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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태현 Jan 28. 2020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꺼지지 않을 불씨

 영화 리뷰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오마이뉴스(http://omn.kr/1mdzq)에도 실렸습니다.

출처 : <다음> 영화

  혼자 있다고 자유로운 것은 아니며, 같이 있다고 사랑을 실감하진 않는다. 그들은 떨어져 있지만 같이 있고, 서로를 볼 수 없지만 감응한다. 그들의 사랑은 언젠가 소진될 운명이지만 찬란히 타오른다. 그리고 그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는 타오르는 순간에 주목하지 않는 데 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두 여인의 사랑을 그린다. 정확히 말하면 마리안느(노에미 멜랑)가 기억하는 엘로이즈(아델 에넬)와의 사랑이며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대상인 엘로이즈를 마리안느는 어떻게 기억할까? 


   영화는 마리안느가 그들의 추억을 회상하는 순간에 주목한다. 그녀는 미술 수업 도중 제자가 꺼내놓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며 필연적으로 그들의 사랑을 떠올린다. 엘로이즈의 초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기억이 틈입하는 그 순간을 트랙 인(대상을 향해 나아가는 촬영 방법)하며 서서히 클로즈업한다. 

 

    즉 영화는 기억의 매개로 클로즈업을 활용한다. 엘로이즈를 생각하는 마리안느와 그 대상인 엘로이즈의 초상화에 가까이 접근하는데, 결국 영화는 그 기억들을 점철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영화는 희미해지는 감정을 붙잡으려는 그녀(들)의 의지를 표상한다.

출처 : <다음> 영화

   그들은 미완의 사랑을 ‘선택’한다. 그렇다고 완성의 사랑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완전하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성숙한 사랑이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은 그들에게 중요한 요소이다. 어쩌면 기억만 남아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그들의 사랑을 정의한다. 그들은 사랑을 쟁취하겠다는 결심 대신 언제까지나 기억하자고 다짐한다. “후회하지 말고 기억하자”는 엘로이즈의 외침처럼 그녀들은 운명에 단지 순응하지만은 않는다. 필사적으로 사랑하고 기억한다.


   바라보지 않는다고 서로를 느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감응은 오히려 응시되지 않을 때 깊게 향유된다. 이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순간은 엔딩 시퀀스이다. 시간이 흐른 뒤 음악회에서 우연히 마주한 두 사람.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보지만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보지 못한다. 그렇지만 마리안느는 엘로이즈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비발디의 사계가 음악회에서 연주되는데 이는 극중 초반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에게 연주해준 적이 있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기억하듯 연주를 들으며 온몸으로 전율한다. 영화는 그 순간을 다시 한 번 클로즈업하며 찬찬히 보여준다. 프레임에는 마리안느를 회상하는 엘로이즈의 모습만이 존재한다. 단지 프레임 밖에서 들려오는 연주 소리만 틈입될 뿐이다. 사랑을 갈라놓은 운명과 사회적 현실은 배제된다. 그 순간만큼은 그들의 추억과 사랑만 존재할 수 있다.   

출처 : <다음> 영화

   클로즈업은 ‘순간적이지만 영원한 느낌’을 전달하는 영화 미학이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순간적이었던 그들의 사랑을 영원한 기억으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그들의 추억이 담긴 초상화와 음악이 있다. 즉 예술이 존재한다. 


   관객들이 영화라는 예술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에 감응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아름다운 순간들은 언젠가 사라지기 마련이다. 잡으려 애써도 혹은 흘러가게 놔둬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영원할 수도 있으며, 남기려는 노력 그 자체가 더 찬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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