작정 뒤쫓고 있는 우리들. 탐욕을 소비하는 속도는 회를 거듭할수록 빨라지고 우리의 눈에 어린 광기 또한 그에 맞추어 빛을 발한다. 인간의 모습을 한 우리는 과연 스스로 인간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걸까.      



지금 우리가 일을 하고 공부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돈일까. 꿈의 실현일까. 행복일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어떠한 각성도 없이 막연히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하루하루 삶의 이유와 목적을 되짚고 있을까. 아니면 좀비처럼 목적 없이 반복적으로 배회하고만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말 그대로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상태인 게 아닐까. 우리는 지금 깨어 있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가고 있을까. 그리고 한 번뿐인 죽음의 순간, 인간으로서 눈을 감을 수 있을까.   

   

오늘 날 살아 있는 모든 이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탐욕의 시스템에 속해 있다. 그러나 시스템의 실체는 무엇인가. 시스템은 어딘가에 존재하는 물질이 아니라 바로 하나하나의 인간이다. 나의 삶, 우리의 삶의 변화를 위한 시작이 어딜까. 바로 우리 개인 한 명 한 명의 깨어 있는 마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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