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 여행자의 일기 #31

오로라, 드디어 몰아치다.

by 오궁

“악마가 내려와서 내 귀에 잠시 무언가를 속삭이고 갔다. 그런데 그 말은 거짓말이었다.”

오로라 촬영에 동행했던 I 감독


오로라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았다. 인생이 길이길이 남을 장면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아쉽고 부족한 오로라가 6일 내내 계속됐다. 멋진 오로라의 영상과 환호하고 감동하는 출연자의 모습을 담고 싶은 촬영팀은 애타 탔다. 우리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봤을 때는 사진이나 영상과는 다른 모습에 실망했다가 며칠이 지나서는 이 정도 본 것도 어디냐는 자기 위로와 겸손의 마음으로 나름의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쉬운 대로 촬영 일정도 사실상 마무리되었고 내일 새벽이면 옐로나이프를 떠나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마지막 밤은 일정은 모두에게 가볍고 느슨했다. 촬영팀은 혹시나 스케치할 영상이 남아 있을까 싶어 오로라 빌리지로 갈 예정이었고 출연자는 편한 대로 해도 된다는 연락이 왔다. 새벽 출발이면 어차피 잠을 자기도 애매하고 호텔에서 둘이서 얼굴 맞대고 할 일도 마땅하지 않아서 가벼운 마음으로 오로라 빌리지로 향했다. 모두 다 같은 생각이었는지 한 사람도 빠지지 않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티피 안에서 지루한 시간이 이어졌고 그간 있었던 이야기들을 간간이 나누고 있었다. 오로라 사진가 권오철 작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오늘 기운이 심상치 않다고 했다. 어쩌면 비행기 시간 때문에 제대로 못 보거나 출발을 연기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몇 시였을까? 12시 정도였을까? 북쪽 하늘 끝머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듯 하얀 기운이 스멀거리기 시작했다. 흘러 지나가지 않고 천천히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사람들의 입에서는 허연 입김을 타고 감탄사가 스타카토로 흘렀다. 권작가님이 얘기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서서히 시작된 오로라 스톰은 순식간에 거대한 물결로 몰아쳤다. 지평선 위로 탁 트인 하늘 전체에 커다란 강이 하나 생겨났고 저 어마어마한 강물이 그대로 떨어져 내려 덮칠 것 같아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층암 절벽상(層岩絶壁上)의 폭포수(瀑布水)는 콸콸,

수정렴(水晶簾) 드리운 듯, 이골 물이 주루루룩, 저 골 물이 쏼쏼,

열에 열 골 물이 한데 합수(合水)하여 천방져 지방져 소쿠라지고 펑퍼져,

넌출지고 방울져, 저 건너 병풍석(屛風石)으로 으르렁 콸콸

흐르는 물결이 은옥(銀玉)같이 흩어지니,

소부허유(巢父許由) 문답하던 기산영수(箕山潁水) 예 아니냐.

(경기잡가 유산가 가운데 한 대목)


나는 지난 40년 넘게 써 온 언어가 무색하게 본능적인 감탄사만 내뱉고 있었다. 차분할 겨를이 없었다. 실제로는 몇 킬로미터인지 모르겠지만 손을 뻗으면 닿을 것은 곳에서 오로라는 가늠할 수 없는 속도로 일렁이며 흘렀다. 하늘에서 내려온 기운이 내 몸을 관통해서 땅으로 흘러갔다. 얼어붙었던 몸엔 잠시 전율이 흘렀지만 몸의 기억으로는 남지 않았다. 흥분 상태에서 소리치며 보느라 슬로모션 영상으로 재생해 내지 못하게 된 오로라의 강에서 나는 지난 22년간 아내와 나의 이야기가 흐르는 것을 보았다. 우주라는 거대한 스크린이 하늘에 걸려 있고 오로라의 움직임을 따라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영상 조각으로 뒤섞여 이리저리 떠돌고 있었다. 좀 더 자세히 보려고 미간을 찡그리자 영상은 금세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몇 분이었을까, 몇 초였을까. 온 하늘을 다 뒤덮고 말겠다는 기세로 휘몰아치던 오로라는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맑은 하늘엔 별만 초롱초롱 빛났다.

곁에 있던 아내가 보였다. 아내를 꼭 껴안았다. 그제야 눈물이 났다. 눈물의 의미는 알지 못했지만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저절로 나왔다.

“너와 함께여서 너무 고마워.”

너와 함께 이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보기 위해 22년을 함께 했구나. 지금 내 옆에서 이 말도 안 되는 걸 함께 보고 있는 사람이 바로 너구나. 혼자였으면 얼마나 안타깝고 안타까웠을까? 다행이고 고맙다. 출연지원서를 쓸 때 가장 처음 했던 그 말이 현실이 되었구나. 아이들의 엄마로, 직장생활을 하는 아빠의 역할에만 몰두하는 동안 잠시 잊고 있었던 우리 둘만의 소중한 사랑이었구나. 그것이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기도 하고 미안했던 것은 오로라를 보는 그 순간만큼은 혼자였다는 것이었다. 오로라가 짙어지고 강해지고 빨라질수록 그래서 내가 그 속으로 빨려들수록 나는 순전히 혼자였다. 그 찰나에는 옆에서 손을 잡고 있는 사람도 생각나지 않고 보이지 않았다. 얼마가 지나서 미안한 마음에 조심스레 아내에게 그 말을 했더니 아내도 똑같은 마음이었음을 고백했다. 이 넓고 넓은 우주에서 인간은 얼마나 보잘것없으며 또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가.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지를 나는 받아들여야 했다.

인터뷰하는 시간에 감독이 오로라가 어땠냐고 물었다. 오로라가 무엇 같냐고 묘사해 달라는 요청에 나는 무엇과 같다는 말을 지어내지 못했다. 그것은 어떤 것을 닮은 것이 아니라 오로라 그 자체였으니까. 그야말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기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려 내 머릿속을 하얗게 만드는 어이없는 기운이었으니까. 오로라의 자세한 움직임은 흔적으로 기억 속에 살아 있지 못했다. 그래서 어디서 시작돼서 어떻게 돌아서 어떤 색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여서 어디서 진해지고 어디서 분홍빛을 띠었는데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전혀 묘사할 수 없다. 사실 오로라가 얼마간 춤을 추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인간이 정한 시간의 단위는 그렇게 공허하고 무의미했다.


아내는 후련하다고 했다. 일주일 내내 터질 듯 말 듯 본 것도 아니고 안 본 것도 아닌 것 같은 오로라를 보면서 아내는 공짜로 여행 온 출연자로서 마음이 안타까웠다고 했다. 좋은 장면을 담지 못해 밤마다 전전긍긍하던 제작진을 보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단다. 스톰이 터진 오로라를 본 순간 아내는 이제는 모든 것이 끝이구나, 이것으로 오로라 관람은 드디어 마무리되었구나 했단다. 이제 오로라는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이 들만큼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단다. 누가 내준 적은 없지만 아내의 숙제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남겼다.


"찰나에 살아라, 그 안에 모든 의미가 있다. 그러면 영원히 사는 것이다."

오로라31.jpeg


이전 10화오로라 여행자의 일기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