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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보다 행동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1부 독후감

by Haim Jung

트레바리 '이참에 읽자' 북클럽,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1부


[개요]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대작 중 1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인간이 타락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두고 하느님과 내기를 한다. 하느님은 선한 인간인 파우스트를 지목하며 메피스토펠레스에게 그를 유혹해도 될 것을 허락한다. 세상의 지혜를 모두 알고 싶어하는 학자 파우스트는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겠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 넘어가 피의 계약을 맺는다. 메피스토펠레스와 함께 세상 곳곳을 여행하던 파우스트는 마르가레테(그레트헨)라는 순박한 여인과 사랑에 빠지지만 메피스토펠레스의 계략으로 마르가레테는 죄를 짓고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파우스트는 마르가레테를 구하려 하지만 마르가레테는 자신의 죄를 목숨으로 갚기 위해 거절하고, 끝까지 인간의 양심을 잃지 않은 마르가레테는 구원받는다.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는 2부에서 여행을 계속한다.




지난 시즌에 신유물론과 구조주의에 관한 책을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진정한 나', '온전한 나의 생각'이라는 이상향의 존재를 전혀 의심하지 않고 동경하던 마음에 약간의 절망감과 창피함이 들었다. 괴테 이후 등장한 이론들을 읽고 다시 괴테 시대로 돌아오니, 진정한 나라는 것이 진짜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 없고 나의 의지라는 것도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다양한 영향들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이기 마련이니, 비록 어두운 충동에 쫓기더라도 올바른 길을 잊지 않는 인간'이란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파우스트는 뛰어난 학자지만 동시에 글자가 아닌 몸으로 직접 세계를 경험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아무리 자신이 골방 안에서 동물의 뼈다귀로 연구한다 한들 그것은 죽은 생명일 뿐이고, 그는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을 느끼고 싶어 한다. 반면 그의 제자인 바그너는 정신만을 고매한 것으로 여긴다. 바그너와 산책하는 동안에도 파우스트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순간을 기쁘게 여기지만 바그너는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들을 혐오하고 마귀 취급한다. 잠시 쉬는 동안에도 감각과 정신에 관해서 두 사람은 계속 부딪히고, 그러던 차에 개로 변신한 메피스토펠레스를 발견한다.


개를 데리고 방으로 돌아온 파우스트는 원전을 펼쳐들고 번역하기 시작한다. 하나의 단어에 대해 '말씀'-'뜻'-'힘'-'행위'로 이어지는 번역은 '행위'가 일어나 '힘'이 생기고, 그 '힘'에서 '의미'를 발견해 그것이 '말씀'이 됨을, '몸'으로 하는 행위가 '언어'화하는 말씀보다 우선임을 이야기한다.


파우스트의 마음 속에는 이미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꿈틀거리고 있었기에, 그는 메피스토펠레스와의 두번째 만남에서 바로 계약을 맺는다. 파우스트는 자신이 순간을 고집하면, 즉 멈춤을 고집하면 자신이 굴복하겠다고 내기한다. 두 사람이 떠나기 전,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를 찾아온 학생에게 스스로 파우스트 행세를 하며 조언을 하는데, 개념이 부족한 곳에서 말이 떠오르니 말을 중시하라고 한다. 이는 실재 없이 말만 다루는 학자들을 비꼬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원전을 번역했던 파우스트가 '말씀' 이전에 '뜻'-'힘'-'행위'가 우선한다고 말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공유한다고도 생각된다.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는 술집을 거쳐 마녀의 부엌에서 젊어지는 약을 마시고 길거리로 나선다. 파우스트는 마르가레테(그레트헨)에게 첫눈에 반하고,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몰래 보석을 선물하고자 그녀의 방에 들어간다. 소박한 그녀의 방을 보고 그의 사랑은 더욱 커졌으나, 남의 방에 몰래 들어와 선물을 두고 가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메피스토펠레스가 나서서 보석함을 궤짝 안에 넣고 두 사람은 사라진다. 안타깝게도 마르가레테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겁먹은 어머니는 보석함을 교회에 갖다바치고 신부는 탐욕스럽게 보석을 가로챈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를 시켜 다시 패물을 가져다 놓고, 그레트헨이 마르테 아주머니에게 찾아간 사이 메피스토펠레스가 거짓 작전을 꾸민다. 마르테 아주머니의 남편이 먼 곳에서 죽었으며, 그 증인으로 파우스트를 데려오겠다는 것이다. 파우스트는 거짓 증언하기를 거부하지만 그레트헨을 만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음을 알고 결국 메피스토펠레스를 따른다. 그레트헨을 만난 파우스트는 그레트헨이 어린 동생을 어머니와 다름없이 자신이 키운 이야기, 꽃잎 따기 놀이하는 것을 보며 사랑을 키워간다. 그레트헨과의 사랑을 경험한 파우스트는 인간이 결코 정신과 감각, 모든 것에 통달하는 완벽을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레트헨은 파우스트에게 하느님을 믿는지 아닌지 질문한다. 그레트헨은 절대적으로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종교를 존중하지만 하느님이라는 말을 믿기보다는 하느님의 힘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하늘, 대지, 별, 사랑과 같이 직접 그가 감각할 수 있는 실재를 느끼고 싶어 하기에, 일반적인 신앙인들과는 다른 신앙심을 가지고 있다. 실재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그것에 붙여지는 이름은 껍질뿐에 불과하다. 그레트헨은 일반적이지 않은 파우스트의 종교관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존중한다. 파우스트는 그레트헨이 질문한 신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질문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답을 내놓는다.


얼마 뒤, 우물가에서 친구와 대화하던 그레트헨은 애인을 사귄 다른 여자에 대한 험담을 들으며 자신의 죄로 인해 괴로워한다. 그와 동시에 죄를 감수할만큼 파우스트와의 사랑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레트헨은 성모상 앞에서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털어놓는다. 그녀의 오빠인 발렌틴은 여동생의 죄를 알고 분노하는데, 마침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가 나타나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의 죄를 비꼬는 노래를 부르고 발렌틴은 파우스트에게 달려들었다가 메피스토펠레스의 힘으로 인해 죽는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그는 여동생을 비난하고, 발렌틴의 장례식에서 그레트헨은 양심의 가책을 부추기는 악령의 목소리에 그만 기절하고 만다.


한편 발렌틴을 죽이고 도망간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는 발푸르기스의 밤을 즐긴다. 마녀와 마법사들의 정신없는 노래와 연극을 즐기는 와중에도 파우스트는 지적인 호기심을 갖기도 하고, 그레트헨을 떠올리기도 한다. 메피스토펠레스는 그레트헨의 소식을 숨기려고 하지만, 결국 그레트헨이 감옥에 갇힌 것을 알게 된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를 비난하고 메피스토펠레스 역시 이중적인 파우스트의 모습을 보니 '이성의 한계'가 왔다며 반박한다. 그럼에도 결국 두 사람은 그레트헨을 구하러 간다.


그레트헨은 파우스트를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을 죽이러 온 형리로 착각한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후에도 자신을 자책하며 파우스트를 따라가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양심을 지키고자 목숨을 구걸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자신이 사형당하는 환영을 보며 그레트헨은 괴로워하고, 메피스토펠레스를 보고는 환영이 극에 달해 결국 하느님에게 자신을 심판해줄 것을 요청한다. 메피스토펠레스는 그녀가 '심판받았다'고 하지만, 하늘의 목소리는 그녀가 '구원받았다'고 말한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서둘러 파우스트를 데리고 사라진다.



정신과 감각 사이에서, 의지와 굴복 사이에서 인간은 방황한다. 정신의 세계에 몰두하던 파우스트는 자신 역시 하나의 생명으로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낀다. 지혜를 찾아가는 과정이 글자에 치우치면서 스스로와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고 느끼며 살아있는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찾게 된다. 감각의 세계에서 만난 그레트헨과 파우스트는 서로 다르지만 각자의 올바른 길을 찾아간다. 그레트헨은 허용되지 않은 사랑에 대해 자신의 목숨으로 갚음으로써 18세기 당시의 여성으로서 사회적 의무를 지켰다. 2025년에 그레트헨의 올바른 길이 다소 진부해보일 수 있을지언정 그레트헨에게는 그녀 스스로 찾은 길이므로 그것을 비난하기는 어렵다. 파우스트는 그레트헨을 만나 다양한 층위의 감각을 경험하면서 '직접 경험하는 것이 진짜로 아는 것이며 글자는 그 다음으로 오는 것'이라는 생각을 직접 경험함으로써 그의 생각을 진짜로 알게 되었다. 파우스트의 구원은 2부에서 이루어지기에 1부에서 속단할 수는 없지만, 언어로 규정된 것 너머의 실재를 직접 경험하려는 의지는 보편적인 것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찾으려는 태도라는 점에서 분명 올바른 길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 '의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는데, '진짜'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의지라는 것에 직접 닿을 수는 없겠지만 자신이 아는 것을 의심하고 그것을 직접 경험함으로써 답을 찾는 과정에서 그 의지에 대한 믿음과 공존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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