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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dybrown Feb 27. 2020

그렇게 난 독일에 왔다

해외 이민을 위한 해외 취업의 시작

한국, 나의 조국.

한국을 사랑하고 걱정한다. 진심으로.


하지만 한국에 살고 싶진 않았다.

뭐, 이유는 너무 많지만 이 글의 주제는 그게 아니므로.

내가 독일 이민을 위해 독일에서 취직하게 된 스토리를 짧게나마 적어 보려고 한다.



아, 독일에서 일하고 싶어!

독일어를 전공한 나는, 독일 교환학생 생활  목격한 한국보다 나은 근로 환경  문화를 동경하게 되어 독일 취업을 결심하게 되었다.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마치고 귀국하여서는 독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무작정 독일 기업 인턴에 지원하기도 했지만, 너무 급박하게 준비했던 관계로 실패를 맛보곤 했다.

 동시에 바로 학교로 돌아가기보다는 짧게나마 독일 현지에서 쌓아온 독일어에 대한 감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휴학  괴테 문화원을 다니면서 독일어 실력 유지를 위해 노력함과 동시에 다양한 독일 관련 네트워킹 행사에도 꾸준히 참여했다.  과정에서 많은 독일인 친구  독일 관련 업계 종사자들과 교류할  있었는데, 만난 친구  한독상공회의소라는 곳에서 인턴을 하고 있던 친구가 있었고, 추후  친구를 통해 한독상공회의소 인턴 자리에 T.O 생겼음을 인지, 지원하여 7개월간 인턴으로 근무했다. 독일은 아니었지만 독일 정부 소속 기관이었으므로 수장이 독일인이며 독일인이 절반인 기업 특성상 독일에서 근무하는 느낌을 느낄  있었고, 이를 통해 독일 취업에 대한 꿈 혹은 환상(?)을 더욱 키웠다고 기억한다. 

 

독일  한국 기업 (해외법인) 으로의 첫 번째 취업

 처음에는 막연히 독일 기업을 목표로 삼았으나, 리서치 결과 당장은 독일어 실력 등에 한계가 있음을 체감하고 독일  한국 기업도 목표 군에 넣었다. 졸업 즈음하여 학교 취업센터로부터 소개받은 월드잡 (공공기관인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운영하는 해외취업포털사이트) 사이트에서 매일 같이 구인공고를 열심히 뒤적거리기 시작했고, 학교에 독일에서 근무하고 있는 선배가 방문하면 찾아가 궁금한 점을 묻기도 하는  나름  열정을 보였던 시기였다.

 그렇게 졸업을 맞이한 16년 여름, 한국 대기업 물류 계열사인 P사의 독일법인 함부르크 사무소 채용 공고를 보고 지원하게 되고, 서류 합격 후 화상 면접 및 본사 면접을 거쳐 최종 합격, 16년 8월부터 근무를 시작했다. *비자는 한국 독일 대사관에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발급받아 독일 입국 및 근무를 시작하였고, 약 6개월 후 워킹비자로 전환 신청을 하여 전환하였다.

 물류의 '물'자도 몰랐던 내가 P라는 큰 국제 물류기업에서 밑바닥부터 물류를 배울 수 있던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힘든 점도 너~무 많았지만. 돌이켜보면 많이 배우고 성장하며 해당 분야에 대한 기반을 닦을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단점이 있었다면 한국 회사이다 보니 아무래도 한국 회사 문화가 짙었고,  문화와 거리를 두고 싶어서 독일 온 건데...?라는 회의감을 품게 된 나는 입사 2년여 쯤 된 2018, 외국회사로의 이직을 결심하게 된다.

 

결론은 LinkedIn

사실 처음 독일에서 일을 시작했을 당시의 목표는 틈틈이 공부해서 독일어 실력을 향상시켜 당당히 독일 기업으로 이직하는 것이었다 (꿈도 컸지). 안일함에, 혹은 게으름 탓에 독일어는 열심히 하지 못했던 관계로 자신있는 영어 사용 가능한 포지션 위주로 공략했다. 가장 애용했던 경로는 LinkedIn으로, 확실히 경력이 1 -2년쯤 되었을 때부터 헤드헌터들로부터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당시 가장 많이 고민했던 부분은 ‘동종업계로의 이직이냐, 혹은 새로운 업계로의 도전이냐였다. 이직 과정에서  부분 하나는 정말 치열하게 고민했던  같다. 애초에 물류라는 분야를 원해서 시작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나의 장기적인 커리어에 있어 첫번째 이직이 어쩌면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객관화 하여 들여다보았을 때, 나는 사람들을 면대면으로 만나고 외향적인 작업을 수행할 때 가장 에너제틱하고, motivate 되는 사람이라는 정의를 내렸다. 이런 관점에서 영업 관련 직무에도 관심이 커졌으나, 아무래도 해당 분야 경험이 전무한 내겐 그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고 모호하게 느껴졌던 관계로 지난 물류의 경력을 살릴 수 있으면서도 저의 강점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포지션으로 타겟 그룹을 좁혔다. 그러던 중 헤드헌터를 통해 한 바이오/제약 특화 물류회사의 logistic project coordinator 포지션을 제안 받았고, 무려 4번의 면접 끝에 최종합격 하게 되었다. 사실 해당 포지션에 근무하기에 나의 경력은 상당히 짧은 편이었지만, 회사 측에서 나의 personality와 이전 회사 근무 당시 화학 제품군을 담당했던 점을 매우 긍정적으로 판단해 주었으며, 무엇보다도 한국 시장을 겨냥하여 한국어 능통자에 대한 수요가 있었던 덕에 (가장 큰 이유 - 한국어 능통자!) 비교적 짧은 경력에도 합격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운이 좋았다. 하지만 어딘가에 숨어있었을 그 운을 발견해낸 것도 내가 조금은 기특하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누가 갖다주는, 그런 거 아니니까 :) 지금도 외국기업으로의 이직을 고려하는 지인들에게 나는 무조건 LinkedIn 프로필부터 잘 관리해 놓는 것을 추천한다. 경력이 아무리 많고 내세울 점이 많다 해도 그걸 매일 PR 하면서 다 수 없기 때문에, 결국엔 이러한 수단을 통해 나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지 않을까. Linkedin, Xing 등 간편하게 내 경력을 정리해놓을 수 있는 SNS 플랫폼이 이렇게 많다는 점이, 그리고 그 플랫폼을 실제로 기업과 헤드헌터들이 많이 활용한다는 사실이 우리 X세대에겐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그렇게 독일에 눌러앉았다

독일행이 결정될때 즈음 내 일기의 한 대목이다:

"독일로 가게될지 말지 기로에 서 있는 지금, 고민도 많고 느끼는 점도 많다. 해외취업은 타이밍과 운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만약 내가 교환학생으로 6개월이 아니라 1년을 있었다면, 초반 3개월은 워홀비자로 근무해야 하는 이 포지션에 지원조차 못했을 거다. 비자문제 등 많은 것들이 엮여있기 때문에, 말 그대로 모든 아다리(?)가 맞아 떨어져야 한달까. 어제 생애 첫 skype 면접을 무사히 마치고, 이제 두 번의 면접이 남았다. 인턴을 제외한 정식적인 첫 구직활동이었기 때문에, 혹여 결과가 좋지 못하더라도 순순히 받아들일 것 같긴 하다. 물론 함부르크 생활에 대한 아쉬움은 남겠지만. 또 결과가 좋더라도 아마 고민은 더 많아질 것이다. 준이민이나 다름 없으므로..

 그냥 지금이 그런 나이인 것 같다. 불확실함을 즐기면서도, 그 불확실함 때문에 고민은 많아지는데, 고민한다고 해서 상황이 절대 나아지진 않는다. 그래서 차라리 let it be 하며 매 순간에 몸을 내던지게 된달까. 한편으로는 이 모든 감정들이 스물여섯 이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매 순간이 아쉽고 그렇다. 방랑하며 살고 싶은 내 꿈이 과연 이렇게나 일찍 이루어질까? 하며 내 삶을 타자의 시선으로 관망하게 되는 요즘."

 

불확실함에 고민하던 스물여섯의 혜인이는 그렇게 함부르크라는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이 아름다운 도시에 눌러 앉아야겠다 결심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까지 했다.

 

서른이 된 지금 되돌아본다. 만약 그 스물여섯의 여름, 망설이다 주저앉아 버렸다면? 걷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으로 완벽하게는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었을 것 같다. 그래서, 혹시 그 때의 나처럼 망설이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과감하게 한 발자국 내딛길 바란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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