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다면 그저 머물러라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며칠 남지 않은 뉴욕에서의 여행, 오늘 즈음엔 센트럴 파크를 방문할 계획이었다.
그럼 그렇지. 나는 비를 안 만나면 이상한 구름몰이여행자인데, 이정도 쯤이야!
당황하지 않고 주섬주섬 작은 우산과 카메라를 챙긴다. 아 그리고 특별히 준비한 아이템인 비누방울 건도 가방에 쑤셔 넣었다. 사진을 찍을 때 특수 효과로 사용할 예정이다.
센트럴 파크 출근 플레이리스트 첫 곡은 혁오의 'Silverhair express'.
가끔 인생에도 BGM이 자동으로 깔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상황도, 어떤 감정도 음악으로 예쁘게 포장되어 보일 것 같아서. 그러면 정말, 좋을 것 같아서. 근데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귓구멍을 음악으로 덮어야지.
어느덧 익숙해진 NJ 버스를 타고 맨하탄 종점인 Port Authority 버스 터미널에서 내린다. 환승 센터 같은 곳이라 어떤 수단, 어떤 루트로든 센트럴 파크에 접근할 수 있다. 또 센트럴 파크가 워낙 위아래로 길고 넓기도 해서 지하철 구멍이 이곳 저곳에 다른 호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미드나 영화에서 수도 없이 봤던 센트럴 파크지만 도대체 내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건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을 만큼 낯설고 큰 공원이다. 현지 뉴요커들처럼 운동복을 입고 뛰기도 애매하고, 자전거도 탈 수 없는 단기 여행자로서는 그냥 발 닿는 데로 걷고 쉴 만한 적당한 공간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쿠팡으로 주문해온 버블건을 어떻게든 써 보겠다는 다짐을 한 오늘. 오른손에는 무거운 카메라를, 왼손에는 버블건을 들고 비누방울을 날리면서 사진을 찍어본다. 버블건이 모터로 구동되기 때문에 우웅-- 하는 소리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깃흘깃 쟤는 대체 뭘하나 쳐다본다. 아랑곳하지 않고 오늘만큼은 포토그래퍼라는 심정으로 사진을 찍는다. 빗 속에서 이정도면 나도 프로페셔널이다!
비록 햇빛 쨍쨍할 때만 볼 수 있는 밝은 초록 톤은 아니지만, 나름 빗 속에서도 비누방울 표면의 다양한 색깔이 반사되어 사진 결과물이 썩 만족스러웠다. 계속 이동하면서 사진을 이것 저것 찍어본다. 공원 중간에 있는 호수에서는 이서진의 뉴욕뉴욕에서 봤던 조각배를 타는 사람들이 많았다. 거대 도시인 뉴욕과는 안 어울릴 것 같은 공원 호수의 뱃놀이도 멀리서 바라보니 로맨틱하고 행복해보인다.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걸 보니, 탈만 한 가치가 있긴 한가보다.
차도가 없어지는 공원 안쪽까지 다다르자 드넓은 초록 잔디밭이 나온다. 한 손에는 우산을, 한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걷고 있자니 누가 봐도 관광객 같아 보였나 보다. 지나가던 한국인이 말을 건다.
"한국인이세요? 사진 좀 찍어주실 수 있나요?"
"아, 네. 찍어드릴게요."
여행객 같아보이진 않았고, 여기 사는 사람 같았는데 사진을 찍어달라니 조금 의아했지만 커다란 카메라를 든 사람으로서 나름 정성을 다해 사진을 찍어주었다. 날이 흐리기도 하고 딱히 내 모습을 담을 생각은 없었는데 보답으로 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한다. 하나 둘 셋도 외치지 않길래 찍나 보다 하고 무심히 형식적으로 사진을 찍혔는데, 헤어지고 사진첩을 확인해보니 거의 100장에 가까운... 사진이 찍혀있었고, 처음 만난 사람이 우리집 남자 동거인보다 사진을 훨씬 잘 찍어 남겨주어서 깜짝 놀랐다. 나에게 부여된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했던 건 아닐까 뒤늦은 반성을 하게 된 순간. 덜덜.
그렇게 무목적성의 산책을 하는 동안, 신기하게도 날이 점점 개어 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챙겨온 친구네 룸메이트의 돗자리를 펼쳐본다.
나도 이제 뉴요커 흉내를 낼 시간. 우산도 접고, 무거운 카메라도 내려놓고, 신발도 벗고 나무가 살짝 그늘을 드리운 커다란 나무 아래 가방을 베고 드러누워본다.
아........... 좋다.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스르르 눈을 감으니, 습기가 사라지는 중인 촉촉한 공기와 이파리에 필터링된 부드러운 햇빛이 느껴진다. 몸과 마음이 너무 편안하다. 이제서야 왜 센트럴 파크에 다들 드러누워 있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커다란 강아지, 작은 강아지, 웃통을 벗은 남자들, 키스를 하는 연인들, 뛰어노는 아이들.. 모두 나만큼 기분이 좋아 보인다. 같은 좋은 기분을 느끼는 익명의 존재들과 함께 적당한 거리를 두고 공존하는 기분이 꽤 괜찮네 싶다. 이대로 계속 눈을 감고 누워 있으면 잠이 들 것 같았다.
아무도 간섭하지도, 잔소리 하지도 않는 포근한 이 순간이 너무 좋다.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담아 간직하고 싶은, 잊고 싶지 않은 센트럴 파크의 모먼트였다.
솔직히 인정해야겠다. 비는 정말 싫지만, 비가 있어서 갠 이후의 기쁨이 두 배가 된다는 것을. 그 극적인 전환이 다행스러운 만족감을 선사한다는 것을 말이다.
센트럴 파크는 뉴요커들의 비밀 정원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 복잡하고 빽빽한 빌딩이 가득한 곳에서도 잠깐 푹 빠질 수 있는 녹색의 한적함이 그곳에 있다는 것. 별 것 아닌 것 처럼 보여도 분명 매일을 이 곳에서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고 휴식이 되는 공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원의 전체 크기를 본다면 아마 나는 센트럴 파크의 반도 제대로 밟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에게 자랑하지 않아도 좋은 뉴욕 여행의 순간을 꼽자면 나는 비오다가 갠 센트럴 파크에서의 시간을 떠올릴 것이다. 센트럴 파크를 빠져나오는 순간, 마법에서 풀려난 여행객처럼 나는 또 바쁘게 움직여 어디론가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