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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im Jung Sep 18. 2023

역할로 증명하는 존재

프란츠 카프카 『소송』, 『변신·시골의사』 독후감

트레바리 '이참에 읽자' 북클럽, 프란츠 카프카 『소송』, 『변신·시골의사』


[개요]

프란츠 카프카는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벌레로 변하는 내용인 『변신』으로 가장 잘 알려지지 않았나 싶다. 이번 모임에서는 『소송』을 중심으로 다른 두 짧은 단편인 「변신」과 「선고」를 함께 읽었다. 『소송』은 카프카의 3대 장편소설 중 하나로, 주인공 요제프 K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죄목으로 체포당해 소송에서 이기기 위해 투쟁하는 내용의 소설이다. 『소송』 안에는 「법 앞에서」라는 짧은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단편은 시골 남자가 법 안에 들어가려고 문지기에게 문을 열어달라 요청하지만, 문지기는 지금은 열어줄 수 없다며 남자를 가로막고 문 앞에서 긴 세월동안 기다리던 남자는 결국 들어가지 못한다. 「법 앞에서」는 『소송』의 전체 내용을 짧게 압축한 단편이라고 볼 수 있다. 네 소설 모두 카프카가 살아가며 지켜본 산업 사회의 병폐에 대한 비판, 그리고 현실에서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과 자신이 추구했던 예술가로서의 이상 사이에서의 고뇌를 담은 카프카스러운 소설이다.






사람은 육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육체의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음식을 먹고, 정신의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 육체와 정신의 배고픔을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각자 직업을 갖고 사회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데 사회가 발달하면서 생존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다양한 역할이 만들어지고, 이렇게 생긴 역할들은 역할을 위한 또 다른 역할을 만들어 냈다. 그렇게 복잡다단해진 사회는 개인이 필요에 의해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역할을 수행해야지만 개인이 존재할 수 있도록 강요한다. 카프카는 이렇게 개인과 사회의 주객이 전도된 상황을 다양한 자아 정체감을 가진 인물들을 통해 비판한다.




1. 역할이 존재를 압도하게 된 사람들


「소송」의 피고들은 사회를 작동하게 하는 '법'을 작동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들은 소송에서 이기기 위해 변호사를 구하고 여러 인맥을 총동원하는 노력을 하지만, 이 노력은 개인의 존재를 되찾기보다는 법의 권위를 더 공고히 세울 뿐이다. 블로크를 위한 청원서는 블로크가 아닌 변호사의 권위를 세우고, 「법 앞에서」에서 시골 남자가 문지기에게 주는 뇌물 역시 시골 남자가 아닌 문지기의 권위만 세운다. 피고들은 실체없는 법에 다가간다고 착각하면서 점차 자신의 모습을 잃는다. 이 과정에서 마주치는 관계자들은 비정상적으로 경직되거나 피곤해 보여, 실체는 없으나 어디에서나 작동하는 법의 속성을 은연중에 보여준다.


그래서 피고들은 법의 영향력에 따라 다른 인격을 가진 사람처럼 변한다. K는 생일날 체포되었을 당시 감시인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다가도 당장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미가 보이자 원래의 거만했던 사람으로 돌변해 감시인들에게 장난을 걸기도 하고, 멀쩡하게 들어간 법원 사무처와 화가의 아틀리에에서는 직원들의 부축을 받고 옷을 벗어버릴 정도로 기진맥진한다. 또한 처음 만난 블로크를 당연하게 무시하다가도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그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다른 피고들도 마찬가지다. K가 법원 사무처 복도에서 만난 피고는 바깥세상에서는 타인보다 우월함이 틀림없을 사람이지만 법 앞에서는 그토록 무기력하며, 상인 블로크는 처음에는 K에게 무척 공손하다가도 변호사 앞에서는 그의 개가 되어 K에게 막말을 서슴지 않는다.


이처럼 법의 작동 범위 안에서 개별 존재들은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이런저런 노력을 하지만, 이는 자기위로적인 반복 행위일 뿐 결국 이들은 점차 존재를 잃어가고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어있다.



2. 타인의 역할로 자기 존재를 채우려는 사람들


「소송」의 피고들이 이렇게 빈껍데기같은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피고들에게 호감을 보인다. 변호사는 “피고인들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건 바로 소송”이라고 말했으며, 뷔르스크너 양도 "법원에는 알 수 없는 매력이 있다"는 말을 한다. 소송과 법에 매력을 느끼는 여자들이 피고들에게 호감을 보인다는 것은, 여자들은 피고 개별 존재에게 호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맡은 법이라는 역할에 호감을 보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를 지배하는 법을 위해 기능하는 피고들을 취함으로써 여자 자신도 지배적인 질서 안에 속하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망이 피고들을 매력적으로 만든다. 법원과 관련된 사람 그 누구에게나 자신을 내어주는 법원 정리의 아내, 만나는 피고들에게 족족 치근거리는 레니는 법에 자신을 내맡기면서도 그 부속품인 피고들을 휘두르며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 한다.


이런 태도는 「변신」에도 나타난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한 뒤 그레테는 오빠의 방 청소와 그를 관리하는 것에 대해 자신만이 전문가인 양 다른 사람들의 손이 미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그레테는 오빠를 위한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녀 외에는 누구도 그레고르의 방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그가 아끼는 가구들을 모조리 빼내고, 심지어 그레테가 오빠의 방을 더럽게 방치한 것을 보다 못한 어머니가 대청소를 하자 "이제는 오빠 방 청소마저 못 하게 막는다"며 울고불고 난리를 친다. 그레테의 태도는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소송」에서 여자들이 느끼는 법의 매력과 마찬가지로 그레테 역시 한때 집안의 경제를 책임졌던 오빠를 지배하는 것에 "유혹"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그녀의 욕망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겉보기에 내면이 단단해 보이는 「소송」의 여자들은 자신을 지켜주는 남자들에게서 독립할 수 없고, 유일하게 오빠의 변신을 포용하는 것처럼 보였던 그레테는 오빠 때문에 하숙인들이 나가자 자비없이 그를 내친다. 이처럼 존재의 중심을 외부에 두는 이들은 근본적으로 자신을 흔드는 사회 질서에 다가가려는 의지조차 없다는 점에서 「소송」의 피고들보다도 더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3. 역할이 변하면서 다른 존재감을 갖게 되는 사람들


한편, 「변신」의 그레고르는 다른 단편들의 주인공들과 달리 어떠한 역할도 해내지 못한다. 그는 외판 사원으로서 누구보다도 가족을 사랑하며 가족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 왔다. 하지만 그는 불규칙한 생활과 동료들 사이 모함의 희생물이 되는 등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무척 지쳐있었는데, 그러한 마음을 가진 것에 벌이라도 주는 것처럼 그는 벌레로 변하게 된다. 그레고르가 그간 가족들을 위해 희생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더 이상 가장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아버지를 중심으로 다른 가족들에게 경제적 역할이 전도되면서 그레고르는 존재를 부정당한다.


그레고르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던 때에 아버지는 늘 침대에 묻혀 지내고 의자에 앉아 손만 간신히 들어 올리던 노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멀끔한 제복 차림으로 꼿꼿하게 설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제복이 가장으로서 그의 위엄을 지켜주기라도 한다는 듯, 집에서도 제복을 벗지 않으려 한다. 달라진 그는 "이것이 인생이로구나. 이것이 내 옛 시절의 평화로구나!" 하며 젊은 시절 가장의 역할을 되찾은 것에 기뻐한다. 이러한 모습은 「소송」에서 K와 숙부가 변호사를 찾아갔을 때, 자신을 병문안이 아닌 일을 목적으로 찾아온 것을 알게 되자 변호사가 제법 기운을 차리고 건강해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가족들이 그레고르의 역할을 대체하면서 그레고르는 점차 잊혀 간다. 그는 인간의 말을 할 수 없게 되고, 어둡고 좁은 소파 아래를 아늑하게 느끼며, 신선한 음식을 싫어하고 시력이 나빠져 또렷했던 도시 풍경이 황야로 보이게 된다. 그레고르는 동생의 연주를 들으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자신을 버러지로 인정할 수 없지만, 그 감정도 타인과의 관계에서 기능하지 못하면 별 쓸모가 없다. 결국 인간도 벌레도 아닌 그레고르는 자신의 방에 쌓여가는 팔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물건들과 같은 처지가 된다. 끝끝내 자신을 가장 아껴주었던 동생은 오빠를 '그레고르'가 아닌 이것, 괴물, 동물과 같은 무의미하고 끔찍한 존재로 부른다. 그런 동생의 지명하에 그레고르는 쓸쓸히 죽고 만다. 그레고르가 죽은 와중에도 행복한 삶을 계획하는 가족들의 대비되는 모습을 통해, 사회에서 제 기능을 해내지 못하는 존재는 얼마나 철저히 고립되는지 더욱 잘 느껴진다.




이처럼 카프카는 사회적 역할과 개인의 존재 사이의 간극을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묘사한다. 「선고」의 게오르크는 그런 카프카의 고민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이 있지만, 현실을 살아가면서 그 이상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카프카는 그런 자신의 불완전함에 대한 절망을 소설가라는 역할로 극복하고자 했던 것 같다. 평생을 사회적 요구와 개인의 이상 사이에서 고민한 카프카를 읽으며, 나라는 사람은 어떤 역할을 통해 이상적인 나와 사회적 역할의 공생을 도모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게 된다.






덧.


「소송」에서 완성된 장들에 묘사된 계절과 등장인물, 사건들의 흔적에 따라 미완성 장들이 들어갈 순서를 아래와 같이 재구성해 보았다. 미완성 장을 읽지 않는다고 해서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큰 영향은 없지만, 완성된 장에 짧게 언급하고 지나간 내용들이 자세히 묘사됨으로써 K라는 인물이 좀 더 촘촘하게 그려지는 느낌이었다. 또한, 이야기들을 서로 끼워맞추며 읽게 되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카프카만의 기묘한 방식이 느껴져서 이 책이 미완성으로 남은 것이 오히려 카프카스러움을 더욱 강조해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으로나 형식으로나 결코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미로같은 소설이었다.

배경색이 있는 글자가 미완성 장들이다.
완성된 장들과 미완성 장들의 순서를 맞추기 위한 카드 정리
독후감 초안-독후감 최종-독후감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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