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나의 집
- 아, 그럼 자취하시는 거세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어색하다. '자취'라는 표현이 과연 맞는가? 나는 꽤나 오랫동안 혼자 살아왔고 '우리집'하면 나 혼자 사는 이 집을 떠올리며, 내가 어릴 때부터 25세에 독립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은 '부모님 집'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이다. 내가 머무는 이 집, 이 공간, 이 울타리는 하나의 가정이라고 생각한다. 가족이 나 혼자일 뿐.
< '자취'의 사전적 의미 >
표준국어대사전 : 손수 밥을 지어 먹으면서 생활하는 것
나무 위키 : 가족이나 동거인 없이 혼자 생활하는 것
가장 공식적인 표준국어대사전과 가장 대중적인 나무 위키를 참고하였다. 의미상으로만 보자면 나는 손수 밥을 지어먹으면서 생활하는 것도 맞고, 가족이나 동거인 없이 혼자 생활하는 것도 맞다. 하지만 2,3,4인 이상의 다인가구는 손수 밥을 지어 먹으면서 생활하지 않나? 그 가족구성원의 누군가는 손수 밥을 지어야 할 텐데? 그리고 가족이나 동거인 없이 혼자 생활하는 것이 자취라고 정의하면, 원래의 가정은 가족이나 동거인이 있는데 지금의 혼자 있는 상태는 임시적이라는 느낌이 풍긴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 '자취'는 일시적, 임시적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 같아서 지금의 내 상태를 정의하기에 어색하게 느껴진다.
나의 혼자 생활은 일시적인 것도, 임시 대처방편도 아니며, 서류상으로나 정서상으로나, 실생활상으로나 아주 안정적이고 확실하기 때문이다. 자취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 부족하다.
어느 회식자리에서 (물론 예전이다. 지금은 회식도 과장님도 대리님도 없음. 백수상태이므로.)
- 유부 과장님 : 저는 이만 들어가봐야해요. 가정이 있어서요.
- 나 : 어? 저도 그런데. 같이 나가요.
- 유부 대리님 : 어라? 결혼하셨어요? 여태 미혼인 줄 알았네요.
- 나 : 미혼맞아요. 하지만 저도 가정이 있는 걸요. 1인 가정.
- 유부 과장/대리님 : ....
황당해하는 상대방의 반응을 볼 때 재밌기도 하지만 의아하기도 하다. 가정이 있다는 말을 쓰면 안되는 건가? 마음의 안식을 주는 생활터전과 휴식처 역할을 하는 공간과 체제가 나에게도 있는데?
< '가정'의 사전적 의미 >
표준국어대사전 :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생활 공동체
나무위키 : 주거를 기반으로 의식주 생활을 공유하는 생활 공동체, 혹은 공동 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을 말하며 이 공동체의 구성원은 가족이라 불린다.
사전의 정의대로라면 1인 가구에는 가정이라는 표현이 어색한 것이 맞다. '공동체'라고 정의하고 있으니까. 혼자서는 공동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앞서 표현한 문장이 가정이라는 의미를 더 정확하게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생활터전과 휴식처 역할을 하는 공간과 체제
가까운 혈연관계만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공동생활이 이루어진다고 다 가정도 아니다.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연결된 가족도 있다. 또한 공동생활이라고 해서 기숙사 생활을 가정이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보다 섬세하고 요즘스러운 정의에 따르면 1인 가구는 가정이 맞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필요하면 당당하게 이야기할 것이다.
- 집에 가봐야해요. 가정이 있어서요.
집에 일찍 가서 환기도 시켜주고, 반려식물 보스톤 고사리에 물도 주고, 새로 산 커튼도 달아봐야지. 밝고 따뜻하고 편안한 우리집, 나의 가정에 나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 날이니까.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