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면 바나나 한 개
따뜻한 아침 햇살이 이마를 어루만지는 느낌이 들었다. 조용히 잠에서 깼지만 눈을 뜨고 싶지 않은 아침이다. 힘들게 눈을 뜨니 천장이 보인다.
오늘은 조금 일찍 나가봐야 한다.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끄응...하며 힘겹게 몸을 일으켜보지만 고개만 들었을 뿐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내쉬는 숨이 뜨겁고 침은 끈적하다. 머리가 욱신거리고 열이 오른다.
오늘은 챙길 것이 있어 병원에 나가봐야 하지만 천근만근 무거운 몸뚱아리가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엄마 상태는 괜찮은가? 엄마가 기다릴텐데... 우리 엄마...
....
..
.
..
...
잠이 까무룩 들려하는데 엄마와 아빠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많이 아픈가봐?"
이마 위에 엄마의 손바닥이 느껴진다. 시원한 느낌이 좋다.
"그러게... 열이 많이 나는데?"
내 숨소리가 거칠다. 숨이 뜨겁다. 온 몸에 힘이 없고 머리가 아프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베개의 시원한 한기를 느끼려 했지만 머리가 아프고 힘이 없어 고개를 돌릴 수가 없다.
"약은 먹었나?"
아빠가 걱정스럽게 엄마에게 묻는다. 나는 실눈을 뜬다. 엄마는 나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오늘 점심에는 잘 놀았는데 갑자기 이러네? 오늘 밤 잘 자고 나면 좀 낫지 않을까?"
"지금 약국 문 열었나?"
"음... 11시... 지금 문 다 닫았지..."
"이불 잘 덮이고 오늘 밤은 재워보자구."
"오늘도 아침에는 그렇게 까불더니만... 좀 조용히 앉아 있음 좋겠구만. 또 이렇게 앓아 누우니 안 됐네."
"여섯살 사내애가 다 그렇지.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게 어른이지 앤가?"
이내 엄마, 아빠는 불을 끄고 눕는다. 안방에서 엄마 아빠는 나란히 누워 자고 나는 엄마, 아빠 허리 즈음에 베개를 대고 다리는 엄마 아빠와 같은 방향이 아닌 먼 방향으로 하고 잔다. 내 발치에는 방의 미닫이 문이 있다.
나도 이내 자고 싶었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눈물이 흐르고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낸다. 꽤 오랜 시간 뒤척이면서 괴로워한다.
이내 조금 잠이 들었을까. 발치의 미닫이 문이 덜컹덜컹 거린다. 누군가가 쿵쾅쿵쾅 거린다. 눈을 뜨고 싶지만 눈을 뜰 수가 없다.
"이리와!!! 너를 데리러 왔다!!! 어서 오지 못해!!!"
미닫이 문은 젖빛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유리에 바깥에 검은 그림자가 아른 아른 거린다.
쾅쾅쾅!
"자 이제 가자!!!"
나는 무서움에 벌벌벌 떤다. 엄마 아빠를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 없고 일어나려 해도 일어날 수 없다. 엄마 아빠는 세상 모른채 자고 있는 것 같다. 참을 수 없이 무서워 온 몸이 떨리고 땀이 흘러 온 몸이 흠뻑 젖는다. 발치의 문에서는 나를 부르고 같이 가자 한다. 엄마 아빠 곁을 떠나기 싫어. 싫단 말이야!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뜬다. 엄마가 나를 보며 급하게 소리 친다. 다시 눈을 감는다.
눈을 뜬다. 새파랗게 질린 아빠가 나를 안는다. 다시 눈을 감는다.
눈을 뜬다. 모르는 사람이 밝은 빛을 비춘다. 다시 눈을 감는다.
눈을 뜬다. 하얀 천장이 보인다. 우리집은 확실히 아닌데... 다시 눈을 감는다.
눈을 뜬다. 엄마가 나를 일으켜 안고 축축한 무언가를 먹인다. 이내 기침을 해서 먹은 것을 게워내고 만다. 다시 눈을 감는다.
며칠이 지났을까.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우리집 안방이고 아침이었다. 밝은 아침 햇살이 안방을 환히 비추고 창 밖에는 참새가 짹짹 거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더니 엄마가 들어와 웃는다.
"우리 영준이~ 잘 잤나? 보자~ 열은 많이 내렸네."
나는 눈물이 나고 웬지 오래 못 본 엄마 얼굴에 앙~ 하고 운다. 엄마는 좀 더 자라고 이불을 덮어 주며 옆에 같이 누웠다. 엄마가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잠 결에 엄마의 목소리에 슬며시 실눈을 뜬다. 엄마는 전화를 하고 있다.
"어. 영준이... 많이 좋아졌지. 이제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열도 다 내렸고. 어. 빨리 오소. 지금 저녁 8시니까 9시 정도까지 올 수 있겠제?"
엄마는 전화를 끊고 나와 눈이 마주친다.
"아빠 온단다~ 일어날 수 있겠나?"
나는 일어나 앉는다. 엄마가 방 밖으로 나가더니 이내 들어와 100원 동전을 하나 손에 쥐어 준다.
"요 앞 제일 문방구 가서 오락 하고 온나."
와앗! 문방구 오락기!!! 갤러그 한 판에 50원! 100원이면 두 판을 할 수 있다. 일어나 주섬 주섬 옷을 입는다. 엄마는 일어나 옷 입는 걸 보니 다 나았나보네~ 하고 내 엉덩이를 팡팡 친다.
낼름 신발을 신고 우리 아파트 동에서 학교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제일 문방구로 부리나케 빠른 걸음으로 간다. 열심히 졸라야 한 판 할 수 있을까 말까한 오락을 엄마가 알아서 돈 주며 하고 오라고 하다니... 신난다! 신난다!
집 앞 제일 문방구에 들어가자 아줌마는 장난감 등이 진열되어 있는 유리 진열대 뒤에 평상 같은 곳에 늘 앉아 있다. 사람 한 명 없이 썰렁하다. 아줌마가 묻는다.
"영준이 뭐 사러 왔어?"
고개를 도리 도리 흔들며 문방구 한 켠에 놓여진 갤러그 오락기를 가르킨다.
"아, 오락하러 왔어? 이 시간에?"
문방구 아줌마는 끄응하면서 평상에서 일어나 나와 오락기를 스위치를 켠다. 익숙한 뿅뿅 소리와 함께 갤러그가 눈 앞에 환히 드러난다. 갤러그 오락기 소리가 이렇게 컸구나. 나는 이렇게 늦은 밤에 게임을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람이 없으니 적막 속에서 뿅뿅 소리가 크게 난다.
나는 아줌마에게 100원을 내민다. 아줌마는 50원짜리 두 개를 준다. 갤러그는 50원, 문방구 밖에서 쪼그리고 앉아 하는 오락기는 30원이다.
나는 의자에 앉아 50원을 오락기에 넣는다. 동전이 들어감과 동시에 경쾌한 뾰로롱 소리와 함께 오락이 시작됨을 알린다. 오락기 화면 비친 아줌마는 평상에 앉아 내가 오락하는 모습을 쳐다본다. 오락기 소리는 너무 크고 아줌마와 둘이서 있는 어색함에 머리도 어질어질하고 결국, 평소 하는 단계에 반도 다 못 가고 다 죽고 말았다. 총알에 맞아 죽을 때는 아악! 하고 아쉬움의 소리를 지르며 버튼을 쿵쿵 치곤 했는데 이번에는 마지막에 실수로 죽었음에도 그냥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나는 조금 고민하다 일어난다.
"한 판만 하고 가니?"
"네."
"왜? 한 판 더 하고 가지?"
"몸 아파서 못하겠어요."
평소에는 하고 싶어도 못했던 오락을 50원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일어나고 만다. 그리고 터덜 터덜 집에 돌아간다. 엄마에게 50원을 다시 내밀자 왜 한 판만 했어? 라고 묻는다. 나는 그냥 말 없이 고개를 젓는다.
조금 앉아서 TV를 보고 있자 문 밖에서 턱, 턱, 턱, 턱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아빠다!
아니나 다를까 문 앞에서 발걸음 소리가 멈추고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띵동! 부리나케 달려 나간다. 아빠다! 아빠가 나를 안는다. 괜찮았냐고 묻고 얼굴을 부빈다. 갑자기 모를 서러움에 눈물이 나서 앙~ 하고 운다.
"애 때렸어?"
"아픈 애를 왜 때려?"
"근데 왜 울어?"
"몰라~"
아빠는 나를 내려 놓고는 검은 봉지를 내민다. 소매로 대충 눈물을 닦고 검은 봉지를 열어보니 바나나 한 개가 들어 있다. 와! 빠나나다! 빠나나! 빠나나!!! 나는 바나나를 들고 깡충 깡충 뛴다.
작은 손으로 바나나 껍질을 조심스럽게 벗겨 껍찔 안쪽부터 이로 잘근 잘근 먹는다. 그리고나서는 사탕 빨아 먹듯이 흰 속살을 빨아 먹는다. 꿀맛이다. 꿀맛이야!
"빠나나만 먹고 살고 싶다..."
엄마, 아빠는 내가 바나나를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는다. 엄마, 아빠도 한 입 주고 싶은데... 아 바나나 너무 맛있어서 열심히 빨다보니 바나나가 어느샌가 없어져 버리고 껍질만 남아 있었다. 껍질도 아까워 안쪽 부분을 혀로 핥아 본다.
아빠는 흐뭇하게 웃으며 묻는다.
"맛있어?"
"어! 완전 맛있어. 이거 얼마야?"
"어 한 개 천원."
아... 이거 한 개면 새우깡이 열 개 구나... 이 바나나 하나로 새우깡 열 개를 한 번에 다 먹어 치운 셈이구나. 배는 하나도 안 부른데... 입맛을 쩝쩝 다신다. 저 멀리 까만 아프리카 사람들은 하얀 바나나만 먹고 산다는데 너무 좋겠다.
"자 이제 자자."
"또 자?"
"자야지 내일 건강하게 놀지~?"
평소 자는 자리 -엄마 아빠 허리춤에 배게를 두고 다리를 저 멀리 두고- 에 눕자 엄마는 '오늘은 엄마빠랑 같이 잘까?' 하더니 나를 안고 아빠와 엄마 사이에 조심스레 내려 놓는다. 엄마는 자기와 아빠 사이에 나를 눕혔다. 엄마가 나를 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엄마의 포근한 가슴과 익숙한 냄새,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엄마의 다정한 손길에 조용히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