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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소 Nov 02. 2020

때릴 데가 어딨어서 때렸을까

맞을 짓이라는 건 없다 

중학교 때다. 나는 예술 중학교를 다녔는데, 우리 반에는 여리여리한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한국 무용을 전공하고 있었고, 우리 반은 일명 "무용반"으로 발레, 한국 무용 전공을 하는 학생들이 모여있었다. 


오후 3-4시까지 학과 수업을 하고 오후 늦게까지, 또는 저녁까지 무용 수업을 했다. 오전 일찍 부터 저녁까지 학교에 매어있고, 주말에는 따로 무용 수업을 듣는 등,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예술 꿈나무의 삶이었다. 


우리는 아릅답고 우아했다. 풋내가 아직 나는 10대 소녀들이었지만, 우리는 서울에서 또는 각 지방 지역에서 영재들로 추앙받고, 가족들의 기대를 한껏 품고 이 곳에 와 있었다. 세, 네살부터 다들 무용을 시작해서 개인적으로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놀거나 무언가를 실컷 먹거나 해보지 못한 여느 십대 소녀들과는 아주 많이 다른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 일년에 한번 있는 예술제라도 있을 적이면, 저녁 늦게까지 무용을 연습하고, 기진맥진해서 버스를 타고 집에 갔던 기억이 난다. 버스를 탔는데, 서서도 사람이 졸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그러다 문득 버스 오디오에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하는 노래가 나오는데, 나는 무릎을 꺾어가며 졸다가 들은 그 노랫말에 펑펑 울었다. 종종 내릴 곳을 놓치고 버스 종착역까지 가기가 일쑤였는데, 거긴 정말 논밭만 있어 가로등 불빛 하나 없고, 인적도 없어 내가 오늘 여기서 무슨 일이 나 죽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무서웠던 적도 있고. 


그러다가도 다음 날 학교에 가면 소녀들은 모여서 왁자지껄했다. 우리는 매점은 잘 가지 않았는데, 간식 때문에 살이 찌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급식 때도, 발레부 얘들은 음식을 씹어서 그 물만 삼키고 찌꺼기는 뱉어냈다. 나이가 열네살, 열다섯살이 되어도 생리가 시작되지 않는 친구들이 많았고, 심지어 생리가 시작되어 키 성장이 멈출까봐 클리닉에서 생리를 늦추는 주사나 한약을 먹는 얘들이 많았다. 그래도 우리는 만나면 즐거웠다. 쉬는 시간엔 선생님 앞에선 못할 아무렇게나 막춤을 추면서 신나게 웃어댔다 




운동회가 끝나고 난 다음날이었다. 우리는 왠지 조금 들떠있었다. 몇몇 친구들이 수업이 시작돼도 근처 숲에서 낙엽을 보며 과자를 먹고 있는 것을 봤지만, 모른척했다. 선생님이 물었다. 


다들 어디갔어?!


반에 있던 친구들은 다들 모르는 둥 했다. 


빨리 말 안해?!


당시 반장이었던 나를 유독 노려보며 담임 선생님이 소리쳤다. 나는 침묵했다. 그 순간 친구들이 꺄르륵하며 교실 안으로 들이닥친다. 으휴.. 분위기가 그게 아닌데. 눈치도 없어. 


너네 여기 한 줄로 서. 


발레부 친구들이 두려운 눈을 하고 교탁 옆에 나란히 섰다. 


반장, 가서 빗자루 가져와. 


친구들이 두려운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님아, 그 빗자루를 가져오지 마오. 선생님이 야속하다. 왜 나를 폭력에 가담을 시키나. 죄책감으로 어깨가 자꾸만 쪼그라든다. 나는 말 잘 듣는 반장이 으레 그렇듯 아무말 없이 일어나 빗자루를 갖다 바쳤다. 그리고 그 선생님은 그 아이들을 한 명씩 돌아가며 손바닥을 그 빗자루로 세게 세번씩 내리쳤다. "아!!" 아이들이 고통에 소리쳤다. 선생님은 즐거워보였다. 사람을 때리는 것이 가벼운 것이 아닌데, 하루 하루를 힘겹게 견디는 우린데, 몸이 악기인 우린데, 일말의 죄책감이 없어 보였다. 그런 우리를 때리면서. 




맞을 짓이라는 건 없는데, "너희가 수업에 늦은 건 맞을 짓이고, 본보기를 보여야 해" 라고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긴 선생님이 나는 너무 공포스러웠다. 선생님의 권위로 아이들이 왜 낙엽을 보면서 과자를 먹는 여유를 조금이라도 부린 것을, 선생님의 마음대로 움직이진 아이들을, 때려도 된다라고 자신의 폭력을 타당하게 여긴 것이 지금 생각하면 참 역겹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선생님이 지금 하시는 행동은 잘 못 되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고, 눈 앞의 권위에 나도 굴복을 했다는게. 예술 학교는 예술적 창의력을 천재성으로 쳐주는데, 그런 곳에서 학교 근처 숲의 유독 아름다웠던 가을의 변화를, 잠시 넋 놓고 바라 봤던 무용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어떤 권위로 해할 수 있을까. 학교라는 곳이 군대와 비슷해서 (아직도),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이 선생님이 되어서 "질서"와 "규율"을 강요하는 곳이라는 게 지금 생각해도 얼마나 안타까운지. 찬란하게 아름답던 우리에게 몽둥이를 휘둘러대며 입가는 미소를 짓던 그 선생님은 지금은 본인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까. 소나기가 쏟아지던 거리를 우산 없이 내달리던, 마냥 즐겁던 우리를 때리던 그 선생님, 선생님들은. 어떤 이유에서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고, 맞을 짓은 없다는 것을, 상대가 내 뜻대로 되지 않고, 나와 동등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을 때 벌어지는 것이 폭력임을 이 사회가 점점 더 알아가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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