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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 Oct 26. 2023

자전거를 타면 보이는 풍경

즐라해요!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윤동주, 별 헤는 밤)


새벽에 비가 내려 아침 일찍 출발하려던 계획을 잠시 미뤘다. 9시가 되니 말끔해져서 닦아 둔 자전거를 꺼내고 짐을 챙겼다. 아침 기온이 낮아 손끝이 살짝 시렸다. 기온차 때문인지 비 때문인지 안개가 뿌옇다가 햇빛이 나오니 거짓말처럼 안개가 걷힌다. 길가의 벚나무들 가지 사이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이 훤히 보였다. 바람이 소매 안으로 들어와 춥다.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시간도 이제 많이 남아있지 않구나. 추위를 이기려면 페달을 더 밟아야 한다. 지나가는 자동차가 자전거를 겁주려는 것일까. 성가시다는 듯 바짝 붙어 지나갔다. 사나운 바람과 먼지가 일어난다. 사람 참 사납군. 많이 바쁘슈? 조심해 가슈.


오전이라 자전거는 많지 않아 길은 여유롭다. 혼자 가는 길도 나쁘지 않군. 멈추고 싶을 때 멈춰 사진을 찍는다. 벼를 베지 않은 논들이 노란 풍경을 만들고 있다. 옆논은 오늘 벼를 베는 날인가 보다. 컴바인 한 대가 부릉부릉 시동 거는 소리가 들린다. 곧 들은 비워지고 조용해지겠다. ,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라고 릴케의 노래를 불러야 할까, 김현승 시인의 노래를 읊어야 할까. 참, 사람도... 벌써 여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자전거가 지나는 길은 온통 가을로 가득 차 있다. 


노란 논


터널 몇 개를 통과하니 새로 단장한 자전거 휴게소의 열어놓은 문으로 진한 커피 향과 함께 재즈가 흘러나온다. 배달을 왔는지 물건을 내리는 기사가  "뭔 음악이 이래?" 하며 커피집주인을 향해 볼멘소리를 한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재즈는 늦은 오후나 밤에 더 잘 어울리는구나. 그래도 좋은 걸. 주인은 들은 체도 안 하고 자전거 옆에 선 나를 살핀다. 땀만 식힐 거예요. 커피는 집에서 내려왔거든요. 눈빛으로 대신 전하니 주인은 웃으며 알았다는 듯 들어간다. 


아래쪽 도로엔 휴일 나들이 가는 차들이 느릿느릿 움직이고 강물은 작은 파랑을 일으키며 반짝반짝 흐르고 있다. 강물과 늘어선 차들... 여긴 평화롭구나. 참으로 귀한 일상이구나. 이 한가로워 보이는 일상이 지구 어디에선 무참히 파괴되고 있다. 내가 누리는 일상, 이거 무지하게 감격스러운 거구나. 무엇을 해야 할까. 반짝거리는 강물에 나의 원의를 실어 보낸다. 평화를 주소서... 평화를.... 왜 우린 늘 평화에 목말라하면서 평화를 이루지 못할까. 왜 늘 목이 마르나. 도대체 평화는 어디에 있나.... 다리가 무거운 거냐. 마음이 무거운 거냐. 자전거를 밟는 페달이 둔해진다.


자전거 휴게소
 자전거길에서  바라본 남한강


새벽에 내린 비로 군데군데 물이 고여있고 길은 젖어있다. 구르는 뒷바퀴를 따라 올라온 물이 등을 적셨나 보다. 등 쪽 기운이 서늘하다. 떨어진 낙엽들이 물에 젖어 바퀴에 깔린다. 미끌! 속도를 줄이자. 바쁠 거 없어. 단풍나무 한 끝에 빨갛게 물이 든 잎이 몇 개 달려있고 그 사이로 햇살이 빛나게 길을 냈다. 처음 보는 풍경처럼 놀랍고 예쁘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 소리 내어 감탄한다. "아, 예쁘다!" 햇살 아래 잎들은 날로 투명해지고 나는 그 아래 서서 투명해지는 잎을 바라보았다. 아, 눈부시다! 나도 투명해지고 싶어. 나무 씨, 잎들을 투명하게 만드는 비결은 뭔가요? 나무는 묵묵하다. 묵묵한 것이 비결인가요?... 그래... 묵묵히 계절을 맞고 묵묵히 살아갈게요. 그러니까 나무 씨,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오.... 나무의 묵묵함을 단 1%만이라도 우리 안에 간직할 수 있다면....


햇살이 단풍나무잎 사이를 지나 내게 오는 중
별을 가득 달고 있는 나무


다시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는다. 바퀴가 큰 로드 자전거 한 대가 신호도 없이 앞질러 간다. 이런, 깜짝이야. 여보슈, 거 참... 조심히 가슈. 오르막을 힘겹게 오르니 삭막한 공장이 나타난다. 저 공장은 무엇하는 곳일까, 하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메타세쿼이아길이 나타난다! 뭐야. 너무 예쁘잖아. 아직 어린 메타세쿼이아지만 쨍한 햇살로 인해 짙은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줄지어 서 있다. 아마도 자전거길을 조성하면서 심은 나무들인가 보다. 혼자 누리기 너무 아까운 걸.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자전거를 세운다. 자전거와 함께 길도 찍고 셀카도 찍었다. 자전거 한 대가 지나가며 안전한 라이딩되세요. 명랑하게 소리친다. 그 소리가 햇살만큼 환하고 메타세쿼이아만큼 젊다. 


메타세쿼이아길과 자전거


머리를 채우고 있던 근심덩어리들이 메타세쿼이아길을 보며 슬그머니 사라졌다. 근심은 안개를 닮았다. 햇빛아래 안개가 사라지는 것처럼 근심도 그렇구나. 마음에 햇살이 들어오면 녹는구나. 자전거로 가는 이 길이 햇살이구나. 마음이 꽉 차 오르며 충만한 기쁨이 메타세쿼이아를 따라 줄지어 간다.


내린 빗물에 낙엽이 잠겨있고 꽃은 향기가 진하다


밤기온이 낮아 나뭇잎들이 거뭇거뭇한 것이 예년보다 단풍이 밝지 않다. 그래도 눈 가는 곳마다 예쁘다. 아직 물들지 않고 푸른 은행나무는 은행을 우두두 떨어뜨려 놓았다. 행인 하나가 은행을 밟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까치발로 지나간다. 자전거는 피해 갈 수 없다. 그냥 지나친다. 냄새 좀 나겠군.


떨어진 은행

길가 풀들과 꽃들에게서 햇살 아래 익어가는 노란 냄새가 난다. 왜 노란 냄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떠오르는 감각이 노랗기 때문이다. 노란 감각을 떠올리는 것은 관습적인 기억 때문일까, 아니면 이 또한 감각적인 편견일까. 음식이 고소하게 익을 때의 색깔이 대부분 노릇노릇해지는 것에서 온 이미지 때문일까. 어떤 생각이나 파생되는 이미지들은 그 생각과 이미지의 정체와는 다른 것일 수도 있겠다. 또 객쩍은 생각이 한 움큼 똬리를 트는데 목적지가 보인다. 고소하고 노란 길을 지나오니 자전거와 몸은 한층 더 가까워졌다. 몸을 움직이는 것엔 움직인 사람만 알 수 있는 희열이 있다. 희열은 정직한 기쁨이다. 

오늘도 즐라했습니다!


건조해지는 풀과 꽃-향기가 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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