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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수진 Mar 06. 2021

램지어는 어떻게 극우 편이 됐을까

미국학자의 5단계 변신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자발적 매춘부였다'라고 주장하는 미국 하버드 대학 로스쿨 교수 마크 램지어가 우리나라 국민은 물론 평화를 사랑하는 전 세계인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개인 블로그를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핵심 자료로 인용하는 행태는 ‘이 사람 정말, 대학 교수가 맞나?’ 싶은 생각까지 들게 합니다. 학자적 양심마저 의심하게 하는 램지어의 행태 앞에 우리와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일본군 성노예 피해를 입은 국가의 국민들은 분노를 넘어선 좌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램지어는 도대체 왜 이럴까요? 우선, 일본과의 인연이 꽤 깊은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1954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지만, 18살까지 청소년기 대부분을 일본 미야자키 현에서 보냈습니다. 대학에서 일본 역사를 전공했고 하버드 로스쿨을 거쳐 법조계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도쿄대에서 일본법을 공부한 뒤 도쿄대와 와세다대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일본 사람이라고 해서 다 극우는 아니듯 미국인 램지어가 일본 극우 같은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램지어의 선택의 결과입니다. 미국 사람 램지어는 어떻게 하다 이런 주장을 하게 됐을까요. 대부분 언론은 ‘램지어 논문에서 충격적인 내용 찾기’ 중이고 정작 이 부분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는 것 같아서 지인과 함께 일본 웹사이트를 뒤져 봤습니다. 그랬더니 어렴풋이 그림 하나가 그려지는 듯합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램지어 교수가 36살이던 1990년부터 시작됩니다. 램지어의 일본식 발음은 ‘라무자이야(ラムザイヤー)’입니다.           



1단계. 1990.

-일본/극우 새싹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의 긴 터널로 들어서기 시작한 1990년은 일본 극우에는, 반대로 뜻깊은 해입니다. 전국에 조직된 우익 단체가 천 개를 돌파했기 때문입니다. 일본 극우세력은 이미 정설로 굳어진 역사적 사실에 이의를 제기해 부정하고 수정하려는 역사 수정주의를 주장합니다. 국가 권력 아래 온 사회가 오와 열을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군국주의의 부활을 외치면서 동아시아 시민들이 가장 아파했던 시간을 가장 영광스러운 기억으로 추억하며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1990년은 램지어에게도 뜻깊은 해였습니다. 36살의 나이로 일본 최고의 학술상 가운데 하나인 산토리 학예상을 받았습니다. 산토리 학예상은 120년 된 일본의 주류 기업 ‘산토리 홀딩스’가 1979년부터 매년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낸 신진 학자에게 주는 상인데 수상자들이 주요 경력으로 내세울 정도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아쿠타가와 상’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산토리 학예상 홈페이지. 램지어의 저서 <법 경제학-일본 법의 경제적 분석>을 소개하고 있다.


학술상을 안겨준 책의 제목은 <법 경제학-일본 법의 경제적 분석>. 서평은 책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국제 사회에서 수수께끼로 여겨지던 일본인 행동 패턴이 사실은 합리성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은행 거래나 교통사고 처리 등 법∙경제학적 관점에서 분석해냈다."


즉, 일본인의 일반적인 행동 규범 저변에 ‘합리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다양한 이론적 근거를 통해 풀어냈다는 건데 소개글만 보더라도 일본이나 일본 국민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내용이란 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본 극우세력이 보기에 램지어의 책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 그 자체였을 겁니다. 극우 세력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일본 민족의 우월성을 입증하고 우월 의식을 내면화하려는 작업을 벌여왔습니다. 일본의 우월성이 입증돼야만 '덜 우월한' 이웃 나라 한국에 대한 침략이 정당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식민지 수탈의 역사는 근대 발전의 역사가 될 수 있고 일본은 침략국이 아니라 조선의 근대화를 도운 고마운 문명국의 자리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일본이 맏형으로 여기는 미국인 학자가 해냈다니! 램지어에게 고마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또 램지어는 무엇을 느꼈을까요? 일본사와 일본법 전공자가 일본으로부터 인정받은 셈이니 학문적으로는 꽤 큰 성취감을 맛봤을 것 같습니다.   

 

     

2단계. 1995년.

-자민당


1995년 옴진리교에 의한 사린 가스 테러 발생 직후 도쿄 지하철역 주변  


1995년은 일본 국민들에게 ‘아픈 해’입니다. 1월에는 고베에서 대지진이 발생해 6300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3월에는 도쿄 지하철역에서 신흥 사이비 종교인 옴진리교에 의한 사린 가스 테러 사건이 발생해 13명이 죽고 6천 명이 다쳤습니다. 이 두 사건을 통해 급속한 내부 체제 위기를 경험한 일본 사회는 이때부터 급속한 우경화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1995. 램지어는 산토리 학예상 수상 5년 만에 새 책을 출간합니다. 제목은 <정권 정당의 합리적 선택>. 일본 자민당에 대한 얘기입니다. 일본 자민당은 1956년부터 1993년까지 내리 장기 집권을 했는데 이 책은 ‘일본 국민이 오랜 기간 자민당을 선택한 것은 합리적 선택의 결과였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일본인의 합리성을 학문적으로 분석한 전작 <법 경제학-일본 법의 경제적 분석>의 속편인 셈인데, 서평에 따르면 “공공 선택 이론의 입장에서 일본 자민당이 장기 집권한 이유를 잘 분석”했습니다.      


램지어의 책 <정권 정당의 합리적 선택>을 소개하는 홈페이지


자민당의 집권은 1956년부터 시작돼 1993년까지 이어지다 잠시 끊긴 뒤 1995년부터 재개되는데 바로 이 무렵 책이 나왔습니다. 물론 램지어의 책 덕분에 자민당이 재집권에 성공한 것은 아니겠지만 자민당 눈에 램지어는 자민당 장기 집권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해 준 친-자민당 학자로 보이지 않았을까요.

            

 

3단계. 1998.

<일본회의>와 미쓰비시 교수      


일본 극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꼽으라면 1997년일 겁니다. 일본 극우를 좌지우지하는 손, <일본회의>가 이때 결성됐기 때문입니다. <일본회의>는 전후 일본에서 여러 단체로 흩어져 있던 일본 보수 세력이 하나로 규합된 단체로, <일본회의>가 만들어진 다음부터 극우 세력은 전면에 나서 더욱 맹렬하게 평화주의 역사관을 비판하고 제국주의 침략 전쟁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정치, 경제, 사회,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자신들을 세력화하는 일에 본격적으로 나섭니다. <일본회의> 정치 세력화에 성공한 게 바로 2006년부터 들어선 아베 내각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일본회의>가 만들어진 지 1년이 지난 1998년. 미국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에 ‘미쓰비시 교수’라는 자리가 만들어집니다. 1972년 전범기업 미쓰비시가 하버드 대학교에 100만 달러를 기부한 뒤 방문 교수 자리가 생기긴 했지만 공식 직함은 아니었는데 1998년에 ‘미쓰비시 교수’라는 자리가 공식적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램지어가 앉게 됩니다.      


미쓰비시는 군수 물자 납품을 통해 부를 축적한 재벌로, 군국주의의 부활을 주장하는 극우 세력과 같은 피가 흐릅니다. 매년 거액의 정치 후원금을 자민당에 내고 있습니다. 자민당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오른팔로 불리는 ‘이마이 다카야’는 최근 미쓰비시 중공업 고문으로 내정되기도 했습니다. 자민당, 일본회의, 그리고 미쓰비시가 얼마나 가까운지를 잘 보여줍니다.      


램지어 교수를 소개하는 하버드 대 홈페이지. '미쓰비시 일본 법 교수'가 공식 직함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회의>가 결성돼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1년 뒤에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에서‘미쓰비시 교수’라는 공식 자리가 만들어진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요? 미쓰비시 교수 자리는 식민 지배 역사를 정당화하려는 일본 극우 세력이 서방 학문 세계에 구축한 진지(陣地, position)는 아닐까요? 또, 그런 미쓰비시 교수 자리에 램지어가 앉게 된 것은 우연일까요?


램지어는 앞선 두 권의 책을 통해 <일본회의>가 간절히 원하는 것, 즉 일본인의 우월성을 입증해냈고 자민당 장기 집권의 이론적 설명 틀까지 만들어냈습니다. 이보다 더 자격을 갖춘 미쓰비시 교수가 또 있을까요? ‘미쓰비시 교수’에 가려진 진짜 직함은 ‘일본회의 교수’, 램지어에 가려진 진짜 정체성은 '라무자이야' 일지도 모릅니다.    



4단계. 2018.

혐한

       

2018년은 일본 극우에게 불편한 한 해로 기억됐을 겁니다. 한국 대법원이 일본 강점기 강제 노역 피해자와 유족 등 5명의 미쓰비시 중공업 상대 손해배상 소송에서 1인당 1억~1억 5천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식민 역사를 미화하려는 극우 세력과 아베 정권에게 한국 사법부가 브레이크를 걸어버린 셈. 아베 정권은 혐한 정책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대법원 판결 후 열린 강제 징용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의 기자회견 모습



2018년. 라무자이야도 논문을 하나 발표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장합니다.


“후쿠오카에 기반을 둔 야쿠자 조직원 70%는 부락민이나 한국인이다.”    


어처구니없는 내용에 실소가 터져 나오지만 여기서는 특히 ‘부락민’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제도화되기 이전에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차별받는 최하위 계층은 있어왔지만 일본은 유독 그 문화가 심했습니다. 최하층을 한 곳에 몰아넣어 살게 한 뒤 괴롭히고 혐오했는데 ‘부락민’이 바로 그런 불가촉천민, 최하층을 말합니다. 오늘날 일본의 혐한, 혐중, 재일 외국인 차별의 기원이 바로 이 '부락민'에서 왔다는 분석이 많은 점에 미뤄보면 라무자이야가 논문을 통해 급기야 한국에 대한 혐오 감정까지 부추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라무자이야는 아베 정권의 혐한 정책을 자신의 논문에서 학문적으로(?) 실천했던 건 아닐까.


나는 한국이 싫기 때문에 싫다... 역사 수정주의는 아무리 그래도 학문적 근거나마 찾으려고 애쓰지만 혐오는 다 필요 없습니다. 못된 어린이의 마음 같은 감정. 그것 하나면 다 설명됩니다. 2018년. 학자 라무자이야는 산토리 학예상을 수상했던 1990년 이전으로, 어쩌면 미야자키 현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던 ‘라무자이야 쿤’(군)으로 회귀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5단계. 2019년 이후.

일체.    


2018년. 아베 정부는 라무자이야 미쓰비시 교수에게 ‘욱일장(The Order of the Rising Sun, Gold Rays with Neck Ribbon)’훈장을 수여합니다. 세번째로 높은 훈장입니다. 미국 보스턴 일본 총영사관은 라무자이야 하버드 대학교 미쓰비시 교수가 “일본 · 미국 사이의 대일 이해 촉진 및 미국에서의 일본의 법 경제 연구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보스턴 일본 총영사관 홈페이지 보고 오기

                 

2018년 욱일장 수상 모습. 목에 걸린 훈장을 확인할 수 있다.  
욱일장 수상 직후 찍은 단체 기념사진


올해 59세가 된 라무자이야 미쓰비시 교수는 꾸준히 일본을 드나들며 극우 단체들과 교류하고 있습니다. 2019년에는 <모라로지 연구소>를 찾아 강연을 하기도 했는데 이곳은 한국의 군함도(하시마 섬) 강제 징용공 피해가 허구라고 주장하는 전국 규모의 극우 시민단체입니다.      


모라로지 연구소 홈페이지. 라무자이야 미쓰비시 교수의 강연 소식을 전하고 있다.

   

미국 사람 램지어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합니다. 일본 극우에 의해 장기간에 걸쳐 기획되고 관리된, 스스로도 그렇게 만들어 간 '라무자이야 미쓰비시 교주(교수를 뜻하는 일본어)'만 있을 뿐. 처음에는 일본이 좋아 일본사나 일본법을 전공했을지 몰라도 극우로부터 여러 형태의 인정과 보상을 받으면서 스스로 일본 극우의 꼭두각시가 됐습니다. 라무자이야는 위안부 피해자를 매춘부라고 쓴 자신의 논문에 대해 사과하고 반성할 수 있을까요? 일본 극우는 식민 지배 역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에 반성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램지어가 스스로 극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반성하면 됩니다.  


내가 잘못한 일을 깨닫고 고치는 일은 훌륭한 일이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 후쿠자와 유키치-                        


** 글에 나오는 혐한, 부락민 관련 내용은 노윤선 박사가 쓴 <혐한의 계보>를 참고했습니다. 일본회의 관련 내용은 이영채 교수, 한홍구 교수가 쓴 <한일 우익 근대사 완전정복>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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