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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 Sep 19. 2024

연휴 일기

색연필 그림일기 2


장장 6일의 연휴였다. 여행을 간다든가, 자전거를 탄다든가, 무엇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날씨 때문이다. 9월 하순으로 접어든 이즈음의 날씨는 삼복더위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밤에는 여전히 열대야로 잠을 설치고 낮에는 볕이 뜨겁다. 빨래한 수건을 내다 널으니 1시간도 되지 않아 바싹 마른다. 도시가 아닌데도 이렇듯 더우니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어떨까....


길이 막히기 전에 다녀온다며 어머니께 갔다. 미리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으셨다. 그래도 집에 계시려니 하고 길을 나섰다. 다행히 길은 막히지 않았지만 어머니 집은 비어있었다. 어딜 가신 건지 여러 번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어머니를 기다리는 동안 가까운 거리에 사는 투투의 형제 마루를 보고 왔는데도 오시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선물 상자를 현관 옆에 두고 돌아섰다. 나중에 들으니 성당에 가셨다고 했다. 오빠 내외가 이미 다녀갔다며 모두의 안부를 주고받고 끊었다. 기운찬 어머니 목소리가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우리 가족은 따로 명절을 지낸다. 시어머니께서 요양원으로 가셨고 큰애가 결혼을 하면서 어머니 계시던 형님 댁에 갈 일이 줄었다. 동서 형님과는 카톡으로 문자를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누는 것이 최근의 모습이다.


명절을 핑계 삼아 가까운 사람 몇몇에게 참기름과 들기름을 선물했다. 기뻐하는 모습이 좋았다. 나 또한 복숭아와 배, 와인 등을 선물로 받았다. 참기름과 들기름의 맛이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복숭아는 아주 달고 맛있었다.


여러 가지 과일이 든 상자와 소고기를 들고 온 며늘 아이가 전은 언제 부치냐고 물었다. 전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며 번거롭게 뭘 특별한 음식을 하느냐, 시간 되면 저녁이나 한 끼 먹자고 했다. 시어머니와 산적을 만들고 김장하는 것이 로망이라고 했던 며늘아이는  번의 명절과 한 번의 김장으로 로망을 실현했는지 명절 음식을 하지 않는다는 말에 "정말이세요?"라며 눈을 똥그랗게 떴다. 웬 고기냐고 하니 이번 연휴에 친정 부모님과 전라도 여행을 가기로 했다며 맛있게 드시란다. 아하! 그럴 땐 맛있게 먹어야 한다. 그래야 애들이 좋아한다. 며늘 아이는 부모님과 여수 여행을 갔고 그녀의 남편집으로 친구들을 불러 밤새 놀았다.


우리 부부는 실컷 자고 늦게 일어나 늦은 아침과 이른 저녁을 먹고 해가 지면 우리 집 개와 산책을 했다. 영화를 두 편 보았고 "허송세월"의 밑줄 내용을 노트에 옮겼다. 밑줄 문장이 많아 읽을 때보다 시간이 걸렸다. 문장을 따로 옮기니 진정한 허송세월의 기분이 들어 아주 좋았. 유튜브 영상을 보며 그림 공부를 했고 밀린 일기를 썼다. 정리를 하기 위해 리클이라는 앱을 깔아 수거신청을 했고 수영복 하나를 주문했다. 명절 연휴가 지나면 의류 담을 봉투를 보내겠다고 했다. 옷이 많아 정리하려고 하면서 또 옷을 사는 이 모순은 긴 연휴의 부작용이다. 낄낄거리친구들의 비웃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간간이 카톡이 울리며 명절 인사가 날아왔다. 뉴스엔 명절을 맞아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왔다. 농업이 산업의 전부였을 때 첫 수확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만들었을 명절. 존엄한 먹거리 수확을 감사하며 축제를 벌이던 명절의 풍습은 해외로 나가는 풍습으로 계승되고 있다. 풍습이 달라지니 풍경이 달라지고 달라진 풍경은 또다른 시대흐되었다. 단순히 시대의 변화로 받아들여야 할까. 여전히 어느 집에선 명절 증후군을 겪는다고 큰소리 칠지도 모르겠다.  곳에 머무는 것은 없다. 또 객쩍은 생각들....


휴일 5일째. 수영이 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산책을 더 멀리 나가 땀을 흠뻑 흘리고 들어와 샤워를 했다. 수영을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9월 하순인데 여전히 무덥다. 젊었을 땐 참을성이 없어서 더위가 힘들었고 나이를 먹으니 몸이 힘들어 더위가 무섭다. 내년엔 올여름 더위보다 더하다는데, 몸은 더 나이들 것이고.... 작년 추석을 생각하니 그 차이가 확연하여 두렵다. 널어놓은 빨래를 걷는 5분여 동안 땀이 뒷덜미를 타고 흐른다. 그러나 집과 마주하고 있는 앞산은 더 이상 여름이 아니다. 숲의 빛깔이 달라지고 있다.


연휴 마지막 날. 클레어 키건의 "푸른 들판을 걷다"를 읽었다. 봄에 "이처럼 사소한 것을"을 읽었는데 그녀의 소설은 제목에서 끌리는 것이 있다.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상실들.... 슬픔을 말하지 않는데 슬픔이 가득한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는 느낌.... 이야기를 엮는 재주탁월하다. 아는 작가님이 책을 고른 이유를 물어서 "최은영 작가가 추천했다잖아요" 했다. 유명세는 물리치기 어렵다.


연휴가 끝났다. 남의 밑에서 밥 벌어먹을 땐 긴 연휴에 환호하고 휴일이 끝나는 날 우울했었다. 휴일은 생존의 노동이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 노동은 고단하고 연휴는 피로하다. 빨간 날이 끝났으니 수영장에 갈 수 있다. 수영장에 가야  진정한 허송세월의 시공간을 누릴 수 있다. 가열찼던 더위도, 위대한 여름도 지나간 무언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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