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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여행] 사람의 도시 ‘베네치아'

[유한한 영국생활자의 틈만 나면 떠나는 여행기] 이탈리아, 베네치아

by 노현지


저기 멀리 베네치아라는 곳은 온 도시가 물이라 사람들이 배를 타고 다닌대.


유명한 ‘물의 도시’ 베네치아(Venezia)는 그 도시에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아도 어릴 때부터 저절로 들려왔고, 그래서 익숙했다.

그러나 내 눈으로 직접 본 베네치아는 그 동안 내가 들은 것들, 그래서 익숙하다 여겼던 생각들을 무용하게 만들었다. 그 도시에는 전설처럼 근사하게 부풀린 풍문으로도 다 품을 수 없고, 보지 않고는 상상할 수 없는 고유한 생경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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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에서 열심히 고속도로를 달려, 이탈리아 본토에서 베네치아로 연결된 해상 도로를 건너, 베네치아 본섬 초입에 도착했다. 우리의 바퀴 달린 렌터카에 허용된 베네치아는 딱 여기까지. 베네치아 안에서는 차가 다닐 수 없기에 섬 초입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트론체토(Tronchetto) 정류장'에서 수상버스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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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류장을 떠난 버스가 빠르게 물살을 갈랐다. 이윽고 저 멀리, 다양하고 넓은 세상이란 무대를 꿈꾸기 위해 ‘세상의 이런 일이’ 같은 느낌으로 들어온 물의 도시, 베네치아(Venezia)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의 도시에는 바다와 땅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해변도, 물속에서 우뚝 솟은 해안절벽도 없었다. 대신 바다 위에 수평으로 펼쳐진 땅, 바다와의 경계를 따라 줄지어 서 있는 수많은 건물들, 건물 앞으로 길게 뻗은 인도와 그 위를 무심히 걷는 사람들. 인도 너머는 바닥도 보이지 않는 깊은 바다였다. 그 깊고 넓은 바닷길을 가운데 두고 방금 본 장면과 유사한 또 다른 건물, 집, 인도 등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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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의 바닷물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작은 물길로 이어져, 도시 구석구석을 촘촘하게 돌아 흘렀다. 그 물 위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쉼없이 떠다녔다. 바닷물이 도로를 완전히 대체하는 도시.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물 위의 도시, 아니, 물 위에 떠 있는 도시였다. 그것도 아니었다. 땅 대신 물을 근원으로 삼아 물 위에 뿌리 내린 도시처럼 보였다. 초록빛 바다 위에 잔잔하게 연결된 베이지 색감의 건물들, 그 사이로 뾰족하고 둥글게 솟아난 성당, 유려하게 바다를 가로지르는 배가 만들어 내는 하얀 물보라, 바닷물 위로 눈부시게 빛나는 햇빛, 아름다웠다. 내 생에 이런 풍경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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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세상에, 이런 도시가 있다고? 이게 가능하다고?? 말도 안돼.”


낯설고 새롭고 그래서 벅차 오르는 풍경 앞에서 눈 앞에 버젓이 존재하는 도시를 부정하는 진부한 감탄법 밖에 할 줄 모르는 나의 표현력은 초라했다. 그러나 ‘말도 안돼’라는 말의 절반은 진심이었다. 배가 다가갈수록 점점 가까워지는 베네치아를 향해 문득, 이 섬의 생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럼 이 섬은 배들이 다니는 뱃길 부분이 물에 잠겼다고 봐야 하는 건가? 그러면 베네치아 섬의 땅은 건물이 있는 부분은 위로 솟고 배가 다니는 부분은 아래로 꺼지는, 엄청 울퉁불퉁하고 구불구불한 모양이겠다. 그런데 이렇게 물 위로 솟은 부분(건물들이 있는 부분)이 평평하다고? 그리고 이렇게 촘촘하게 구불구불 꺾이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도 안돼.”


베네치아에 대해 이렇다할 사전 공부 없이 온 게으른 여행자의 의문은 다시 현실 부정의 감탄으로 귀결되었다. 이어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그런데 왜 베네치아 사람들은 이탈리아 넓은 땅을 두고 굳이 힘들게 이런 희한한 모양의 땅으로 와서 배를 타고 불편하게 살기 시작한 거지?”


이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땅의 모양이 그리 생긴 것은 자연의 섭리이니 인간이 받아들일 수 밖에 없지만, 이런 땅에 정착한 삶은 그들의 의지였다. 아마도 이 이유를 알면 베네치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이곳저곳에서 참고한 정보에 따르면, 베네치아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섬이 아니라 인간이 간척 사업을 통해 만들어낸 도시라고 한다. 오래 전 로마 제국이 쇠락하여 야만족들의 침략이 거세지자 이를 피해 일부 로마인들이 현재 베네치아가 있는 해안까지 도망쳐 왔고, 그들에 의해 베네치아가 형성되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애초에 베네치아가 있는 자리는 석호 지형으로 몇 개의 무른 진흙 섬이 있는 습지대에 불과했다. 침략자의 위협을 피해 땅끝까지 밀려간 로마인들은 그 무른 지형 위에 물 속에서도 잘 썩지 않는 오리나무 기둥을 박아 넣고, 점토를 부어 굳히고, 석회암 판을 깔아 단단히 땅을 다졌다. 그 이후로 수없이 오랜 세월 동안 사람과 바닷물이 함께 흘러 지금의 베네치아가 되었다.

이 크고, 기이하고, 아름다운 섬이 자연의 작품이 아니라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니. 이것이야 말로 말이 안됐다. 그러나 넓은 바닷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뻗은 건물들이, 내리쬐는 햇살에 더욱 환하게 눈부신 건물들이 온 몸으로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더 이상 도망갈 곳 없는 해안가에 다다라 무른 진흙 위에 살아갈 터전을 직접 만들어야 했던 사람들의 절박함과 간절함이 만든 땅. 알프스 꼭대기에서부터 베네토(Beneto) 평야(베네치아 인근의 평야)로 흘러온 퇴적물처럼 긴 시간 이 땅 위에 누적된 사람들의 삶이 저 멀리 이탈리아의 온화한 오후의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베네치아의 생경한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에 경이로움이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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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탄 수상버스가 서서히 인도 가까이로 붙어 버스 정류장에 멈췄다. 아마도 베네치아에서 가장 유동인구가 많을 ‘산 마르코(San Marco)’ 정류장, 드디어 베네치아에 발을 딛었다. 좌우로 흔들리는 배에서 내려 선 버스 정류장 역시 꿀렁꿀렁 출렁였다. 정류장을 걸어 나와 바닥이 단단한 인도를 밟았다. 외세의 침략을 피해 도망친 사람들이 절박함과 인고로 일구어 낸 땅이라 생각하니, 어쩐지 뭉클했다.


20220417_151326.jpg < '산 마르코' 정류장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 >


아름답고 특이하기로 소문난 도시답게, 베네치아 거리에는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수상버스에서 방금 내린 사람들, 거리를 구경하는 사람, 길가의 야외테이블에 앉아 음료를 마시는 사람들, 거리의 예술가와 그들과 어우러져 춤을 추는 사람들 등등. 아이들의 손을 놓칠까 걱정이 될 정도로 거리가 복잡하고 어수선했지만, 나도 모르게 자꾸 웃음이 났다. 세상에 다시 없을 것 같은 이곳, 밝은 표정의 사람들, 아름다운 날씨 그리고 흥겨운 음악. 처음 만난 베네치아는 축제 같은 얼굴을 띠고 있었다. 베네치아의 ‘말도 안되’는 풍경과, 배를 타고 들어오면 찾아본 베네치아의 뭉클한 역사, 또 축제 같은 얼굴 덕분에 이전의 이탈리아 여행에서 불편했던 감정들이 바닷물에 씻겨 녹아내리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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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제 처럼 즐거운 베네치아 도시 풍경 >



베네치아에서 우리의 여정은 조금 자유로웠다. 앞서 여행한 로마나 피렌체 등에 비해 ‘꼭 보아야 할’ 혹은 ‘꼭 보고 싶은’ 명소들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아니, 적었다기 보다 ‘베네치아’, 이 도시만으로 이미 충분해서, 베네치아 위를 걷고 보고 들을 때 전해지는 분위기, 그 자체를 가득 담아가고 싶었다.

그리하여 유명한 관광지를 찾아 바삐 움직이는 대신, 우리는 베네치아를 걷고, 보았다. 힘이 들면 광장이나 물길과 맞닿은 인도 끝에 앉아 쉬었다. 그러면 베네치아가 더욱 자세히, 찬찬히 눈에 들어왔다. 물론 인도 끝 지점이 바로 바다로 이어져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Chiesa di Dan Giorgio Maggiore)’ 앞 작은 광장에서 아이들이 전력질주를 하며 술래잡기를 할 때는 철렁 내려 앉은 심장이 바닥을 뚫고 최초의 정착민들이 박아 두었을 나무 기둥에까지 가 닿을 듯 했지만, 그런 스릴의 순간 마저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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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해가 뜨겁게 올라 한낮을 향해 달려가면 바닷가를 따라 놓여 있는 수많은 카페 테이블 중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주홍빛 투명한 스프릿츠(Spritz) 한 잔을 주문했다. 상대적으로 인파가 적었던 베네치아의 남쪽 ‘자테레(Zitelle) 지구’의 한 카페 야외테이블에 앉아, 바닷길 너머로 보이는 베네치아의 또 다른 풍경을 액자처럼 눈 앞에 펼쳐 두고, 차가운 얼음과 보글보글 탄산이 선사하는 청량감에 상큼한 레몬과 알싸한 알코올이 더해지면, 낙원이 여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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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발이 힘을 잃는 저물 무렵 산 마르코 광장에서 마시는 에스프레소는 입술을 조금씩 축여가며 아껴 마셔야 했다. 카페 야외 테이블에 앉아 클래식 악기 연주자들이 라이브로 연주하는 음악을 배경으로 깔고, 웅장한 산 마르코 대성당과 종탑, 광장을 빙 둘러 서 있는 날렵한 직선의 건축물을 여유롭게 즐기기에 에스프레소의 양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이카페의 에스프레소가 한 잔에 11유로(약 15,000원)로 아주아주 비싸기 때문이다. 산 마르코 광장 카페가 오랜 역사를 가진 유명한 카페(오케스트라 비용까지 포함 되었으리라.)라 특별히 비싼 탓도 있지만, 베네치아는 전체적으로 물가가 비싼 편이다. 커피 뿐 아니라 모든 것이 비싼 관광도시이지만, 아름답고 희소한 도시 풍경은 그런 불만마저 불식시켰다. ‘내가 언제 이런 곳에 또 와 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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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8_173934.jpg < 베네치아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몰리는 '산 마르코 광장'과 '산 마르코 대성당' >




베네치아는 도시 전체가 특별하다. 그러나 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역시나 ‘길’이다. 도시의 중심 대로 역할을 하는 운하도 멋스럽지만, 좁은 골목골목으로 흐르는 물길이 정말 아름답고 인상적이어서 앞으로 전진하기가 힘들다. 내 앞에 걸어 가던 사람이 계속 발길을 멈춰 사진을 찍고 있기 때문이요, 그 사람이 떠나면 이번엔 내가 멈춰 사진을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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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8_134345.jpg < 베네치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그림 같은' 좁은 물길 >


건물과 건물의 벽면 사이를 흐르는 물길. 그 길을 건너려면 작은 다리를 건너야 한다. 베네치아에는 그런 다리들이 셀 수 없이 많다. 다리는 길과 길을 연결할 뿐 아니라 때론 건물과 바로 이어져 있다. 그런 건물은 문을 열면 바로 앞이 물이다. 그런 집들을 실제로 보면 너무 신기해서 그저 웃음이 난다.

20220418_204152.jpg < 건물 출입구와 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


길과 길, 집과 길을 연결하는 베네치아의 다리는 아래로 배가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가운데가 볼록 솟아 있고, 다리 아랫면은 둥근 아치형으로 되어 있는데, 그 모습이 우아하고 고풍스럽게 느껴져 다리 위에는 늘 포즈를 취하는 사람이, 다리 아래편에는 사진을 찍어 주는 사람이 있다. 너무 예쁜 풍경 사진 속에 ‘나’를 함께 넣고 싶은 여행자의 마음을 알기에 다른 여행자들이 사진을 찍을 동안 잠시 다리 아래서 기다려 주기도 하고, 가족 사진을 대신 찍어 줄까 서로 묻기도 하는 베네치아. 아름다운 곳은 사람의 마음도 푸근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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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8_104714.jpg < '베네치아'스러운 우아한 다리, 나도 한 번 올라서서 찍어 보았다 >


이 특별한 물길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우리가 베네치아로 들어오기 위해 타고 들어온 수상 버스와 택시, 자가용을 대신할 것으로 추측되는 보트 등이다.

베네치아의 수상 버스는 육지의 버스처럼 많은 사람을 한번에 태워야 하기 때문에 크다. 외관 역시 실용성에 중점을 두고 있어, 흔히 보는 여객선 형태이고 내부에 나란히 배치된 좌석에 앉아 있으면 살짝 낡은 마을 버스를 타고 있는 듯 익숙한 느낌을 받는다. 먼지가 묻어 뿌옇게 얼룩진 창문마저 그렇다. 그러나 이 일반 버스 같은 모습이 창 밖의 바다 풍경과 합쳐지면 완전히 얘기가 달라진다. 마치 내가 늘 타던 버스가 갑자기 물 위를 달리고 있는 듯한 착각. 수상 버스 내부가 일반 버스처럼 익숙한 모습이라 더욱 기묘하게 도드라지는 이질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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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8_110214.jpg < 베네치아의 버스. 사람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 우리의 일반 버스의 모습과 비슷하다. >


수상버스와 함께 또 다른 대중 교통수단으로 수상택시가 있다. 외형이 큰 수상버스는 좁은 물길 구석구석까지 닿을 수가 없기에 보통은 큰 바닷길에 있는 수상버스 정류장에 내려 골목길을 걸어 다니는데, 좀 더 빠르게 내가 원하는 좁은 물길 안까지 가고 싶을 때 이용하는 것이 수상택시다. 우리가 택시를 타는 이유와 동일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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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와 택시. 우리는 ‘수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신기해 하지만 이곳의 사람들에게 그냥 ‘버스’와 ‘택시’로 불릴 것이다. 오로지 물길로만 교통수단이 다니는 베네치아에서는 ‘수상’이란 말로 다른 것과 구분을 지어야 할 이유가 없으므로. ‘다른 모습’이지만 ‘같은 목적’과 ‘같은 이유’를 가지고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버스’와 ‘택시’에서 즐거운 축제 같은 여행지 베네치아가 아닌, 이곳 사람들의 일상이 느껴졌다.

버스 창문을 통해 베네치아 사람들의 일상을 생각하고 있을 때, 노란색 작은 보트가 물살을 가르며 건물들 사이 좁은 물길로 빠르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물길 안쪽에서 나오던 곤돌라가 덩달아 속도를 붙여 다급하게 길을 비켜 주었다. 노란색 보트는 눈 깜짝할 사이 건물들 사잇길로 빨려 들 듯 사라졌다. 그 노란색 보트는 앰뷸런스(Ambulance)였다.


“와! 저기 저 배, 앰뷸런스야! 앰뷸런스마저 배라니. 와~ 진짜 너무 신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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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도로가 없는 도시이고, 버스도 택시도 모두 배이니, 구급차 역시 배인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외지에서 온 이방인으로써 생각지도 못한 노란색 ‘구급선’은 베네치아의 독특함을 또 한 번 드러냈고, 동시에 이곳에도 생명과 위험, 죽음 등의 ‘삶’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특별함은 베네치아의 가장 좁은 물길까지 닿지 않는곳이 없는 ‘곤돌라(Gondola)’일 것이다. 곤돌라는 베네치아인들의 전통적인 이동 수단이었으나 현재는 베네치아의 특별함을 즐기기 위한 여행객들이 주요 이용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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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7_174326.jpg < 베네치아 좁은 물길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곤돌라 >


베네치아의 좁은 물길 위로 저 멀리 곤돌라가 모습을 드러내면 잔잔하던 초록빛 물길이 조용히 깨어나 일렁인다. 곤돌라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면 일렁이는 물길은 어느새 낭만이 되어 여행자의 마음 속으로 흘러 든다. 베네치아에 왔으니 우리도 곤돌라를 타고 그 낭만 위를 노닐어 볼까.

베네치아의 곳곳을 누비는 곤돌라는 탑승하는 장소도 곳곳에 있어 미리 예약을 한다거나 오래 기다릴 필요 없이 쉽게 탑승이 가능했다. 4인 가족(성인 둘, 아이 둘)이 약 30분간 타는 가격이 대략 50유로(약 7만원. 기본 가격은 80유로이나, 탑승하는 인원에 따라 유동적으로 운영되는 듯하다.). 적은 비용은 아니지만 베네치아까지 가서 놓칠 수 없고, 또 타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곤돌라였다.

물길을 항상 길 위에서 혹은 다리 위에서 내려다 보기만 하다가, 물 위에 앉아서 올려다 보는 베네치아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우선 곤돌라가 매우 우아하고 고풍스러웠다. 긴 바나나처럼 생긴 붉고 검은 곤돌라는 벨벳 카펫, 또 황금색 조각상 등을 이용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어찌 보면 장식이 너무 화려해서 오히려 촌스럽다거나 부담스럽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베네치아를 향해 이미 마음이 활짝 열린 여행자에게는 이 화려한 장식 또한 이국의 낭만이었다.


20220418_160341.jpg < 베네치아의 낭만을 즐길 손님을 기다리는 곤돌라와 사공 >


파란 끈이 달리 밀짚모자를 쓴 뱃사공이 노를 힘껏 젓자 곤돌라가 물 위로 미끄러졌다. 다른 이들이 타는 것을 볼 때보다 직접 탄 곤돌라는 많이, 쉽게 출렁거렸다. 조금만 잘못하면 좁고 긴 배가 뒤집힐 것 같은 아슬아슬함. 그래서 처음 곤돌라에 오를 때 뱃사공이 직접 우리 가족 각각의 자리를 지정해 주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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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돌라에 앉아서 올려다보는 베네치아는 훨씬 높고 아득했다. 인도 옆이 아닌 건물의 벽과 벽 사이의 물길 위에 우리가 탄 곤돌라만 흐를 때는 출렁이는 물의 리듬과 함께 다른 시간 속을 떠다니고 있는 듯했다. 물길을 향해 난 누군가의 테라스 앞을 지날 때는 뭔가 은밀한 기분이 들었다가, 세 개의 물길이 만나는 삼거리에서는 몰려든 곤돌라가 서로 부딪히지는 않을까 살짝 긴장됐다. 베네치아의 물길 위에도 삼거리가 있고, 교통 체증, 아니 곤돌라 체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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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매일 세월을 거슬러 베네치아의 전통을 젓는 뱃사공들에게 이런 혼잡쯤은 아무 것도 아닐것이다. 사공들은 배를 건물 벽으로 붙여 상대의 배가 지나갈 수 있게 길을 내어준 뒤, 노련한 발동작으로 벽을 밀어 배를 다시 물길 가운데로 돌렸다. 긴 곤돌라가 방향을 틀어야 할 때도 마찬가지로 발을 사용해 벽을 짚는 반동으로 배를 움직였다. 경험과 연륜이 묻어나는 사공들의 무심한 듯 힘찬 동작이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좁은 물길을 따라 곤돌라를 타고 베네치아의 아기자기한 뒷골목 풍경을 구경했다면, 대운하에서는 베네치아 중심부를 관통하여 흐르는 넓은 물길을 만날 수 있다. 수상버스를 타고 직접 대운하 위를 흘러봐도 좋지만, 대운하를 도보로 건널 수 있는 유일한 다리인 ‘리알토(Rialto)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베네치아 대운하 전경은 한 폭의 그림 같다. 실제로 대운하는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들의 손에 의해 캔버스 위에서 재탄생한 베네치아 대운하 전경은 현재까지도 유럽의 여러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 때문인지 리알토 다리 난간을 빼곡히 채운 사람들 사이에 간신히 자리를 잡고 서서 대운하를 바라 보는 순간, 처음인데도 너무 익숙한 풍경에 나도 모르게 소리 높여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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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그래 딱 이 풍경이야! 베네치아 하면 이 장면이지!!”

미술관이나 책, 액자 등에서도 많이 접했지만, 특히나 지난 달 런던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에서 본 카날레토(Canaletto)의 베네치아 대운하 그림(<대운하에서 펼쳐지는 레가타>)과 꼭 닮은 생생한 풍경에 반가움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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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날레토의 그림(좌)과 꼭 닮은 직접 찍은 베네치아 대운하 전경(우), (그림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




그러나 베네치아에 물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물길과 물길 사이의 땅, 그러니까 건물들이 세워져있는 땅은 걸어 다닐 수 있는, 아니 걸어 다녀야만 하는 ‘길’이다. 그리고 이 땅 위의 길들이 베네치아의 또 다른 매력 포인트다. 이 길들은 모두 골목길 정도의 넓이인데, 넓으면 양방향 1차로만 하고, 좁으면 성인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만 한 아주 좁은 골목도 있다. 또한 이 길들은 건물을 돌고 돌아 꺾이고, 또 서로 엉키듯 연결돼 있어서 마치 미로(Maze) 속을 걷고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길과 건물들의 생김은 또 얼마나 비슷한지. 이 복잡한 길 때문에 어떤 여행자들은 베네치아에서 길을 헤맸다는 불평과 길을 찾다가 부부 싸움을 하기도 했다는 증언을 토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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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네치아의 또 다른 매력, 미로 같은 골목길 >


요즘 갈수록 성능이 좋아지는 모바일 길찾기 기능을 쓰면 될 것 같지만, 훗, 한 번 와서 겪어 보면 지도와 실제 길을 매치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더하여 지도가 알려주는 길이 너무 좁고 어두워서 과연 이 길이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이 맞나, 저 길 끝은 막다른 길처럼 보이는데 들어가도 되나 싶은 불안감이 생겨날 때도 있다. 그래서 우리의 ‘베네치아 미로 체험’은 어떠하였느냐. 매우 다행스럽게도, 우리 가족의 ‘검색봇’이자 ‘네비게이션’인 남편의 섬세한 감각으로 한두 번 같은 길을 오간 것을 제외하면 비교적 많이 헤매지 않고 원하는 곳에 닿을 수 있었다. 이런 복잡한 검색을 귀찮아하는 나는 남편이 없었다면 베네치아 골목 여행은 포기하고 광장이나 해안가에 앉아 스프리츠만 계속 마시지 않았을까(음, 이것도 나쁘진 않을 듯하다. 하하.).

20220418_134554.jpg < 두 아이와 귀차니스트 부인을 이끌고 늘 혼자 길찾느라 애쓰는 고마운 남편 >


이 미로 같은 베네치아의 골목을 걷다 보면 무대세트 같은 분위기 때문에 현실감각이 사라지기도 하는데, 특히 화려하게, 정말 화려하게 장식된 가면들이 진열된 수많은 가면가게들은 이 몽환적 감각상실을 더욱 강화한다. 입이 딱 벌어지게 멋스럽기도 하고, 몸이 움찍거릴만큼 기괴하기도 한 가면을 파는 상점이 베네치아 거리에 왜 이토록 많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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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네치아 거리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가면들 >


베네치아는 ‘가면 축제(사육제)’로도 유명하다. 12세기경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시작된 가면 축제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2월경이면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축제이자, 세계 3대 사육제로 꼽힐 정도로 대규모의 가면 축제가 베네치아를 화려하고 뜨겁게 달군다고 한다.

그러나 이 화려한 가면 뒤에는 슬픈 억압의 역사 또한 존재한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유럽 중세시대는 철저한 계급 사회였다. 지배계급에 의해 착취 당해 늘 가난하고 억압된 삶을 살던 베네치아의 피지배계층은 일년에 딱 한 번 이 분노와 한을 표출할 기회를 얻었다. 바로 계급에 상관없이 모두 가면을 쓰는 사육제 기간. 이 기간 동안에는 휘황찬란한 가면 뒤에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기면 누구나 귀족이 될 수 있었고, 귀족을 조롱해도 처벌 받지 않았다. 가면 뒤에 숨어서야 토해낼 수 있던 울분, 그것도 한정된 사육제 기안 안에, 지배계층의 허락 하에 가능했던 순박한 한풀이만으로도 다음 일 년을 버틸 위안을 얻었을, 혹은 체념하는 법을 배웠을 피지배계층의 서러움이 표정 없는 가면만큼이나 슬프게 다가왔다.

생경해서 아름다운 베네치아에서의 우리의 여행이 거리를 걷고, 물길을 따라 흐르는 여유롭고 가벼운 여정이었지만, 이 여정을 통해 알게 된 베네치아의 이야기와 그것을 향한 감상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현재의 베네치아가 보여주는 얼굴이 아름다울수록 그 아래에 퇴적물처럼 쌓인 정착민의 절박함과 가면 뒤의 피지배계급의 울분이 더욱 깊게 울렸다. 비록 지금은 지나간 과거의 슬픈 역사일지라도 말이다. 과거의 아픈 삶 덕분에 지금의 베네치아의 삶이 아름다울 수 있는, 역사라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베네치아를 떠나는 날 아침. 처음 베네치아 도심으로 들어올 때 수상버스를 탔던 ‘트론체토(Tronchetto) 정류장’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아름답고 깊은 도시를 떠나는 것이 아쉬워, 멀어져가는 베네치아를 마지막까지 오래오래 지켜볼 수 있는 배 후미의 야외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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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바닷길을 힘차게 밀어내며 떠나는 배 뒤로 바닷길과 인도의 경계에 세워진 나무 기둥들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베네치아에 도착했을 때부터 궁금했던 기둥들이었다. 당연히 선박을 묶어 두는 기둥이겠거니 생각했지만, 인도를 따라 쭉 늘어선 기둥의 개수가 꽤 많고 어딘가 규칙성이 있는 것이 눈길을 끌었다. 인접한 기둥을 따라 선을 연결하면 사각형이 될 것 같은. 뭔지 알 듯 말 듯한 시선 끝에 인도에 서 있는 작은 보트 한 척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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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개의 나무 기둥 가운데 아담하게 자리잡고 동동 떠 있는 보트. 인도를 따라 쭉 늘어선 기둥, 특히 구역을 구분하듯 네 개씩 열을 맞춰 늘어선 기둥은 다름 아닌 배들의 주차 구역이었다. 땅 위에 기둥을 박아 배를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육지의 많은 나라들이 도로에 흰 선을 그어 주차 공간을 표시해 두듯 베네치아의 주차장은 바다 위에 긴 기둥을 박아 배를 정박할 공간을 표시했다. 작은 배를 세워 둘 곳은 좁게, 큰 배가 정박할 곳은 넓게 나무 기둥의 간격도 조금씩 달랐다. 노란색 앰뷸란스를 발견한 순간처럼, 생각해 보면 당연히 필요한 정박 공간이면서 동시에 생각지도 못 했던 배들의 주차 풍경 덕분에 마지막까지 신선한 충격을 안고 베네치아에서 멀어져 갔다. 떠나는 순간까지 우리와 ‘다른 모습’으로 ‘같은 삶’을 보여주는 베네치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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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느 마을의 일상처럼 벤치에서 휴식을 취하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베네치아인들 >


완전한 섬도 아니고, 완전한 바다도 아닌 땅에 사람의 손으로 뿌리를 내린 '사람의 도시', 베네치아. 아쉽게도 태생적으로 무른 베네치아의 지반은 매년 조금씩 내려앉고 있다고 한다. 언제 또 이 아름다운 섬에 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처음 이 무른 땅에 도시를 세운 기적처럼 가능하면 오래오래 베네치아가 이 지구상에 존재하길 바랐다. 두고두고 기억할 생경하고 경이롭고 아름다운 베네치아이기에.



[유한한 영국생활자의 틈만 나면 떠나는 여행기] 이탈리아, 베네치아 - 사람이 만들어낸 기적, 물의 도시 ‘베네치아’ 편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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