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 가치는 고정되어있지 않다
마우이의 오른쪽 섬에서 왼쪽 섬으로 숙소를 옮겼다.
마우이에 온 뒤에도 날씨는 계속 환상적으로 좋았는데, 어느 순간 날씨 걱정을 조금도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게 그 방증이다. 그럼에도 하와이의 2월 초 바닷물 온도는 생각보다는 높았고, 또 생각보다는 차가웠다. 물놀이를 충분히 할 만 하기도 한데 막상 몸을 담그면 엇! 하며 꿈쩍 놀랄 수 있는 온도. 모래사장에 한낮의 햇빛이 맘껏 내리쬐면 오슬오슬한 몸이 조금씩 덥혀진다.
새 숙소는 카팔루아라는 지역의 나필리 해변 근처의 2성급 호텔이었다. 호텔이라기엔 콘도 같은 형태의 숙박시설인데, 2성급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숙소 퀄리티가 좋은 편이었다. 숙소로 향하는 길 자체가 이미 해안 도로를 쭉 타고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설레기 시작 했다. 도착하자마자 체크인을 하러 카운터에 갔다. 이름을 말하니 담당자는 예약 사항을 확인해주더니, 혹시 룸을 업그레이드할 의향이 있냐고 물어봤다. 마침 운 좋게 바다 바로 앞 1층에 빈방이 하나 있다는 말도 살짝 덧붙이면서 말이다.
호텔 카운터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큰 의미를 담지 않고 형식적으로 영업용 멘트를 날리는 것이겠지만, 나는 이런 상황에 적잖이 당황하는 편이다. 숙소를 결정할 때 이미 내 모든 고민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고민의 시작을 이 사람 앞에서 실시간으로 해야 한다니. 의사 결정이 무엇인지를 알고리즘처럼 비교 분석해야 하는 나 같은 인간에게는 쉽지 않은 과제가 던져지는 셈이다.
"아... 음....?"
내가 원래 예약한 방과 제안받은 오션뷰 방의 가격 차이는 12만 원 정도 되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이 방의 교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햇살은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고, 온도는 딱 알맞게 좋았다. 어떤 선택지가 가장 합리적인, 혹은 나를 행복하게 할 선택일까.
"잠깐만요, 일행이랑 상의 좀 하고 올게요."
의사결정론 책에서 봤던 것 같은 어느 내용처럼 잠깐 선택을 멈춘 뒤, 시간을 갖고 내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눈으로 확인해보기로 했다. 예약한 방과 체크인 카운터가 있는 건물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앞쪽 건물이 있었고, 그 건물 바로 앞에는 모래사장과 바다가 맞붙어 있었다. 거리 상으로만 보면 원래 방과 오션뷰 방 건물은 50m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에 위치해 있어서 갈등이 되긴 했지만, 방 발코니로 나오면 바로 바다로 이어진다는 접근성과 방 안에서 내다보기만 해도 보이는 바다 뷰는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더 오랜 시간을 고민하더라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갈등이었다. 나는 충분히 합리적인 과정을 거쳤다고 자부하며 나를 행복하게 할 선택지를 외쳤다.
"해변 근처 방으로 주세요."
체크인 후 방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이때가 여행 중에서 가장 산뜻한 마음으로 두근거리게 되는 시점이다. 깨끗하게 정돈되어 물건 하나 들어가 있지 않은 상태의 방, 우리는 살아가면서 늘 이렇게 자동으로 정돈되어 있는 공간을 꿈꾼다. 방은 침실과 화장실, 요리 시설과 도구가 갖추어진 주방, 그리고 발코니로 이어진 거실까지 꽤나 그럴듯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오션뷰 방은 글자 그대로 바다를 마음껏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거실 소파에 앉으니 기분 좋은 탄성인지 한숨인지 모를 숨이 새어 나왔다.
"아, 좋다."
뻔하디 뻔한 취향인 것만 같지만 바다 근처에 자리를 잡으니 또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어도 좋을, 허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으면 너무 아까울 것 같은 시간이 주어졌다. 남편은 아침 일찍부터 이동하느라 피곤했는지 소파에 누워 콜콜 잠이 들었다. 이 멋짐을 앞에 두고 눈을 감아 버리다니 안쓰럽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다. 나도 조금은 노곤했지만 지금만 볼 수 있는 이 풍경을 어떻게든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배는 출출했지만 숙소에서 떠나고 싶지 않아 컵라면을 하나 뜯었다. 선베드에 누워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게으른 시간. '이건 정말 신선놀음이군.'이라는 생각이 짙게 들어왔다. 다른 이에게 자랑하지 않아도 좋을 너무 큰 행복감이 밀려왔다. 동시에 한국에서 내가 얼마나 팍팍하게 살아왔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름다운 것을 오래도록 지켜보고, 아름답다고 찬사를 보낼 시간이나 마음의 여유조차 없는 서울 직장인의 삶. 회사라는 곳에서 시간과 공간을 나누는 사람들은 누구 하나 의도하지 않았지만 서로를 착취하고 공격하는 일에만 익숙해져 있다. 서로를 향한 오랜 깊은 관심이나, 진심 어린 찬사, 작은 칭찬조차 없는 회색 도시의 박스 속의 삶. 나 또한 그 일부가 되어서 너무나 찐하게 절어버린 탓에 몇 번이나 하와이 물에 몸을 담갔어도 때가 벗겨지지 않고 있었나 보다. 인생에 중요한 게 뭐가 있으랴! 아등바등 서로 물어뜯고 쥐어짜고 하는 흐름에 휩쓸려가지 않으리라. 회색 속에서 나만의 색깔을 잃지 말아야지, 이렇게 푸르고 넓게만 보고 살아야지 하며 스스로를 강박했다. 그리고는 가장 한국적인 뻘건 국물을 후루룩 거리며 해변에서 노는 사람들을 대리만족으로 삼았다.
시간은 햇빛처럼 느리게, 그리고 정확하게 흘러갔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이 시간이 흘러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되는 때가 있지만 이 날은 흘러가는 시간의 면면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싶었다. 현실 수긍이 빨라진 걸까. 가만히 있는 게 즐거워진 걸 보니 이제 나는 나이가 들어가고 있나 보다. 이런 기분도 나쁘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게 완벽했다. 공기는 부드럽게 따스하고, 누워서 올려다본 야자수 이파리는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음악을 틀어놓지 않아도 선율이 느껴지는 기분이다. 한 때뿐인 이 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욕심은 내려놓을 수가 없다. 자연의 소리를 BGM 삼아 모든 것에 귀 기울여 본다. 이 작은 내 몸뚱아리와 기억 주머니에 얼마나 담을 수 있을는지.
모두가 돌아간 뒤, 바다는 밤에도 쉬지 않았다. 해가 깜깜하게 지고 나니 발코니 쪽에서는 철썩 철썩 하는 큰 파도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생각보다 큰 소리에 순간순간 섬뜩하기도 했다. 오션뷰 방은 뷰만 가까이 있는 게 아니라 물리적으로 바다와 같이 있는 것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한편으론 안심이 되기도 했다. 아까 그 바다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옆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감각이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 커튼만 걷으면 오늘의 그 파랑과 파랑 아닌 녹색 같은, 얼음 같은 창창한 빛이 눈 안에 들어올 것이 기다려진다. 불과 몇 시간 전 나에게 주어졌던 선택지들을 두고 고민했던 것이 떠오른다. 이 선택지가 아닌 다른 untaken road는 어떤 길이었을까. 후회했을까? 또 다른 기쁨이 있었을까? 의미 없는 가정 속에서 하루치 오션뷰의 가치, 그것을 선택할 수 있었던 행운과 오늘 하루치의 행복은 12만 원 따위로 매겨질 수 없었음을 인정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