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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신옥 Oct 06. 2023

해설자와 선수

~ 종료 휘슬이 불기까지 뛰어야 하는 선수들 ~

중국 항저우에서 아시안게임이 한창이다.

오랜만에 축구 중계를 보았다. 우리나라와 우즈베키스탄의 경기였다. 결승 진출이 달린 치열한 경기였다. 우리나라가 먼저 골을 넣으면서 승리의 예감에 시동이 걸렸다. 체력적으로 우세한 상대국과 경기를 치르느라 우리나라 선수들도 사력을 다하는 경기였다. 뽑히고 뽑혀서 나온 선수들 이건만 국제경기는 늘 만만치 않다. 거친 몸싸움으로 넘어지고 자빠지며 부상자도 나오고 상대국에서는 드카드를 받고 퇴장을 당하는 선수도 있었다. 한순간의 여유도 없이 온몸과 마음을 다해 싸우는 선수들을 보느라 애가 타고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우리나라가 2:1로 앞서고 있으니 더더욱 시간이라도 빨리 가길 빌어마지 않았다. 선수들의 지쳐가는 모습을 보는 후반 45분은 왜 이리도 길게 느껴지는지 더 애가 탔다. 해설자는 잠시도 쉬지 않고 입과 눈이 선수들을 따라다니기에 바쁘다. 특히 골인을 하려다 실패할 때나 공을 상대 선수에게 빼앗길 때마다 해설자는 음성의 고조 강약으로 분위기를 실감 나게 전달했다. 이렇게 해야 하는데 저렇게 했다면서 실수의 원인을 분석하고 평가하고 조언하기에 여념이 없다.          



중계방송 해설을 들을 때면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집에 TV도 없어 라디오 앞에서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서 숨을 죽이며 중계방송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어린 나는 참 안타깝고 답답했다. 왜 해설자가 선수로 직접 출전을 하지 않고 말로만 하는지 의문이었다. 해설자가 말하듯이 경기를 하면 우리나라가 승리하는 것은 따놓은 당상인데 말이다. 해설자가 이렇게 해야 하는데 저렇게 해서 경기가 제대로 풀리지 못하고 있다는 해설을 할 때마다 내 안타까움은 극에 달해서 속이 상하기도 했다. 듣다 못해 옆에 있던 가족들에게 항의를 했다. 우리나라가 이기기 위해서는 가장 유능한 선수를 뽑아서 출전을 시켜야 하는데 저렇게 잘 아는 해설자가 출전을 하지 않고 왜 그보다 못한 선수가 출전을 하느냐고 따졌다. 가족들은 폭소를 터트리며 대답했다. 해설자는 전문가이지만 이제 직접 몸으로는 경기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고 선수들은 몸으로 직접 싸우느라 해설을 할 틈도 없다고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나는 직접 뛸 수 없는데 왜 전문가인지 의문이 들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그제야 해설자와 선수에 대한 의문이 풀리고 이해를 하게 되었다.     



그때 깨달은 해설자와 선수에 대한 생각은 나이가 들면서 종종  우리 삶으로 대입이 되곤 한다.



우리는 모두 자기 삶의 선수들이다. 순간순간 긴박하게 움직이며 사력을 다하는 선수들처럼 우리는 모두 자기 삶을 위해 직접 싸워야 한다. 삶의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고 넘어지고 자빠지고 상처받으며 싸워야 하는 사람은 선수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수임을 망각하고 해설자를 자처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앉아서 남이 하는 것을 보면 잘잘못이 훤히 보일 때가 많으니 말이다. 그래서 남의 말을 너무 쉽게 하는지도 모른다. 평가도 지적도 충고도 판단도 앉아서 말로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말하기는 쉬워도 막상 직접 나서서 해보면 마음대로 되지 않은 것이 우리 삶이다. 그 자리에 가서 당사자가 되어서 해보면 생각처럼 말처럼 그렇게 쉽게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인데 우리는 남의 말에 신나게 열을 올릴 때가 많다.      



아무리 해설을 잘해도 경기의 승패는 선수의 몫이다.

해설자는 경기 승패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 선수의 고충을 어찌 해설자가 대신할 수 있을까. 선수들이 흘린 보이지 않은 땀과 눈물을 해설자가 얼마나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자기 삶의 선수이면서 다른 사람의 삶에는 차라리 응원을 해줄 수 있을 뿐이다. 수많은 관중석의 응원은 선수에게 힘이 될 수 있지만 해설은 말 그대로 해설일 뿐이다. 그렇다 해서 해설자를 비판하려는 심사는 아니다. 시청자의 이해를 돕고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해설자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경기에서 해설자는 핵심도 아니고 절대자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경기를 직접 감당해야 하는 당사자는 선수이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 직접 뛰어야 하는 선수이다.

내 삶의 선수로서 치열하게 살아가야 할 뿐이다. 나이가 들수록 왕년 자랑을 하며 ‘라떼 삶의 해설자’가 되는 우를 범할까 염려된다. 현장에서 뛸 수는 없고 앉아서 말로만 하는 대단한 해설자나 된 착각에 빠질까 두렵다.      


심판이 종료 휘슬을 불기까지 최선을 다해 뛰는 삶을 살고 싶다. 여력이 된다면 다른 사람의 삶에 응원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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