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_05 (김봉곤 소설집 <시절과 기분> 사전 서평단)
“시에 죽음이니 인생이니 하는 큰 말, 쓰셔도 되고요, 여성적인(?) 건 사소한 거라고 하니 쓰세요. 동성애는 보편적인 게 아니라니까 쓰시고요. 안 되는 것에 되는 예술이 있다.”
김봉곤 작가 인터뷰에서 소개한 김현 시인의 산문 속 구절
사람에게 향한 사랑이라는 감정이 늦가을의 감처럼 무르익는 것인가 싶을 때가 있다. 무던히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문득 오묘한 느낌이 다시금 되새겨지는 이유는 그것이 '그 시절의 어떤 기분'이기 때문이리라.
올해에 나는 어떤 설문지에 '가장 자신 없는 것은'이라는 질문에 '사랑과 동정을 구분하는 일'이라고 적은 적이 있다. 애초에 그것들은 같은 뿌리를 가지고 뻗어나가는 나뭇가지들처럼 겉으론 구별되어있지만 점점 그 속을 알려고 하면 할수록 모르게 되는 것들이 아닌가 했다. 그리고 나는 이 소설의 한 구절을 보고 화자를 지나 작가를 마주한 것처럼 반갑고 익숙하게 느껴졌다.
사직구장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야구를 보는 혜인과 내가 있었다. 슬픈 것과 사랑하는 것을 착각하지 말라고, 슬픈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을 착각하지 말라고 생각했고, 아무여도 아무래도 좋을 일이라고도 잠시 생각했다.
나는 사랑이라는 것을 느끼며 연애를 하지만 무언가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그것을 끝내버린 적이 여러 번 있다. 그러고나면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마련이었는데 그것은 누군가의 구속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닌 스스로에게 있던 어떤 감정이었다. 안정된 상태에 있게 되면 늘 새로운 자극을 찾아 나서는 나의 성향일 수도 있고 처음 본 상대에게 생긴 호기심이 오래가지 않는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시간의 밖에 놓이게 되고 나선 본래의 나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럴 때면 하는 수 없이 그때의 시간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때의 나의 모습과 상대의 기분을 생각해보기도 하고 삶의 소중한 어떤 시간대를 공유하던 '나'와 '너'가 마주 보고 서서 질문을 하기도 한다. 생각의 끝에 선 그들은 마음에 품고 있던 상대를 향한 사과와 고마움, 그리움 등이 녹아져 있는 담담한 인사의 말을 건네고 헤어진다. 각자의 자리에서 잘 지내자고. '너'는 한 발자국만 디디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세계로 넘어와 영영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어찌 됐건 나는 이 소설이 현재를 지나고 있는 5월 봄에 걸맞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겨울에 읽기엔 조금 씁쓸하고 여름에 읽기엔 그 계절의 화려함에 가려질 수도 있지 않을까. 올봄에 이 책을 읽게 되어 무척 다행스러운 마음이고 나와 마음이 닿는 소설을 쓰시는 작가님을 만나게 되어 반갑다. 나는 앞으로 이 작가의 신작을 기다릴 것이며 2020년의 봄을 지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 단편 안에 담긴 깊은 생각들을 같이 공유하면 좋겠다.
p.16
한편 그녀가 나의 세계를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했는데, 그 시절의 사람들이 지금의 나를 모르고 관심도 없다는 사실은 내 용기이기도 했다.
p.23
구포역 플랫폼에 내렸을 때 나는 온도 차가 국경을 만들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곳은 거의 이국이었다. 미지근한 물을 넘길 때처럼 콧속으로 부드럽게 들이치는 공기, 역사 앞 가게에 내어놓은 동백을 보며 나는 절망할 때와 가까운 에너지로 희열 했다.(내가 얼마나 더 잘살겠다고, 동백도 없는 그런 추운 곳에 살고 있느냐고!) 나는 동백꽃을 만져보고, 쪼그려 앉아 보고, 내려다보기를 반복하다 해준과 혜인에게 나 구포역에 도착했어, 하고 똑같은 문자를 보냈다.
p.46
상상만으로 이미 나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지만, 가능 세계를 그려보는 일이 예전만큼 즐겁지 않았다. 내가 된 나를 통과한 사람들, 슬픔과 불안에서만 찾아왔던 재미와 미(美) 역시 내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