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혜인 Dec 31. 2021

열쇠를 놓고 나오길 잘했다

열쇠가 맺어준 인연

 터키의 가정집 대문은 닫는 순간 자동 잠금이다. 한국도 마찬가지긴 하다. 그러나 한국은 금방이라도 4자리 번호만 띡띡띡띡 누르면 얼마든지 빠르고 신속하게 다시 집에 들어갈 수 있다. 때론 가족과 친구들에게 비밀번호를 공유할 수도 있다. 물론 그 덕에 범죄에 노출이 되기 쉬운 단점도 있지만 어쨌든 전자도어록은 매우 간편하다. 한국인이라면 집을 드나들기 위해 챙겨야 할게 하나 없다. 반면 터키는 완전히 다르다. 이곳은 철저한 아날로그식 보안장치를 사용한다. 그것은 바로 열쇠. 함께 사는 가족 외에는 믿을게 못된다는 문화의식이라도 있는 걸까. 열쇠는 복사를 하고 들고 다니는 게 번거로워서라도 공유가 어려운 물건이다. 게다가 열쇠를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챙겨야 하는 물건이다. 그 작고 단단한 쇳조각 하나가 얼마나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지 양손 가득 장이라도 보고 오는 날이면 손도 부족한데 가방 속에서 뒤적뒤적 열쇠를 찾는라 애를 먹는다. 외출할 때도 몇 번이나 "아차차!" 하고 신발을 다시 벗었는지 모른다. 코로나로 마스크 챙기기에 겨우 적응해놨더니 이제는 열쇠를 챙겨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 빨리 익숙해져야만 했다. 


 우리는 열쇠를 잊지 않게 항상 잘 보이는 장소에 놓아두었다. 그것은 사실상 나를 위한 것이었다. 신랑은 열쇠가 거의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주로 집에 상주해 있는 내가 신랑의 출퇴근을 맞이해주고 함께 외출할 때는 내가 열쇠를 담당했다. 그래도 서로가 하나씩 가지고는 있어야 했다.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나 자신을 너무나도 믿었다. 거만한 마음으로 결국 열쇠 복사를 미루고 미뤘다. 그리고 우려했던 일은 생각보다 빨리 일어나고야 말았다. 급한일도 아니었는데 마트에 가려다 그만 열쇠를 집안에 둔 채 문밖을 나와버린 것이다. 습관처럼 문고리에 당기는 힘을 주곤 알아서 닫히겠거니 하고 손을 떼었다. 계단을 한 발짝 내려오자마자 "철컥!"소리에 나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열쇠를 두고 나온 게 생각난 것이다. 무슨 상황인지 알면서도 너무 당혹스러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하고 어안이 벙벙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고 일단 신랑에게 연락을 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결혼 전엔 아빠를 먼저 찾았다면 이제는 습관처럼 신랑부터 찾는다. 신랑은 아빠 다음의 제2의 슈퍼맨이기 때문에 분명 해결해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는... 착각이었다! 신랑이 열쇠를 복사해서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퇴근하기엔 아직 날도 밝았다. 게다가 해결은커녕 약 올리는 건지 "결국 오늘이 그날이구나. 한 번쯤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했어"라고 말했다. 직장인은 그저 강 건너 불구경, 결코 슈퍼맨이 될 수 없다. 나는 혼자 이 사건을 해결해야만 했다. 일단은 내가 현관 문밖으로 나가면 현관 열쇠마저 없어서 골치가 두배로 아파진다. 집에 들어갈 수도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나는 딱 복도에 갇히고 말았다.


 다행히 우리 건물에는 집주인 아저씨의 가족들이 산다. 나는 그의 어머니께 도움을 청하기로 한다. 뚜벅뚜벅 계단을 내려가서 숨을 고르고 번역기를 돌린다. "열쇠를 집에 두고 와서 들어갈 수 없어요. 집주인 아저씨가 여분의 키를 가지고 있는지 여쭤봐 주실 수 있나요?"를 미리 번역해두고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뒤 할머니께서 나오셨다. 이사하고 빵이라도 돌릴걸,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서로 반가우면서도 어색했다. 나는 "Merhaba!" 하고 인사를 하고 번역된 휴대폰 화면을 보여드렸다. 번역이 정확하지 않았는지 할머니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시곤 무어라 되질문하셨다. 속으로 '큰일 났다' 싶었다. 그나마 번역기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순 있었지만, 흘러가는 대답은 전혀 해석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할머니는 번역기 사용은 물로 영어도 할 줄 모르신다. 우리는 문 앞에서 서로 난감해 어쩔 줄 몰라했고 할머니는 기가 막히다는 듯 이마에 손을 짚고 소리 내서 웃기 시작하셨다. 그리곤 일단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하셨다. 그리고 나를 거실로 안내하셨다. 자리에 앉은 뒤 다시 궁금한 것들을 물으셨다. 대충 느낌으로 '열쇠를 잃어버렸냐, 집에 놓고 나온게 맞느냐, 집에 누구 없냐' 중 하나를 물어보시는 것 같은데 정확하지 않아서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눈만 동그랗게 뜨고 '아무것도 몰라요' 표정을 하니, 할머니는 나를 위해 더 천. 천. 히. 반복하면서 말씀해주셨다. 그러나 아무리 천천히 말해주셔도 나는 하나도 못 알아듣는다. 너무 죄송하고 슬픈 순간이었다. 어떡하지... 일단 추운 복도보다는 이곳이 안락하고 따뜻해서 좋긴 한데 뭔가 해결이 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결국 할머니께서는 어디론가 전화를 거셨다.


 처음에는 집주인 아저씨를 내게 바꿔주셨다. 다행히 아저씨와는 그나마 영어로 소통이 가능했다. 아저씨는 나의 상황을 이해했으니 열쇠를 가지고 갈 때까지 잠시 자신의 어머니 집에 머물러 있으라 하셨다. 곧이어 며느리에게 전화가 왔다. 왓츠앱을 사용하면 우리가 소통이 더 원활할 것이라며 자신의 번호를 등록해서 메시지를 주고받자고 했다. 그렇게 통화를 마치고 왓츠앱을 다운로드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근처에 사는 친척이 방문해서 할머니와 나의 통역사가 되어주었다. 소문 한번 빠른 터키 문화가 신기하면서도 가족끼리 서로 발 닿는 곳에 살며 보살피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친척분은 아마 우리를 위해 주인아저씨가 파견을 보낸 것은 아니었을까. 사소하더라도 무슨 일이 있을 때 한걸음에 달려와주고 연락을 주고받는 그들만의 끈끈함과 화목함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큰 문제가 아니라고 여겼는지 또는 그냥 놀러 왔던 건지 친척분은 금방 자리를 뜨셨다. 


 어색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앉아있는 내게 할머니께서 배를 두드리며 yemek(음식) 어쩌고 저쩌고를 말씀하셨다. 음식이라는 단어 하나 알아듣고 나는 "밥 먹었니"라는 질문쯤으로 추측했다. 점심식사를 한지 얼마 안돼서 배를 문지르며 "Evet, I am full" (네, 저 배불러요) 이 라고 말했다. 나는 습관적으로 모르는 터키어는 영어로 말한다. 할머니께서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잠시 자리를 비우셨다. 그런데 곧이어 그릇이 덜그덕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내게 쟁반 한가득 음식을 가져다주시는 게 아닌가. 터키식 만두 만트와 요거트였다. 할머니의 질문은 아마도 "배고프니? 음식 좀 줄까?" 였던 것 같다. 나는 배가 고프지 않아서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깨끗이 그릇을 비웠다. 우리는 그렇게 엇갈리는 대화를 주고받으면서도 함께 이런저런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할머니의 따뜻하고 친절한 마음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내 마음속까지 느껴졌다. 내가 식사를 마치자 이번에는 손수 터키쉬 커피를 끓여주셨다. 고소한 커피와 달콤한 초콜릿은 오늘 나의 하이라이트였다. 할머니의 손길이 닿은 달콤하고 따뜻한 음식은 나의 긴장감을 사르르 녹여주면서 열쇠고 뭐고 계속 이 시간을 만끽하고만 싶었다. 할머니 덕에 나는 손녀딸에게 뭐든지 내어주고 싶어 하던 한국에 있는 진짜 우리 할머니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 그리움을 터키의 할머니께서 채워주시는 것 같았다. 따뜻했다. 커피를 마시며 눈으로 거실을 둘러보았다. 포근한 패브릭 소파와 보송한 카스테라가 떠오르는 베이지색 카펫, 곳곳에 걸려있는 할머니의 애정어린 가족사진들, 탁자에 놓인 빨간 생화 장미와 할머니께서 키우는 작은 노란 새, 이 모든것들이 할머니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주치는 할머니의 다정한 눈빛과 미소는 내게 따스한 햇살같은 오후를 선물해 주었다. 분명 처음 방문하는 낯선 집인데도 눈을 감으면 소파에 기대어 스르륵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편안했다.


 다행히 내가 잠들기 전에 학교를 마친 할머니의 손녀딸 나스가 왔고 활기찬 초등학생 6학년의 기운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나스는 나에게 호기심을 갖고 함께 거실에 머물러주었다. 이것저것 내게 말을 걸다가 '터키 말을 하나도 모르네' 싶었는지 번역기로 내게 희망의 문장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당신에게 최대한 빨리 터키어를 가르칠 것이다. 당신도 그걸 원하세요?"였다. 내가 "Yes!"라고 말하자 나스는 비장하게 방으로 가서는 자신의 영어교과서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내게 첫 장부터 차근차근 터키어를 알려주었다. 정말 딱 필요한 기초과정이었다. 그동안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터키어를 공부하기엔 현지인과 터키 영어교과서만 한 게 없다. 나는 영어를 사용하는 원어민은 아니었지만 나스는 내게 "영어 시험에 통과하게 도와줘"라고 말했다. 나는 기꺼이 그녀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내가 영어로 말하면 나스는 다시 터키어로 말하며 우리는 언어를 교환했다. 나스는 내게 수준에 맞는 아주 좋은 선생님이 되어주었고 그 시간이 참으로 유익했다. 우리의 희망처럼 나는 빨리 터키어를 잘해서 좋은 이웃들과 즐겁게 소통하고 싶다. 생존만을 위한 언어가 아니라 마음을 공유할 수 있는 언어를 배우고 싶어졌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을 때 집주인 아저씨가 도착했다. 6시가 되기 조금 전이었다. 퇴근하고 오셨다고 하기엔 참 애매한 시간이었다. '나 때문에 설마 조퇴를 하고 오신 건 아니겠지? 아니면 자영업을 운영하시나?' 갖은 추측만 난무할 뿐 실제로 회사는 어떻게 하고 오셨는지 여쭤보진 못했다. 하지만 아저씨가 말한 대로 최대한 빨리 와주신 것은 분명했다. 귀찮고 성가신 위층 새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아저씨는 내가 집에도 못 들어가니 곤경에 처해있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연락을 해주며 계속 신경 써주시고 한걸음에 달려와 주신 것 같아 너무 감동적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나를 위로해준 천사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여전히 천사였다. 한 사람을 보면 그의 부모가 보이고 부모를 보면 가정이 보이는 법인데 나는 그 말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오늘 그의 가족들도 내겐 모두 따뜻한 천사였다. 나를 가족처럼 대해주는 집주인 아저씨와 그의 가족이 너무 마음에 들었고 가까이에서 그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졌다. 한껏 친해진 할머니와 나스랑 활기찬 인사를 나누고 나는 아저씨와 함께 우리 집으로 올라갔다. 들고 오신 열쇠로 집 문을 열어주시면서 생각보다 우리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느껴지셨는지 자신의 어머니는 매우 사랑스러우시고 좋은 분이니 자주 놀러 오라고 하셨다. 열쇠를 잘 챙기라는 당부와 함께 말이다. 나는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세트로 챙길 수 있도록 지갑에 열쇠를 달았다. 열쇠를 달면서 이것 때문에 집에도 못들어가고 장도 못봤지만 한편으론 열쇠가 고마워 미소가 지어졌다. 내게 이웃의 정을 느끼고 따뜻함을 듬뿍 안을 수 있는 시간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참 좋은 사람들을 알게되어, 그리고 그분들이 나의 이웃이여서 나는 정말 행복하다.







작가의 이전글 생일에는 역시 여행이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