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질문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다. 아니,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다. 그러나 이 생각은 호기심이 없으면 발현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으면 궁금한 것이 없어진다. 삶이 무료해진다. 호기심 천국. 말 그대로 호기심덩어리가 되면 세상은 천국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왜 인간은 굳이 교육이라는 체계를 통해 생각하고 질문하는 방법을 배우는 걸까.
뒤집어 말해 보자. 인간이 생각하지 않고 질문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문명과 문화는 인간이 생각하고 사유한 결과물이다.
철학은 삶과 세계를 밝히는 학문이다.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서 시작해 생각이 깊어질수록 인생 전반에 대해, 가치에 대해, 진리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이런 다양한 고민들 모두가 사실은 철학적 사고라고 말할 수 있다.
배운다는 것은 참으로 매력적이며 환상적인 작업이다. 배운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고 생각한다는 것은 삶과 세계의 지평이 넓어진다는 뜻이다.
철학적 사고란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시작된다. 질문은 또다른 질문을 부르면서 단단한 고리를 형성한다. 이 뫼비우스의 띠 같은 질문들의 합이 나의 한 생을 헐겁게도 단단하게도 만든다.
니체의 철학은 실존주의 철학이다.
그는 19세기를 살면서 전쟁과 자본주의가 횡행하며 교회를 무너뜨리고 법과 종교가 사람들을 억압하는 모습들을 목격했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절망을 느껴도 종교는 배고픔을 해결해 주지 못했다. 그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구도가 인간들에게 '노예도덕'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간파하였다. 그는 삶의 주인이 법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고 종교도 아닌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이 있다면 세계가 그처럼 불합리하고 불평등할 수 없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한 니체는 위버멘쉬에 이른다.
살면서 겪게 되는 온갖 불합리와 고통 속에서 니체는 그럴수록 세상을 능동적으로 극복할 대안을 찾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현실에 사로잡혀 안주하는 인간형을 '최후의 인간'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고 보았다. 자신을 체험하면서 그 체험에 대해 깊이 몰두함으로써 그 체험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지, 그 체험을 통해 우리가 어떤 존재로 변화하고 있는지 더 깊이 들여다보기를 원했다. 철학의 궁극적 과제가 결국 투철한 '자기 인식'에 있다고 본다면 니체는 우리 자신을 기준으로 삶과 상황을 어떻게 들여다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적확한 도구를 우리에게 주고자 노력했던 철학자였다.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 무엇을 기준으로 선과 악을 구별하는가. 지금까지의 도덕 평가의 기준은 누구를 기준으로 한 것이었는가. 그는 선한 것 자체는 없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을 해석학적 존재로 파악한다.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그 고통이 지닌 '의미'에 있다. 인간은 묻고 대답해야 한다. 그것도 능동적으로.
니체는 두 가지 인간형을 제시한다. 삶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주인과 수동적인 감정을 갖는 노예. 능동적인 감정을 갖는 주인은 늘 활동적active이며 자신을 중심으로 출발하여 타자에게 관심을 옮긴다. 즉 자신에 대한 긍정에서 출발해 타자에 대한 긍정이나 부정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수동적인 감정을 가진 노예는 반동적recative이며 자신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서 출발하여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가치 평가 체계를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세상을 나-중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타자-중심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삶의 주인은 오로지 나에서 출발해야 한다. 타자는 결코 나의 삶을 대신 살아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영원회귀하는 세상을 어느날 불현듯 깨닫는다. 그렇다면 늘 모든 것이 같은 상태로 회귀하는 것일까? 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헤라클리투스가 선언하듯 '만물은 유전하'고 있다. 판타 레이panta rhei. 즉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것이 되돌아오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되돌아오는 모든 것은 이전과 더이상 같지 않다. 지난해의 봄과 올해의 봄은 더이상 같은 봄이 아니다. 니체는 이 상태를 끊임없는 '생성'의 세계라고 표현한다.
'존재의 바퀴는 계속 돌고', '존재는 영원히 흐르고 이어지며', '존재의 집은 영원히 지어지'고 있다. 이것은 지속적으로 '힘에의 의지'가 서로 힘을 겨루는 대결의 장으로 수많은 힘에의 의지가 쉴 새 없이 서로 겨루고 경쟁하며 모든 것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화'함으로써 다른 '존재'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언뜻보면 어제의 나인 것 같지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between'에는 많은 사건과 사람들과 시간과 공간과 생각들이 개입된다. 따라서 나는 사실 어제의 나일 수 없는 것이다. 이 끊임없는 '생성'의 세계는 '변화'의 세계이고 '힘에의 의지'가 경합하는 현장이다. 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이며 '되어가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게 주어진 삶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힘에의 의지'를 쏟아부으면서 끊임없이 상황을 전복시키고 개선하고자 노력하는 주인으로서의 삶, 이것이 초인으로서의 삶이다. 니체는 이것을 위버멘쉬라고 부른다. 내 삶의 주인은 나다. 주인으로서의 나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존재다. 주인으로서의 나는 사랑과 창조와 동경과 별을 이야기하면서 살아간다. 최후의 인간, 노예로서의 인간은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에도 그저 만족하거나 체념하면서 살아간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보다, 낡은 가치를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꿈꾸기보다 현실에 안주하고 현실을 체념으로 받아들인다.
주인과 노예로서의 삶의 차이는 무엇일까?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다. 내면으로 시선을 돌려 내 안을 들여다 볼 줄 아는 삶. 거기에서 발견한 나를 극복하고 새로운 나를 창조할 줄 아는 삶.
"너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가치를 날마다 새롭게 만들어라. 창조하는 삶을 살아라. 그것이 대지의 의미이고 네 존재의 진정한 의미다."
대지의 의미란 무엇일까? 대지는 우리가 살아가는 실존적 장소를 말한다. 우리가 지금 처한 이 장소가 대지다. 이 장소를 벗어나 우리는 어디에도 갈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장소를 가장 멋진 장소로 만들어야 한다. 소망을 지니는 것은 좋지만 현실을 부정하면서 소망을 우선시하는 것은 기만일 수 있다.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소망이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대지를 천국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야 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해야 한다. 지금 이 자리, 지금, 여기를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라틴어로는 아모르 문디Amor mundi라고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이 세계를 사랑하라. 사랑하려면 부단히 움직여야 한다. 창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내가 서 있는 이 장소를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 엄청난 에너지가 없으면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니체는 이것을 '힘에의 의지'라 부른다. 이러한 긍정을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라 부른다.
쳇바퀴 도는 반복적인 삶과 일상이라는 삶을 같은 모습으로 무한 반복하는 우주적 영원회귀가 아니라 순간순간 다가오는 시간들을 온전히 새롭게 맞이 할 수 있는 설렘. 이것을 니체는 실존적 영원회귀의 삶이라 부른다.
늘 같은 것이 반복되는 것(우주적 영원회귀)처럼 보이는 이 삶이 사실은 늘 새로워지고 있는 중(실존적 영원회귀)임을 깨닫기를 니체는 우리에게 바란다.
끊임없는 변화가 진정한 삶이다. 우리의 삶은 지금, 여기를 경험하고 지금, 여기는 끊임없이 과거로 넘어가고 있다. 지금, 여기는 순간순간 완성되고 있다. 우리의 삶은 순간순간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창조되고 생성되며 변화하고 있다. 미래도 과거도 지금,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여기만을 살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를 어떻게 살 것인가. 니체가 말한다.
"질문하라! 늘 질문하라! 너의 삶은 지금 이 순간 완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너의 삶은 끊임없이 지금 이 순간 창조되고 있다. 그렇다면 너는 어떤 삶을 창조하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