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벤더향 가득한 땡볕, 그리고 롱아일랜드 해변
이번 뉴욕 여행을 하게 된 가장 큰 계기가 된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뉴저지 사는 나의 친구 C.
연구소 생활로 수년간 독일에서 지내다가 뉴욕으로 이직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난 결심했었다.
이 친구가 있는 동안에 뉴욕을 한번 꼭 가야겠다고 말이다.
일찍이 표만 끊어놓고 이런저런 일로 바쁘게 지내느라 슬금슬금 여행 준비를 했었는데, 띄엄하게 연락을 주고 받던 중 대뜸 친구가 '라벤더' 이야기를 한다.
라벤더는 특정한 지역에서만 자라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뉴욕에 웬 라벤더?
사실 나는 2019년에 엄마와 다녀온 프랑스 남부 여행 때 처음으로 심겨진 라벤더 생화를 처음으로 봤었다. 그 때 라벤더라는 꽃이 얼마나 무덥고 볕이 좋은 곳에 자라는 지 온 몸으로 느꼈다. 투어 코스에 포함된 라벤더밭에서 사진 찍기는 실패할 수 없는 일인 동시에 뙤양볕을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시험하는 테스트같았다. 땅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땀은 삐질삐질 흘렀다. 빽빽히 심긴 라벤더는 아름답고 향긋했고, 그 라벤더에 홀려 몰려든 수많은 벌들은 무서웠다. 기억 속에 그 더위와 공포는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렇기에 뉴욕에 농장 꽃밭이 있다는 것도 낯설지만, 라벤더가 뉴욕에서 자랄 수 있단 것도 조금 쌩뚱맞게 느껴졌다. 나에게 있어서 반드시 가야하는 목적지는 아니었지만, 또 안 갈 이유도 없었다. 7월 미국의 독립 기념일 전후가 라벤더가 만발하는 시기라서 마침 타이밍도 좋단다.
그리고 드디어 그 날이 다가왔다. 라벤더 밭은 뉴욕 시내는 아니고 뉴욕 주 안에 있는 롱아일랜드라는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뉴욕 주는 한국 국토의 1.4배 크기라고 한다.) 뉴저지에서 차로는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 그러니까 라벤더 밭으로 향하는 여정은 일종의 뉴욕 근교 여행이라 이름 붙일 수 있겠다. 차를 타고 시내를 벗어나자 눈에 보이는 풍경이 조금씩 달라진다.
드디어 라벤더 밭에 도착! 미리 예약해둔 표를 확인받으면 입구에 있는 소녀가 손등에 입장권을 그려준다 :) 날이 조금 흐린 줄 알았는데, 농장에 도착할 때쯤, 뜨거운 해가 역시 스멀스멀 존재감을 드러낸다. 농장에 들어서자 은은한 라벤더 향이 느껴졌다.
얼굴이 큰 다른 꽃들과는 다르게, 라벤더는 무더기로 겹겹이 쌓여있어야 볼 맛이 나는 꽃이다. 가까이에서 한 줄기만 보면 가느다란 청소 솔 같기도하고, 왠지 조금 꽃 같지 않아보인다. 맥문동이라는 꽃과 비슷하게 생기긴 했지만, 라벤더가 줄기나 꽃잎 부분이 훨씬 더 단단하고 힘이 있다. 이래도 저래도 봐도 봐도 지겹지 않은, 생김새와 향기가 색감이 참 잘 어우러지는 특별한 꽃이다.
프랑스에서 봤던 라벤더랑 다른 점은 뉴욕 라벤더가 키가 조금 더 작고, 짙은 보랏빛이 아닌 흰색, 연보라 꽃도 있다는 것이다. 눈에는 다 비슷해보여도 알고보면 다 같은 라벤더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밭 크기가 엄청 크진 않아서 돌아보는 데 시간은 얼마 안걸린다. 다만 사진을 찍고, 또 찍고, 또 찍고.... 하다보면 끝없이 머무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나도 신이 나서 친구와 정말 많은 사진을 남겼다. 열기와 땀 때문에 땀에 쩔어 있었지만 꽃 덕분인지 모든 사진이 행복하고 화사하게 보였다.
땀 빼며 라벤더 구경을 실컷 하고 나니 배가 고파졌다. 다음 목적지는 어디인지 모를 해변가. 그저 친구와 친구 룸메가 데려다 주는 대로 몸을 맡겨 보았다. 내가 모든 것을 탐색하고 결정내리지 않는 이런 여행도 꽤 괜찮은 걸?
도로를 따라 달리는데 바다를 앞에 두고 별장을 줄을 지어 늘어서 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미국 부자들의 휴양 동네인가. 항구가 보이는 땅 거의 끝 외진 곳까지 다다르자 레스토랑이 딱 두 개 있었다. 평점을 비교하면서 빡빡하게 고민할 필요 없이 둘 중에 아무데나 들어가서 주는 대로 먹으면 되는 분위기.
큰 기대 안했는데 뷰가 꽤 괜찮다. 사람도 별로 없고 한적한 동네에 오니, 살짝 몽롱해지면서 시간과 공간 감각이 흐려진다.
배고픔이 몰려온 우리는 텍사스식 버거, 치즈&과일 샐러드, 깔라마리 튀김, 홍합찜, 랍스터 무침이 올라간 토스트 등 푸짐하게 시켰다. 단언컨대 이날 여기서 먹은 깔라마리는 내가 지금껏 먹어본 오징어 튀김 중 베스트였다.
서빙을 하는 남자애는 딱 봐도 어려보였는데, 파란 눈에 금발, 멀끔하게 잘생겼지만 어딘지 모르게 일하는 태도는 어설펐다. 친구와 친구의 룸메는 아마 여름 방학 때 돈벌려고 알바하는 젊은 애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러고보니 서버들이 다 그 또래의 학생들 같았다. 어쩐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 레스토랑에서 커피는 HOT으로 주문이 된다고 해서 당황스러웠다. 대체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근원은 어디일까. 이럴 땐 커피 따로, 얼음 따로를 부탁하는 수밖에 없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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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부른 배를 두들기며 근처 바다로 걸어가 본다. 친구의 룸메가 언제나 들고다니는 초경량 돗자리와 나의 연약한 양산겸 우산을 들고 5분 정도 걸어가니 해변가가 있었다. 해변의 사람들은 바다에 들어가 해수욕을 즐기기도 하고, 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자고 있었다.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솨솨 바다소리를 들으며 우리도 함께 멍을 때렸다. 뜨거운 여름 태양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렇게 빛이 쏟아지는 낯선 바닷가에 오면 늘 인셉션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디카프리오가 무의식 가장 깊숙한 바닥에 떨어졌던 때의 배경. 어딘지 모르지만 한번은 가봤을 것 같은, 어쩌면 꿈 속에서 봤을 것 같은 느낌의 바다. 아는 것 같지만 이질적인 공간을 화면으로 표현한 놀란 감독은 정말 천재적이다. 햇빛과 온도, 빛과 색감 모든 요소가 비현실적인 감각을 선사한다. 잠깐, 지금 이거 꿈은 아닐까? 꿈이라면 깨지 않길.
라벤더가 정말 예쁘네요
잘 읽고 갑니다 시간나면 제 글도 한번 읽어주실래요?
댓글 감사합니다 :) 글 구경 다녀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