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위성과 귀찮음 그 사이 어딘가에서
”지휘자님! 1악장 도돌이표 하나요? “
리허설 중 처음 보는 음악가 한 분이 질문했다.
아마 모두가 이 정보에 대해
꼭 확인하고 싶어 할 것이라고 확신한
그의 용기 있는? 질문일 것이다.
내가 만약 누구나 아는, 유명한,
그리고 나이 많은 지휘자라면
과연 저런 질문을 ‘받을 수 있었‘을까?
저들에게 나 스스로가 작다는 투사(Projection)된
약간의 존재의 절망감 따위는 없다.
오히려 나는 저런 질문이 반갑다.
설명할 기회를 얻었으니까!
“네, 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일단 도돌이표가 있어서 고요.
이곡을 제시부의 반복 없이 발전부로 넘어갔을 때
곡의 맥(Pulse)이 아주 부자연스럽게 흘러요.”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질문에서부터 이미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권유의 의도가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작품 그대로의 것을 읽어주는
이야기꾼의 직무를 놓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게 작품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음악가들의 작곡가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모차르트 교향곡 40번의
1악장 제시부를 도돌이표대로 반복하면
이상하게 너무 길다.
최소한의 도리도 때로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피로감을 느끼게 한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직접 피드백 받을 때가 있다.
연주자도 피로하고 관객도 지루하다면
곡의 맥이 이상하지 않은 이상
반복을 하지 않기로
최근의 바뀐 내 모습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다.
사실 클래식 음악은 듣기 참 어렵다.
소설이나 영화처럼 등장인물이 나타나는 것처럼
작품에서는 음으로 표현된 주제로 제시가 되는데,
제시된 테마를 오직 두 개의 귀를 통해
소리의 자취를 추적하고
들어내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미술이나 무용은
눈이라는 아주 직관적이고 빠른 인지 기관으로
기억하고 접하기 비교적 쉬운데,
음악은 그렇지 못하다.
사실 나는 이 때문에
‘반복’이라는 장치를 넣은 것 같다고 생각한다.
작곡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잘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반복이라는 Second Chance를 주었다.
이 기회라는 건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받아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반복이 즐겁고 거부감이 없다면 어떨까?
내가 초등학생 때 외가 쪽 삼촌과 이모와 함께
집에서 식사한 적이 있다.
그때의 내 외할머니가 잘하시던 음식 중 하나는
물김치였는데
담은 지 3-4일만 지나도 발효된 맛이 났다.
이 맛이 너무나 오묘해서
적어도 두 번 이상의 숟가락질을 반복해야
뇌에서 ‘그만’이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감칠맛이 뛰어났다.
그때 삼촌이 물김치를 한 번 떠서 맛을 보시고
정확히 일곱 번을 연속해서 떠 드셨다.
반복되는 동작이 너무 똑같아서
나는 그가 무슨 강박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리 좀 덜어드릴걸 그랬나 보다.
생각해 보니 나도 삼촌 침을 삼킨 거 같다)
이처럼 작품(물김치)이 마음에 든다면
누구든 능동적 반복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교향곡이 물김치만큼
감칠맛이 없더라도(조심스러운 표현이다)
일곱 번까지는 아니지만
한 번 정도는 다시 떠서
맛을 반복해 확인하는 건 어떨까?
사실 연주를 마치면
반복을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나고
연주 후 퇴근 시간에도 크게 차이가 없다.
전문 연주자에게도 감칠맛이 나지 않는다면
감칠맛 나게 연주해서 관객들의 집중도를 끌어올리는 일은 과연 누가 해야 할까?
도와달라~
지휘자 혼자로서는 역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