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혜인 Dec 07. 2021

네가 가장 견디기 힘든게 뭐야?

그 말을 내 입으로 직접 꺼내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터키에서 집은 계약했지만 슬프게도 우리는 그곳에서 곧바로 살 순 없었다. 지금까지도 고되다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우선 우리는 끊어진 전기, 수도, 가스를 연결해야 했다. 그리고 당장 먹고 자고 씻을 준비가 아무것도 되어있지 않았다. 집은 그냥 바람을 막아주는 것 외엔 아무런 기능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집이 생겼음에도 에어비앤비에서의 생활을 연장할 수밖에 없었다.

  터키에는 3개월 이상 머무르려면 이카멧(거주증)이 있어야 한다. 보통 거주비자는 한국에서 해당 대사관에서 받아오기 마련인데 여기는 이 나라에서 직접 발급받아야 한다. 그래서 터키어와 이곳 지리를 잘 모르는 외국인은 정말 멘붕이다. 우리도 아직 서류상 공식적인 거주민이 아니기 때문에 골치가 많이 아팠다. 현재 우리 신분은 말은 팔자 좋은 관광객인데 관광은 꿈도 못 꾸고 되려 관광객이라서 일은 계속 풀리지 않았다. 일단 이카멧이 없어서 우리의 이름으로 전기, 수도, 가스를 연결할 수 없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 나라는 집이 있어야 거주증을 신청할 수 있는데 거주증이 없으면 또 관공서 업무를 볼 수가 없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우리가 집을 먼저 구하는 바람에 순서가 살짝 꼬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터키 정책을 원망하며 또다시 쩔쩔매야 했다. 결국 이번에도 미안하지만 M양과 함께 그녀의 이름을 빌려 업무를 봐야 했다. 빨리 우리가 정착을 해야 신랑이 정상출근도 하고 업무에 지장이 없을 테니 일단 모든 명의는 M양의 이름으로 하고 추후에 거주증이 나오면 우리의 이름으로 바꾸기로 했다. 어차피 번역기는 한계가 있고 우리의 걸림돌인 언어때문이라도 누군가의 도움은 절실했다. 그런데 나는 내가 워낙에 눈치를 보는 성격이어서 그런 건지 터키에 온 뒤로 잔뜩 예민해져 있어서인지 미묘하게 변화된 M양의 태도로부터 불편함과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처음엔 우리와의 동행이 신나는 외출처럼 반기고 적극적으로 대해주었는데 이제는 우리가 그녀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아서인지 항상 약속을 해놓고도 몇 시간씩 기다리게 했고 마치 귀찮은 업무의 하나처럼 우리를 다른 직원에게 떠넘기기도 했다. 물론 그녀만의 스케줄이 있기도 했겠지만 나는 M양이 우리의 관계를 갑과 을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 위에 도움을 주는 사람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 은근히 불쾌했다. 나만의 착각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갈수록 우리에 대한 태도가 대충대충으로 바뀌더니 그녀가 챙겨준 문서가 제출할 때 보면 자주 누락되곤 했다. 그래서 똑같은 관공서를 4번이나 방문한 적이 있다. 그녀는 이것이 자기의 일이라고 말했지만 확실히 자신의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급기야 더 이상 M양을 믿지 못하고 안일했던 나를 반성하며 스스로 방법들을 찾아 신랑에게 읊어주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신랑은 "그럴 필요 없어. M이 다 알아서 해줄 거야"라고 말했다. 이제 더 이상 누구의 도움도 받고 싶지가 않은데 나도 스스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신랑은 그냥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다르게는 그저 M양을 의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정작 의지하고 싶은 건 신랑인데 신랑은 다른 사람을 의지하고 있다고 느끼니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비록 초록창이 알려준거긴 하지만 나의 의견보단 M양의 말에 더 신뢰하는 신랑 때문에 나는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터키에 와서는 챙기라는 거 챙기고 가라는데 가고 사인하라는데 사인만 하는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당시에는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서 계속 답답해하고 짜증만 나곤 했다.

 한 번은 세금 번호를 받으러 가는 날이었는데 이 날은 신랑이 호기롭게 단 둘이 다녀오자는 것이다. 나는 이제 드디어 신랑이 듬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세무서에 가자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그곳에 줄 서있는 사람들이 모두 여권사본을 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챙긴 것은 실물 여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본이 있어야 한다고 돌려보낸다. 관공서엔 보통 프린터 하나쯤은 다 있을 텐데 치사하게 하나 복사해주지 굳이 나가서 프린트를 해오란다. 그것도 친절하게 근처 호텔에 가면 할 수 있으니 다녀오란다. 나는 또 한 번 신랑을 믿고 방심한 나에게 실망하고, 신랑은 M양이 알려준 데로 챙겨 온 거라 잘못 없다고 발뺌하니 그 모습 또한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내 인내심은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세무서 직원이 알려준 호텔에 가서 프린트만 부탁하기 미안하니 커피를 한잔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나는 신랑에게 참았던 폭언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도대체 M은 일처리를 왜 이따구로 하냐고 회사가 도와줄 거면 제대로 도와주거나 아니면 차라리 알아서 하라고 의지를 하게 하지를 말던가. 그리고 너는 내가 하는 말은 듣지도 믿지도 않고 그렇다고 의지가 되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혼자였으면 이렇게까지 힘들지 않았을 것 같다며, 우리가 같이 무언가 해내는 성취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끌려다니듯 다니는데 되는 것도 하나도 없고, 나는 이곳에서 너와의 생활이 자신 없으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 한국에 보내달라고 말했다. 쏘아선 안될 화살들을 마구 쏘아댔다. 그런데도 신랑은 다른 말들은 다 무시하고 내 마지막 말만 귀에 꽂혔는지 "한국에 간다는 게 무슨 의미야? 네가 그렇게 너무 힘들면 다 그만두고 같이 들어가자"라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또 나쁜 마누라가 되었다. 신랑한테 화가 나는데 미안하면서 고맙고 근데 또 미워 죽겠는 복합적인 감정들이 마구 솟구쳤다.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자꾸 서러워서 눈에는 벌써 눈물이 한아름 고이고 턱과 입술이 마구 떨리기 시작했다. 겨우 먼산 바라보기를 하며 눈물을 참고 있었는데 신랑이 내게 "혜인아, 네가 여기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게 뭐야?"라고 물었다. 나는 몇 번이나 입이 차마 안 떨어져서 앞절의 "내가...", 울먹, "내가..." 울먹 을 반복하다가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여기서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거야"라고 말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내 입으로 그 말을 뱉는 순간마저도 너무 자존심이 상하고 그 사실을 인정해 버리는 것 같아서 견디기 힘들게 슬펐다. 그리고 그때 알았다. 사실 내가 정말 견디기 힘든 건 신랑 때문도 아니고, M양 때문도 아니고, 낯선 나라에서 겪는 고생스러움 때문도 아니었다. 그건 다름 아닌 한없이 낮아진 나의 자존감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사람이 많은 어느 호텔 안에서 신랑을 마주하고 한참을 엉엉 울었다.

 신랑은 내게 딱 일주일만 버텨달라고 했다. 그럼 이 모든 과정이 끝나고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고 했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없는 건 당연한 거라고, 언어는 배우면 되고 거주증도 나오면 할 수 있는 게 많아질 거라고, 나는 내가 벙어리처럼 말도 못 하고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그래서 무시당하는 것 같고 쓸모없는 사람인 것 같아 슬펐지만 적어도 신랑에게는 내가 필요하지 않나. 잊고 있었다. 신랑의 다독임에 다시 한번 그를 믿고 조금 더 버텨보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홧김에 한국에 안 간걸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말은 안 했겠지만 신랑도 무너지는 나를 보면서 분명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이제는 신랑으로부터 회복한 자존감으로 내가 그를 다독여 줄 차례인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나를 위로해준 집주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