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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혜인 Dec 22. 2021

생일에는 역시 여행이지

터키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생일

  터키에서의 생활이 조금씩 안정화되고 있었다. '이제 좀 살 것 같다'며 가뿐 숨을 몰아 쉬고 나니 내 생일이었다. 30대가 된 후론 나이 한 살 더 먹는 게 그다지 기쁘지만은 않아서 사실 그리 큰 감흥도 호들갑도 없었다. 신랑도 이번 생일은 미처 준비하지 못한 모양인지 꽤나 난감해했다. 워낙 섬세한 스타일이 아닌 사람이라 생일 이 다가오면 "아~ 목이 허전하다 작고 반짝이는 거 하나 있었으면 좋겠네"와 같이 갖고 싶은걸 대놓고 힌트라고 알려줬어야 했는데 이번에는 그러질 못했다. 그동안 우리 모두 생일보다 챙겨야 할게 더 많은 날들이었기에 이해한다. 대신 신랑이 오늘만큼은 만사 다 제쳐두고 내가 하고 싶은걸 함께 해주기로 한다. 그야말로 나의 날이 되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설레기 시작한다.


  그동안 각종 관공서와 생활용품을 사기 위해 집 근처 쇼핑몰 정도나 돌아다녀봤지 제대로 된 터키를 느껴본 적이 없다. 그리고 후발대로 온 한국 직원이 집을 구할 때까지 우리 집에서 합숙하는 바람에 나는 신랑과의 둘만의 시간을 가져보질 못했다. 그래서 오늘은 단둘이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신랑도 역마살 낀 마누라가 원하는 게 여행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스탄불에 오면 모두가 가본다는 탁심 시내를 가보기로 한다. 우리 집에서 탁심까지는 지하철로 30분 거리라서 거리만 보면 여행보단 나들이에 가깝지만 어차피 나에게 여행은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이기에 상관없었다. 드디어 터키에 온 지 3주 만에 여행객이 된다. 

 

  우리 부부는 생일을 맞이하거나 결혼기념일이 되면 여행을 떠나곤 했다. 주로 여행을 좋아하는 내가 계획한 이벤트였다. 친구들을 잔뜩 초대하고 맛있는 음식과 함께 시끌벅적하게 보내는 파티랄 것이 없다. 사실 술잔을 부딪히기 좋아하는 신랑의 생일에는 파티를 한다. 그러나 나의 생일과 우리의 결혼기념일은 공식적인 여행하는 날이다. 나는 요란스럽고 시끄러운걸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특별한 날을 핑계 삼아 내게 가장 편한 사람과 잔잔한 여행을 하는 편이다. 내게 가장 편한 사람은 당연 나의 단짝 신랑이다. '편하다'는 단어는 그냥 들으면 그리 매력적으로 들리지 않지만  내게는 가장 최상의 관계에서만 쓰일 수 있는 말이다. 눈치를 보거나 가식을 떨거나 체면을 신경 쓸 필요와 이유도 없고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관계에서만 쓰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 특별한 사람과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기분과 경험들을 나누는 게 내겐 가장 근사한 생일선물이다. 어떤 생일선물을 받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작년 생일엔 어디를 갔고 무엇을 먹었고 함께한 사람과 어떤 마음을 주고받았는지 등에 대한 추억 파티를 할 수 있는 게 더욱 값지다. 그래서 터키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생일에도 우린 여행을 떠난다. 


 나의 날, 그동안 쌓아둔 근심과 걱정을 뒤로하고 유럽과 아시아가 융합된 이색적이고 독특한 터키를 만나볼 생각에 신랑의 손을 잡고 가는 발걸음이 계속 통통 튀었다. 신이 나서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통통 거릴 때는 근심과 걱정들이 먼지 털리듯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여행을 가는 길 자체가 설렘과 더불어 마음이 가벼워지는 시간이었다. 집을 구해야 하고, 서류를 내야 하고, 무언가 등록하고 신청해야만 하는 의무들에게서 벗어나서 순수하게 터키를 마주할 생각에 그저 신났다. 고생 끝에 낙이 오고, 쓴 것이 다하면 단것이 오는 고진감래와 같은 뻔한 말들처럼 그간 고생한 만큼 오늘 하루를 달콤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동안 터키엔 줄곧 비만 내리고 흐리더니 어쩐 일인지 내 생일만큼은 날씨가 맑고 쾌청했다. 하늘도 진정 나의 날을 만들어주나 보다 싶었다. 신랑도 터키에 와서 이렇게 좋은 날씨는 처음인 것 같다며 덩달아 신나 했다. 덕분에 햇살 아래 기분 좋게 도시를 거닐 수 있었다. 그동안 어둠에 가려져 몰랐던 터키의 풍경은 너무 아름답고 부족함이 없었다. 우리는 소소하게 탁심의 거리를 걷다가 길거리 음식들을 먹어보고 노천카페에서 커피도 마셨다. 생일이라고 거창하고 특별할 건 없었다. 이미 터키라는 장소와 손을 마주 잡고 있는 신랑이 내게 특별했다. 우린 충분히 여행객이 되어 이스탄불의 상징 갈라타 타워 앞까지 걸어가 사진도 찍고 어느 선착장 앞에 앉아 고등어 케밥도 먹었다. 그리고 해 질 녘 바다를 물들이는 노을을 한참을 말없이 감상했다. 하늘에 펼쳐진 다홍빛 행복이 다리 건너편 바다로부터 출렁출렁 흘러내려와 우리의 마음까지 닿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그 붉은 행복을 가슴에 소중히 품은 채  "오늘 하루 정말 행복했다!"라고 신랑에게 말했다. 신랑은 한술 더 떠서 "나는 오늘 정말 완벽한 하루였다"라고 말했다. 하나도 아니고 둘의 마음이 행복하게 물들었으니 이번 생일은 정말 성공적인 여행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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