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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혜인 Dec 15. 2021

나는 원시인이다

그리고 진화 중이다.

 터키에서의 나는 원시인이다. 내가 어릴 적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다양한 몸동작과 함께 "우우우!", "오오오"라고 말하던 원시인들은 요즘 나의 모습과 흡사하다. 언어가 사회적 활동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나는 몸소 느끼고 있다. 주부로 산다고 터키어를 모른 채 살 순 없다. 주부여서 신랑보다 더 많이 현지어가 필요하다. 장을 봐야 하고 계산을 해야하고 더 자주 이웃을 마주하기에 삶과 생존에 필요하다. 이제 어느 정도 서류를 내고 등록하는 과정은 모두 마쳤다. 그동안 매트리스 하나와 신랑만을 의지하며 잠을 자고 밥도 식기류가 하나 없단 핑계로 줄곧 사 먹기만 했다. 이제 거지되는 지름길은 그만두고 주방부터 꾸리기로 한다. 신랑은 출근을 해야 하니 집을 지키고 가꾸는 건 나의 몫이 되었다. 웬만한 가구와 부피가 큰 물건들은 주로 온라인숍에서 주문을 했다. 그리고 낮에는 동네 마트로 향한다. 나의 첫 마트는 얼마나 설레고 긴장감이 넘치던지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의 심부름을 받고 슈퍼로 향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다행히 대부분의 필요한 채소, 과일은 실물만 보고도 충분히 바구니에 담을 수 있었다. 잊지 않고 가격과 명칭이 적힌 라벨로부터 터키어 공부도 하고 온다. 마트는 오감으로 배울 수 있는 나의 거대한 터키 사전과 같다. 육안으로 구분이 어려운 소금, 설탕, 소스류등의 부재료들은 번역기를 통해 확인하고 구매한다. 처음 해외에서 장보기란 인내와 탐구의 정신이 필요하다. 한참을 한자리에 서서 사전을 검색해야 할 때도 있고, 아무래도 한국과 식료품 구성 자체가 다르니 없는 것을 비슷한 것으로 대체하거나 빠른 포기도 필요하다. 내겐 올리고당과 액젓이 그러했다. 장보기는 그야말로 미션이다. 미션을 클리어할 때도 있고 원하는 걸 찾지 못해 그냥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확실한 건 필요한 것을 하나씩 갖추는 재미 플러스 성취감과 뿌듯함이 있다.

 

 다행히 마트를 가는 것은 꽤나 친절한 미션이다. 모든 상품에는 라벨링이 되어있어 번역기를 통해 퍼즐 맞추기를 할 수 있고 코너별로 직원이 있으니 도움을 청하기도 쉽다. 문제는 택배다. 터키는 한국의 아파트나 빌라처럼 경비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집 앞에 우체통이나 택배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문들은 모두 전자도어록이 아닌 열쇠로 열어야 한다. 한국처럼 배송 메시지에 현관 비밀번호를 메모해서 부재 시를 대비할 수가 없다. 결국 택배는 집에 사람이 없으면 배달될 수 없고 다르게 말하면 누군가는 택배를 받기 위해 집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한국처럼 정확히 몇 시쯤 도착한다는 메시지가 아닌 그저 '오늘 도착할 예정이다'라고만 말하기 때문에 아주 애가 탄다. 주문한 물건들은 한날한시에 오지 않고 제각각 다른 시간에 도착한다. 오늘온다고 하고 안오는 경우도 있다. 이것 때문에 나는 몇 주간 집에서 꼼짝없이 택배를 기다려야만 했다. 근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택배 아저씨들이 택배가 출발할 때나 도착해서 현관문을 열기 위해 내게 전화를 건다는 것이다. 나는 당시 원시인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갑자기 휴대폰에 전화벨이 울리면 화들짝 놀라고 전화받기가 두렵다. 가장 큰 이유는 전화는 바디랭귀지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말 큰일이다. 전화를 받고 택배이겠거니 싶으면 다급히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길가에 택배 상자를 든 배달원이 있으면 Merhaba!(안녕하세요) 하고 손을 흔들어 보인다. 그러면 성공이다! 그런데 문제는 전화를 받았는데 건물 앞에 배달원이 없을 때다. 이 경우는 보통 출발 전에 확인 전화를 하는 것이거나 집을 못 찾는 경우다. 느낌상 집에 있냐는 것 같으면 무작정 아는 단어 조합해서 Ben ev var(나 집 있다)라고 말해본다. '나는 집에 있다'와 조사들이 빠진 '나 집 있다'는 차원이 다른 의미인데 그 말을 용케 알아들은 택배기사는 감사하게도 잠시 뒤 배송을 와주신다. 여기까진 괜찮았다. 최악은 배달기사가 집을 못 찾아서 물어볼 때다. 그땐 그냥 소통불가다. 나는 자동 원시인이 되어 수화기 너머로 "어.... 으.... 아.... 음.... " 만 반복하다 상대방을 깔깔 웃게 만들거나 환장하게 만든다. 그중 내가 가장 환장하게 만들었던 배달원은 우리의 거실 카펫을 강제 반품시켜버렸다. 배달원의 대처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덕분에 나는 이 계기로 터키어를 배워야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터키에 오니 가만히 앉아서 택배 받는 일도 쉽지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지어를 모르면 바보가 된다. 이건 세계 어느 나라에 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의 조상 유인원들도 진화를 거치지 않았나. 다행히 나도 진화한다. 빠른 진화를 위해선 많은 경험과 공부가 필요하다. 그래서 많이 돌아가더라도 자주 부딪히기로 한다. 신랑은 혼자 하기 힘들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집 근처에 사는 한국말 잘하는 친구에게 부탁하라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혼자의 힘으로 모든 걸 해보기로 한다. 택배 문제가 끝나니 나에게 새로운 미션이 등장했다. '조명에 달 전구와 , 가구를 조립할 전동드릴 그리고 거실 창문 사이즈에 맞는 커튼을 제작' 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나는 홀로 조명가게를 찾아 동네를 다 뒤졌다. 나중에야 안 사실인데 우리 집에서 정말 가까운 곳에서도 전구를 살 수 있었다. 단지 그 반대방향으로 가는 바람에 아주 멀리서 전구를 사버린 것이다. 그래도 화가 나거나 허탈하지 않았다. 그렇게 사방팔방 돌아다녀보니 꽤나 빨리 머릿속에 동네 지도를 그릴 수 있었고 한낮의 터키 사람들의 일상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온 김에 전동드릴도 사기로 한다. 드릴도 어디서 사야 할지 몰라서 돌아오는 길에 철물점처럼 생긴 가게마다 다 들어가 물어보았다. 처음엔 드릴이라고 하니 없다는 건지 모른다는 건지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드릴이 전 세계에서 다 쓰는 줄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찾아보니 터키어로 elektrikli matkap이라고 따로 있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한국에서 자주 쓰던 외래어들도 터키어 사전을 찾아보게 되었다. 순우리말도 아니고 너무 익숙히 표현하고 당연시 여겼던 영어 표현에 뒤통수를 맞았기 때문이다. 케이크(Pasta)가 그러했고 커피(Kahve)가 그랬다. 그러고 보면 한국은 참 외래어와 콩글리시가 생활 속에 잘 흡수되어 있다. 아무튼 그 이후, 새로 알게 된 전동드릴 단어를 어설프게나마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슬프게도 사장님들은 대부분 못 알아들으셨다. 그럴 땐 갑자기 스피드 퀴즈 시간이 되어 벽에다 손가락을 갖다 대고 드릴 소리를 내는 나를 발견한다. 원시인의 삶이란 그렇다. 말보다 몸짓이 더 편하다. 그러면 또 사장님은 벽을 뚫을 거냐 나무를 뚫을 거냐며 벽에 한번 나무를 향해 한번 맞춤형으로 같은 흉내를 내주신다. 그리고 같이 "깔깔깔!". 재미있다. 웃음소리에 긴장이 풀려 나는 나도 모르게 한국말을 내뱉는다. "나무요. 나무~ 가구 조립할 거예요." 하고 나무 책상을 가리킨다. 그렇게 해서 전동 드릴을 사 왔다. 전동드릴 하나 사면서 깨달은 게 많았다. 그동안 우리가 쓰는 영어 표현이 이곳에서도 당연히 쓰일 거라는 착각이 깨졌고, 어차피 영어나 한국말이나 소통은 똑같이 불가능한데 나는 그동안 왜 애써 혀를 굴려 영어를 쓰려했는지, 대체 왜 모국어인 한국말을 외면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 계기로 좀 더 과감하게 영어를 버리고 터키어를 흡수하게 되었다.

 나의 쇼핑 중에 가장 고난도는 커튼이었다. 우리 집 창문에 딱 맞는 사이즈로 구매를 해야 해서 길이를 재고 미리 그림까지 그려 메모를 해왔는데 예상치 못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한 겹으로 할 거냐 두 겹으로 할 거냐, 비치게 할 거냐, 어둡게 할 거냐, 주름이 지게 할 거냐, 펴지게 할 거냐, 언제까지 필요하냐 등등 질문이 쏟아졌다. 머리가 하얘졌었고 여전히 아주머니의 질문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냥 뉘앙스로 추측할 뿐이다. 커튼이란 녀석을 몸짓으로 표현할 수가 없기에 나는 또 '음... 아... 어... " 원시인 모드로 가서 어색하게 눈웃음만 치고 서있었다. 그러니 아주머니가 손으로 천에 주름을 자글자글 잡아서 보여주었다. 나는 그걸 원한다며 격하게 "Evet(네)"만 반복하고 원하지 않는 원단을 보여주면 당시엔 Hayır(아니요)를 대답할 줄 몰라서 고개만 수차례 도리도리 했다. 다행히 커튼은 나의 요구사항을 찰떡같이 알아주셔서 아주 예쁘게 잘 나왔다. 당시 상황을 다시 머릿속에 그려보면 엄청 창피하고 답답하고말 못 하는 멍청이 같아서 우울해질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냥 내가 '진화 중인 원시인'쯤으로 생각하니 눈치라도 늘은 게 어딘가 싶어 나름 삶이 재미나다. 해외에서 현지어를 하나도 몰라 고충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말해주고 싶다. 너무 우울해하지 말고 쿨하게 자신을 원시인이라 생각했으면 좋겠다. 분명히 경험이 쌓이고 언어가 늘며 진화할 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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