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향하는 그 길이 나에게 최선은 아닐 수도 있다
마우이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인터넷에서 마우이를 검색하다 보면 아마 가장 대표적인 여행 코스 중 하나가 “하나 로드 Road to Hana”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뭔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익숙한 한국 여성의 이름 같기도 하고, 마우이의 핵심으로 향하는 길은 하나일 것 같은, 심플하고 믿음직스러운(?) 느낌까지도 드는 이름이다. 이 하나 로드는 두 개의 섬이 붙어 있는 모양새인 마우이의 오른쪽 섬의 동북쪽 가장자리 부분을 따라 산속과 바다 가까이 해안선을 스쳐 지나가며 달리게 되어 있는 꾸불꾸불한 도로를 가리킨다. 전체 구간이 100km가 넘는다고 하는데.. 다들 추천한다고 하니 하나 로드는 하루 날 잡고 가야지~라고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던 지난날의 나. 나는 하나 로드의 실체를 전혀 모르고 쉬이 돌아올 수 없는 여정을 시작했다.
초행길 운전 시간을 예측하기 어려운 여행을 하다 보면 중간에 뭔가 챙겨 먹기가 힘들어서 반드시 그 전날 마트에서 군것질거리를 사놓거나, 동선을 확인한 뒤 중간에 뭐라도 사가는 것이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드웨인 존슨님께서 헬기(!)를 타고 몸소 방문하신다는 유명한 수제 쿠키 맛집이 있다고 해서 또 굳이 굳이 찾아갔다. 마우이 쿠키 레이디. 재료가 듬뿍듬뿍 들어간 주먹만 한 쿠키 몇 개를 고르고 계산하니 하나당 거의 8-9천 원 꼴이다. 언제 또 먹겠냐며 쓰라린 합리화를 해본다. 당 떨어지는 시점에 이것은 피와 살이 되리라. 지갑은 가벼워지고 짐가방은 든든하다.
산뜻한 기분으로 달리기 시작한 늦은 아침 무렵.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하나 로드를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 하와이에 온 이후로 어디든 달리다 보면 바다 풍경을 볼 수 있었던 지라, 하나 로드가 길기는 해도 눈이 지루하지 않은 해안길 드라이브라고 생각했던 것. 하나 로드는 지도 상으로는 비교적 해안가를 따라 달리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산속에 낸 1차선 도로를 따라 구불구불 달리는 산길이 90% 정도라는 사실이다. 평소 멀미가 그렇게 심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나. 바다낚시를 할 때에도 멀미를 한 적이 없었고, 버스를 1시간 이상 탈 때에만 조금 속이 메슥거릴 정도였는데, 이게 웬걸. 하나 로드는 나에게 상상 그 이상의 세계를 선사해 주었다.
달린 지 30분도 되지 않아 두통이 시작되었다. 도로의 모양은 흡사 뱀이나 구렁이 같았다. 몸을 이리저리 잔뜩 꼬부려 놓은 것 마냥 이쪽저쪽으로 휘어져서 도무지 속도를 낼 수가 없고, 마주오는 차라도 있으면 양보를 주고받아야 하는 난도 높은 산길이었다. 온몸으로 도로를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나 로드의 폭포가 그렇게 멋있다는데 나는 폭포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로 치달았다. 멀미 때문에 잠이 들었다가 잠이 깨면 멀미가 바로 닥쳐오는 악몽 같은 시간이 이어졌다. 하지만 목적지까지 쉬지 않고 달려야 하는 잔인한 도로가 하나 로드였다. 달리다 달리다 어디 앉아서 좀 쉴 만한 곳을 찾으려 해도 근방 몇 km 내에는 식당이나 그 흔한 카페조차 없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그 와중에 산속이라 인터넷도 터지지 않아 유일한 인도자 구글 맵스마저 겨우 연결이 되었다 끊겼다 하며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이것은 여행인가, 생존인가.
겨우 겨우 찾아낸 그럴듯한 식당은 현지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하와이 음식을 포함한 국적이 불분명한 메뉴들을 이것저것 모아 파는 곳이었다. 이럴 때는 그냥 주 재료로 메뉴를 고르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 beef, fork, chicken, egg…. 영어 실력은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 맛과 상관없이 앉아서 뭐라도 먹어야 되겠다는 심정으로 돼지고기 로코모코를 시켰다. 빅아일랜드에서 한번 그 느끼함에 당했던 것을 망각하고 또 주문해버린 나. 하와이는 로코모코라는 공식이 멀리에 깊이 박혀있었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반 정도 먹고 죄다 남겨 버렸다. 예약을 해야만 방문할 수 있다고 해서 미리 표까지 끊어둔 와이아나파나파 주립공원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나는 심한 멀미로 테이블에 널브러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골골 앓던 나는 죽을 때 죽더라도 아이스 커피는 꼭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침부터 예상치 못한 험난한 여정으로 건너뛴 모닝커피. 몇 손안에 드는 카페 중 하나가 근처에 있다고 하니 공원 입장 예약 시간에 늦더라도 먼저 찐하고 시원한 커피를 내 몸속에 수혈해주리라. 곧바로 향한 그 카페가 눈에 들어왔을 때, 나는 오아시스를 마주하는 게 이런 느낌이겠구나 확신했다. 아직 그곳 이름도 머릿속에 선명하다. “HANA FARM”. 얼마나 정겹고 인간적인가..
현기증이 실제로 나는 것인지, '커피 못 마셔서 현기증 날 것 같아'의 그 현기증인지 몰라도 어지러운 흥분에 차서 카운터로 직행한 나는 급하게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 안도감을 느끼려는 찰나, 계산하는 카운터 앞에 놓인 유리병이 눈에 띄었다. 딱 봐도 공장제는 아니어 보이는 노란빛의 기묘한 액체가 담긴 그 병에는 “HANA TONIC”이라는 묘한 상품명이 적혀 있었다.
“이건 뭐예요?”
“멀미날 때 먹는 거예요. 레몬이랑 생강이 들어가 있어요.”
구미가 당겼다. 근데 약간 신뢰가 가지 않았다. 약도 아닌 것이, 음료도 아닌 것이 한번쯤 의심해봐야 할 것 같은 느낌.
“이거 많이들 사 먹나요?”
“네, 여기 오시는 분들 멀미 심하게 하는 경우가 많아서요.”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하나 로드를 오는 사람들은 멀미를 많이들 한다는 것을. 그리고 미리미리 멀미약을 먹고 출발한다는 것을. 내가 비정상이 아니구나 안도하는 동시에 미리 이 불행을 예방하지 못한 스스로가 한탄스러웠다.
어느새 돈과 교환된 하나 토닉. 아직 들이키지 않았건만 이 마법의 물약만 있으면 괜찮아질 것 같은 기대감이 생겼다. 문제는 멀미이기도 했고, 카페인 때문이기도 했나 보다. 앉아서 커피를 마시면서 쉬다 보니 뭉쳐있었던 어지러움과 메슥거림이 조금씩 떠나가는 게 느껴졌다. 잃었던 웃음기와 농담을 던질 수 있는 여유가 돌아왔다. 하나 토닉을 손에 꼭 쥐고, 다시 힘차게 출발을 다짐했다.
블랙샌드 비치로 유명한 와이아나파나파 주립공원. 급하게 이곳으로 1시간 반이 넘게 달려온 게 허무할 정도로, 예약 시간에 대한 엄격함은 없었다. 입구에서 요원들이 주차장이 너무 붐비지 않게 관리하는 정도였고 그다지 서두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빅아일랜드에서도 이미 한번 검은 모래 해변을 방문했던 지라, 모래 색에 대한 별다른 감흥은 없었지만 주립 공원답게 해변뿐 아니라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잘 정리되어 있었다. 간단하게 트레일 코스도 있어서 등산복 차림으로 사람들이 오가기도 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전까지 너무 지치기도 했고, 큰 욕심 없는 마음으로 해변에 비치타월을 깔고 그저 멍하니 바다를 바라봤다. 물이 꽤 차가워 보였는데 외국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풍덩풍덩 깊은 물까지 들어가 놀기도 하고, 일광욕을 하기도 하면서 자유롭게 그곳을 누리고 있었다. 몸이 따라 주지 않는 여행자는 그저 방관자일 뿐이다.
물에는 반드시 들어가지 않아도 충분히 좋을 수 있다. 블랙샌드 비치에서의 시간도 그랬다. 지금 나에겐 이런 평화로운 풍경이 필요했다. 코로나 일상 가운데 숨 막히고 답답한 가운데 맘껏 떠들고 움직이고 숨 쉬는 누군가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간. 나도 자유로운 그들의 일부임을 확인받고 싶은 순간. 그래서 이곳에서는 충분했다. 호흡이 죽어있던 세상이 적어도 이곳에서는 다시 살아난 기분이 들어서 평안함을 누렸다.
블랙샌드 비치에 드러누워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니 체력이 양껏 충전되었다.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는 레드 샌드 비치. 이곳은 다소 접근성이 낮은 비치인데, 모래사장까지 다다르려면 비밀스럽고 다소 위험한 루트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빅아일랜드의 의도하지 않았던 트레킹 때와 비슷하게 '아니, 이렇게 계속 가면 뭐가 나오긴 하는 거야?'라는 의구심을 가득 품은 채 발은 조심조심 앞으로 향했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등산 코스 같은 흙 외길을 걷다 보면 길은 점점 좁아지고, 거의 벽 쪽에 붙어서 스파이더맨처럼 옆으로 걸어야 하는 상황이 된다. 동시에 그 앞에 펼쳐진 풍경이란!
약간의 고생길을 인내하며 걸어가면 큰 돌들이 방파제처럼 강한 파도를 막아주고 그 안쪽으로는 고운 붉은빛(내가 보기엔 갈색 흙,.. 같았지만)의 모래사장이 펼쳐진 비치를 만날 수 있다. 이전에 다른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하와이의 바다는 대부분 파도가 상당해서 파도타기 아닌 "수영"을 하기가 쉽지가 않다. 이곳에서는 거친 파도를 돌들이 걸러주니 안쪽 사장은 부드러운 물결 정도로 물놀이를 즐길 수 있어서 한결 맘이 편했다.
하루 종일 하나 로드에 부적응하느라 비실대며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블랙 비치에서부터 모아놓은 기를 최대한으로 꺼내어 몸을 담그고 마우이를 느껴보았다. 울렁울렁하는 건 비슷한 것 같은데, 물속에서는 멀미가 나지 않는 게 새삼 이상했다. 물속을 유영하며 주둥이가 길쭉한 갈치 같은 물고기와 살랑살랑 사람들 곁으로 와서 함께 수영하는 까맣고 노랗고 투명한 물고기들도 만났다. 몸이 좀 차가워지면 잠깐 해변에서 저물어가는 오후의 햇볕을 받기도 하고 한적한 시간을 보낸다. 견딜만한 고난과 역경들을 헤쳐 나가면 너무 좋은 어떤 순간이 오는 뻔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는 그 속에서 꽤나 행복했다.
이 날 하루를 일정을 마치고 돌이켜보면서 인정하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다른 이들이 전해주는 말에 담긴 어떤 여행지는 많은 의미를 함축한 키워드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 하나 로드는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가는 여정이 아니었다. 하나 로드 길 위, 곳곳이, 스쳐가는 폭포가, 깊은 산세가, 슬몃 보이는 해안선이, 하나 로드 그 자체가 여행의 목적이 돼야만 했던 거였다. 명확한 목적지를 향해 가는 과정은 필요보다 더 급하고 놓치는 것이 많을 수밖에 없다. 마우이의 어느 순간인들 좋지 않은 때는 없었지만, 그렇게 후다닥 누리기에 하나 로드는 내가 경험한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깊은 맛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단순히 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많이들 추천한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곳을 찾게 되었을 때 느끼는 약간의 실망, 혹은 허망함, 불완전함은 맛집에서 인기 없는 메뉴를 시킨 것 같은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나 로드 위에서 하나 로드를 만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을 레드 비치에 씻어보내고 나는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이모네 산자락 숙소로 귀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