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은 사라지지만 장면은 남는다.

애플은 '컴퓨터'가 아니라 '자유'를 팔았다

by 최종병기

1월 26일 월요일.

주말이 끝났다는 사실을 뇌가 거부하고 있지만, 몸은 이미 지하철에 실려 있는 아침입니다. 손에는 생명수(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이번 주는 좀 덜 힘들겠지" 주문을 외워봅니다.


멍한 머리로 모니터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건 도대체 뭘까?"


우리는 매일 누군가를 설득하며 삽니다. 상사, 클라이언트, 혹은 점심 메뉴를 고르는 동료까지. 답은 의외로 단순할지도 모릅니다.


길게 설명하면 '강요'가 되지만, 짧게 보여주면 '설득'이 됩니다. 40년 전인 1984년 1월 22일, 애플은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는 광고 한 편으로 그걸 증명했죠.




1. 설명서 대신 망치를 든 사람들


1984년 NFL 슈퍼볼 18회 결승전 중계 광고, 애플은 1분짜리 광고를 내보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rwS24cBZPc


조지 오웰의 SF소설 '1984'를 차용한 ‘1984’. 회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무표정하게 앉아 있고, 앞에서는 거대한 얼굴(빅 브라더)이 지루한 웅변을 늘어놓습니다. 숨이 턱 막히는 통제의 세상이죠. 그때 갑자기 한 여성이 등장합니다. 운동선수처럼 달려와 손에 들고 있던 해머를 스크린을 향해 힘껏 던집니다.


쾅!


스크린이 산산조각 나고, 빛이 쏟아집니다. 그리고 자막.


망치를 던지고, 무슨 광고지? 하는 순간 명치를 빡! 끝!
"1월 24일, 애플 컴퓨터가 매킨토시를 내놓습니다.
1984년이 왜 소설 '1984'와 다른지 보게 될 것입니다."


끝.

설명은 없습니다. CPU가 몇이고, 램이 얼마인지, 가격이 합리적인지 따위는 적혀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광고를 보고 본능적으로 느낍니다.


"와… 저거 뭐지? 뭔가 혁신이 일어날 것 같은데?"


애플이 판 건 '컴퓨터'가 아니라 '자유' 와 '해방'이었습니다. "매킨토시를 사용하면 너는 이러저러하게 효율적으로 너의 일을 처리할 수 있어." 이 메시지를 구구절절 설명한다면 이내 잊혀졌겠지만 애플은 상징적 '장면'을 직관적으로 보여줬습니다. 직관은 논리를 건너뛰고, 심장에 먼저 꽂히니까요.




2. 그림판으로 만든 구인광고


직관의 힘은 때론 '세련됨'이 아니라 '솔직함'에서 나옵니다. 여기, 제가 보고 신박하다고 생각했던 해외의 구인 광고가 있습니다.



대형 전광판에 개발새발 적힌 글씨.

"WE ARE LOOKING FOR GRAPHIC DESIGNER (그래픽 디자이너 구함)"


OMG, MS 그림판입니다. 펜 툴로 마우스로 대충 끄적거린 듯한 저 처참한 퀄리티.

이건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 회사는 디자인 역량이 매우 부족하며, 귀하의 뛰어난 재능이 시급히 필요합니다..." 이런 구구절절한 채용 공고보다 훨씬 더 강력합니다.


그냥 한 컷으로 외치고 있거든요. "살려줘... 우리 회사 디자인 수준이 지금 이래."

이런 솔직함과 유머, "내가 가서 저 참사를 수습해 줘야겠다"는 사명감까지는 아니더라도 도대체 어떤 회사인지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은 확실히 들지 않나요?




3. 당신에게 에베레스트는 어디입니까?


유머만 직관적인 게 아닙니다. 고통도 직관적일 때 더 크게 다가옵니다.

여기, 광고천재 이제석의 그 유명한 계단 광고가 있습니다.



지하철 계단에 가파른 설산을 그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적혀있는 한 문장.

"For some, It's Mt. Everest. (누군가에게는 이 계단이 에베레스트산입니다.)

Help build more handicap facilities. (불편한 이들에게 시설 지원을.)"


https://www.youtube.com/watch?v=yOtv3-0OoPc


16분이나 되는 인터뷰 동영상을 보기에 여러분의 시간은 소중하니까, 요약을 하면 이제석 디자이너는 이렇게 말합니다.


"광고는 포장을 씌우는 게 아니라, 포장을 벗겨내고 본질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그의 말처럼 이 광고에는 화려한 그래픽도, 구구절절한 호소문도 없습니다.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한 '예산 통계'나 '법안 발의 보고서'는 우리의 머리를 아프게 할 뿐입니다. 하지만 저 계단 그림 하나는 보는 순간 숨을 턱 막히게 합니다. 거동이 불편한 분들에게 저 계단이 얼마나 험난한 도전인지, '설명'하지 않고 '체감'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문제를 해결의 본질이 아닐까요?




4. 보고 싶은 건 '제품'이 아니라 '욕망'

마지막으로 비만 치료제로 화제가 되었던 '위고비'의 광고입니다.


보통 다이어트 광고라면 날씬한 모델이 해변을 뛰거나, 어두운 배경과 우울한 표정의 before 사진과 헐렁해진 바지를 입고 웃는 after 사진을 대비하여 보여주는 것이 일반적이죠. 하지만 이 광고는 다릅니다. 식욕 억제제로서 뱃살만 빠질리가 없는 이 '비만 치료제'의 광고는 주사를 놓고 있는 '뱃살'을 정면으로 클로즈업합니다.


말로는 "건강을 위해", "체질 개선을 위해"라고 포장하지만 사실 우리가 다이어트를 결심할 때 거울 속에서 가장 먼저 보는 곳, 가장 없애고 싶은 곳, 바로 그 '욕망의 부위'를 배에 꽂힌 주사기처럼 직관적으로 찌릅니다.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아. 바로 이거잖아."





'직관적', '단순함' 이라는 것은 “정보를 줄이는 기술”이 아니라, "본질만 남기는 편집"입니다.


우리는 흔히 설득을,

언변이 좋아 화려한 수사로 포장하며 속사포처럼 거침 없이 ‘말을 잘하는 것’이라고 오해하지만, 실제로는 언변이 아니라 '상대가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일터에서 동료와의 업무도, 가정에서 가족간 대화도, 사랑하는 이와의 연애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사람은 '논리'에 고개는 끄덕이지만, 결국 '장면'과 '감정'으로 마음을 엽니다.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애플의 망치와 저 엉망진창인 그림판 디자이너 구인 광고처럼 확실하고 솔직한 한 방을 보여주는 게 가장 빠른 길일지도.


자, 이제 우리도 망치 하나씩 들고 대화를 시작해 볼까요? (물론 진짜 망치는 안 됩니다. 마음속으로만요.)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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