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민미술관 《히스테리아: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
전시 기간: 2023.04.14~2023.06.25
방문일: 2023.06.06
최근 트레바리 독서모임에서 한병철 저자의 『아름다움의 구원』을 읽었다. 책의 요지는 근대 이전까지의 예술은 내면을 만족시키는 긍정성과 타자의 존재를 품는 부정성이 공존했는데, 후기 근대 사회의 예술은 부정성이 사라지고 긍정성만 남아 예술로서의 의미를 갖지 못하고 매끄럽고 부드러워졌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경향은 자본주의와 결합해 더욱 심화되고 있다고 한다. 《히스테리아: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는 제목에서 보이는 것처럼 동시대의 리얼리즘 회화를 다룬 전시다. 자본주의 사회를 리얼하게 담아낸 회화 전시. 그렇기에 전시를 보는 내내 책에서 읽은 내용들이 떠올랐다.
전시는 1~3층 순서로 진행되는데, 층을 올라갈수록 작품의 형상은 오늘날의 이미지 경향처럼 확대되고 매끄러워진다. 층별로 작품들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먼저 1층의 회화들은 '거시적인’ 풍경을 ‘거친’ 붓질로 그렸다. 이곳에 걸린 그림들은 화가의 시야각보다 더 넓은 세상을 담아낸다. 그리고 물감의 덩어리 지고 물에 용해되는 물성, 붓이 가진 필압의 물성을 다양하게 활용해 질감이 살아있는 거친 붓질이 눈에 띈다. 이러한 붓질은 획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 개인들이 모여 하나의 전체 그림을 이루는 듯한 형상을 가진다. 이렇듯 1층에 걸린 작품 속에는 타인이 존재한다.
2층의 회화들은 '일상적인’ 풍경을 ‘중성적인’ 붓질로 그렸다. 그림에는 우리가 생활 속에서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익숙한 시선의 풍경이 담겨 있다. 붓질도 그렇다. 익숙한 풍경들은 현실을 최대한 비슷하게 담고자 철, 유리 같은 풍경은 매끄럽게, 나무와 바닥 같은 질감은 거칠게 표현되었다. 2층의 작품은 1층의 그것보다 좀 더 개인적인 시선이 강조된다.
3층의 회화들은 '미시적인’ 풍경을 ‘매끄러운’ 붓질로 그렸다. 맨눈으로 보기보다는 카메라의 확대 기능, 또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한 화면으로 보는 풍경이 담겨 있다. 우리가 두 눈만으로는 잡아내기 어려운 물의 파동, 비현실적인 색감의 동물처럼 미세하고 가상적인 풍경들이 대다수이며, 질감 또한 캔버스 위에 물감으로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획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한병철의 긍정성과 부정성 개념으로 전시의 흐름을 정리하면, 작품이 묘사하는 대상은 윗층으로 올라갈수록 거시적인 풍경에서 미시적인 풍경으로 좁혀지며 타인과 공존하는 부정성을 잃고 내면으로 침몰하는 긍정성만을 남긴다. 작품이 표현되는 붓질이라는 방식 역시 시선을 멈추게 하는 거친 표현의 부정성이 시선을 미끄러지게 하는 매끄러운 표현의 긍정성으로 변해간다.
이처럼 전시는 한병철 작가가 비판하는 자본주의의 흐름대로 흘러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시된 작품들이 부정성을 잃은 자기만족적인 작품인 것은 아니다. 작품들은 자본주의적 흐름을 따름으로서 역설적으로 관객들이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타인과 공존하는 1층의 바깥 풍경 그림, 매일 마주하는 2층의 지하철 풍경 그림, 스마트폰 속에 존재하는 3층의 가상 풍경 그림까지, 관객들은 자기만의 생각을 가지고 작품에 공감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다. 어떤 의견이든, 자기만의 언어로 작품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작품은 제 역할을 다한 것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