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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아프다면

필사하며 나누며

by Eli


* 이 매거진은 fragancia 작가님의 필사 모임에서 제공된 자료를 토대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 이 매거진은 fragancia 작가님과 공동으로 하는 글쓰기입니다.

* 이 글쓰기의 목적은 필사 문장을 다시 음미하고 확장하려는 데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팔다리 같은 것만 가진 존재라면 삶은 견딜만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마음이라 불리는 작은 기관을 가지고 있으며 이 마음은 병에 걸리기 쉽고 병에 걸릴 동안에는 어떤 사람의 삶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극도로 민감해져서, 만일 거짓말이 - 우리가 하거나 남들이 했을 경우에는 별 해를 끼치지 않으므로 그 안에서 즐겁게 살아갈 수 있지만 그 사람으로부터 와서 우리의 작은 마음에 참을 수 없는 발작을 일으키면, 외과 수술을 통해 그 마음을 제거해야 한다. 뇌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0, (마르셀 프루스트) -



질문 : 마음의 병에 걸렸을 때, 당신만의 치유방법은?





".... 이 마음은 병에 걸리기 쉽고 또 병에 걸린 동안에는 어떤 사람의 삶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극도로 민감해져서...."


심장이 덜컥 덜컥 내려앉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무리 호흡을 하려고 해도 한 번 과호흡이 오면 제대로 숨 쉬기 어려웠다. 한 번은 운전을 하다가 지난 일이 생각났다. 심장을 쥐어짜는 느낌이 들었고 도로 한가운데에 차를 급정거하고 말았다. 뒤 따라오던 차가 클락션을 울리며 욕을 하고 지나갔다. 나는 간신히 비상등을 켜고 갓길에 차를 세우고 엎드려 있었다.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그 사람과 비슷한 뒷모습, 말투나 습관 같은 것을 보게 되면 내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거렸고 숨이 가빠왔다. 자주 한숨을 쉬었다. 제대로 호흡 한 번 시원하게 하고 싶은데 그게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었다.


살기 위한 본능이었던 것 같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노을을 보다가 무작정 뛰쳐나가 걷기 시작했던 날은 겨울이었다. 손과 귀가 시렸고 머리가 띵하게 아팠다. 차들이 나를 위협하면서 휙휙 지나갔다. 10분이나 됐을까. 장갑과 모자가 아쉬웠고 따끈한 커피 한 잔이 생각났다. 무엇보다 넓적 다리와 엉덩이 등이 참을 수 없이 가려웠다. 추위 때문이기도 했지만 쓰지 않던 몸을 쓰니 나타나는 반응이었다. 30분 남짓 걷고 겨우 집으로 돌아온 나는 비참했다. 몸도 마음도 엉망진창이었다.


내 장점 중의 하나는 무엇을 하기 전에 충실하게 사전공부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볼링을 치겠다고 하면 볼링에 관한 입문서를 읽고 수영을 시작하면 수영에 관한 책과 동영상 등을 보면서 미리 공부한다. 걷기도 마찬가지였다. 홧김에 무작정 준비 없이 뛰쳐나간 날 큰 교훈을 얻은 나는 도서관으로 가서 걷기에 관한 책을 빌려 왔다. 그 책들이 건네는 조언들을 읽으며 운동화와 방한 장비 등을 구입해 걷기 시작했다.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을 읽으면서 목적 없는 걷기가 변화되었고 그 변화는 창작으로 이어졌다. 나는 다시 진정된 마음으로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나에게 걷기는 응급실에서 만난 응급 처치였다. 걷기가 아니었다면 수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며 무엇보다 사람답게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걸었는지 정리해 본다. 걷기에 대한 경과보고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1. 걷기 내용과 효과


"좋은 약을 먹는 것보다는 좋은 음식이 낫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보다는 걷기가 더 낫다." (동의보감)


- 기간 : 2020년 11월부터 22년 8월까지는 집중적으로 걸었고 그 이후는 수영과 병행하며 틈나는 대로 걸었음.

- 하루 평균 약 11킬로, 하루 걸음 수 13,000보 이상. 처음엔 5,6000보 정도 걸었다. 보름쯤 지나니 8,000보가 되었고 한 달이 되자 걷기에 자신이 생겼다. 시간이 많은 날은 16km 정도 걸은 날도 있다. 3시간이 넘는 거리다. 만보가 모두에게 좋은 건 아니지만 그 효과와 의미는 분명히 있다.

- 체중 7 kg 감량. 요요 없음. 비염 없어지고 습관적 두통과 불면증, 무기력한 만성 피곤증이 사라졌으며 신체적 가벼움이 내면적 움으로 이어짐. 무엇보다 미움과 분노가 사라짐.


2. 생각들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가까운 기억에서부터 미뤄 둔 기억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까지. 기억만 떠오르면 좋은데 그 기억과 함께 감정이 활활 살아 따라왔다. 걸으면서 미친 사람처럼 화를 내기도 다. 애꿎은 나무 앞에 서서 주먹질과 발길질을 했다. 내 손과 발만 아파 동동거리다가 다시 미친 ×처럼 낄낄대고 웃었다. 기억을 따라온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 말을 다 하지 못했다고 소리를 질러 대며 뒤늦게 분노했다. 그러고 나면 허탈해져서 흘러가는 냇물을 보며 한 참 서 있었다. 여러 번 이런 일이 반복되다가 서서히 진정되면서 담담해졌다. 더 이상 길에서 소리 지르지 않았고 마음속의 싸움이 슬그머니 없어졌다. 그 대신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나뭇잎의 색깔과 냇물 소리, 피고 지는 들꽃을 보며 걷는 행위 자체에 집중하게 되었다.


"걷기는 염증을 일으키는 이소지방을 감소시키고 뇌를 변화시킨다.-김진영


걷기의 과정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귀에 꽂은 이어폰을 뺐다. 걷기 자체에 몰입하면서 바람과 냄새, 길의 풍경을 즐겼다. 기다렸다는 듯 멋진 생각들이 떠올랐고 나는 너그러워졌다. 계절별로 집안 정리는 했지만 나의 감정과 생각, 더 나아가 관계 정리와 기억의 정리는 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특히 관계 정리를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면서 새로운 감정이 변화된 태도로 나타났다. 나는 스트레스에 약하다는 사실(그렇게 태어난 사람도 있다)과 그저 참고 견디는 것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것,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 좋은 사람이란 평가를 받고 싶어 했다는 것 등을 자각했다. 나의 한계를 인식하며 나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살기로 했다. (이 내용에 관한 것은 그동안 발행한 브런치 글에 담겨있다)


3. 바람


기온이 내려가면 추운 기온보다 부는 바람이 걷는 이를 괴롭힌다. 추위를 몰고 오는 건 물론이고 앞으로 쉽게 나가지 못하게 한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은 걷기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도 했고 실제로 돌아온 날도 있다. 그러다 어느 날은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리라 생각하며 걸었다. 걷다 보니 바람이 심하게 분다고 해도 매 순간 쉬지 않고 부는 것은 아니라는 것. 한바탕 휘저으며 바람이 지나가면 주변 공기가 매우 얌전해진다. 바람은 한 곳에 머물지 않으며 차갑고 거친 바람만 부는 것도 아니었다. 겨울에도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있고 콧등을 스치고 지나가는 다정한 바람도 있다. 바람이 불 때는 옷깃을 여미고 바람이 자면 옷깃을 푼다. 놀랍게도 산다는 것과 그 리듬이 같다. 기쁜 일도 지나가고 슬픈 일도 지나간다.


4. 신발


걷기 위한 장비로 제일 중요한 것은 신발이다. 평소보다 두꺼운 양말을 신었을 때 편한 것이 발에 맞는 것이다. 신발은 가벼워야 하며 밑창은 발바닥을 편하게 자극해 주어야 한다. 너무 납작하여 지면을 그대로 느끼는 것도, 너무 두꺼워서 공중에 붕붕 떠다니는 느낌을 주는 것도 좋지 않다. 무엇보다 내 발에 맞게 길들여진 신발이 제일 좋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워킹화에 발바닥을 편안하게 압박하는 신발 깔창을 따로 구입해 넣어서 신었다. 이것저것 유명 브랜드도 신어보았으나 가장 좋았던 것은 몽벨 트래킹화였다. 가성비도 좋고 아주 편안했다. 같은 사이즈의 여성화와 남성화를 다 신어보았는데 발볼이 넓은 나는 남성화가 더 편했다. 여성화와 달리 발가락이 좍 펴지며 피로감이 덜하다. 비와 눈에 대비해 고어텍스 신발도 추천한다. 몸이 젖는 건 괜찮지만 발이 젖으면 제대로 걷기 힘들다. 꼭 필요하다.


5. 거리와 속도


걷기를 위한 거리는 얼마가 좋을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만보를 떠올릴 것이다. 만보는 약 9킬로의 거리이다. 짧은 거리가 아니다. 4킬로미터를 처음 걸었을 때 나는 1시간이 넘게 걸렸다. 4킬로미터는 너무 먼 거리였고 고단했다. 골반이 아파 어기적 거리며 앉거나 일어서는 일이 고통스러웠다. 그러다 걷기에 익숙해지면 더 걸을 수 있겠다 하는 지점이 온다. 그때는 거리를 더 늘려도 괜찮다. 나는 16km까지 쉬지 않고 걸은 날도 있다. 속도 역시 걷기의 시간과 비례해 적당히 빨라진다. 너무 느린 속도로 어슬렁거리며 걷는 것은 몸이 쳐지는 경향이 있어 좋지 않다. 힘들면 차라리 잠깐 멈춰 쉬는 게 낫다. 걷기와 산책은 다르다. 걷는 이가 감당할 정도의 조금 빠른 속도와 꾸준하고 일정한 리듬으로 걸어야 덜 힘들다. 걷다 보면 몸이 알아서 정한다. 몸이 정하는 속도와 거리에 동의하기만 하면 된다.


6. 날씨


비가 내리거나 눈이 온다고 삶을 멈추진 않는다. 날씨에 따라 걷는다면 실제로 걸을 수 있는 날은 많지 않다. 기온이 -22도로 내려가도 혹은 30도가 넘는 폭염에도 삶은 계속되는 것처럼 날씨를 선택해 걷는다면 걷지 못한다는 뜻이다. 겨울이 시작되는 달에 나는 걷기를 시작했다. 기온이 내려가고 얼굴에 닿는 칼바람을 느꼈을 때 날씨가 좋은 날 걸어야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날씨가 좋은 날, 즉 걷기에 좋은 조건을 갖춘 날씨는 그렇게 많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날씨가 걷기에 영향을 줄 수는 있겠지만 걷기를 중단하는 요인은 아니다. 날씨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걷기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다. 비옷을 입는다든지, 핫팩을 쥐고 나간다든지 하며 날씨에 따라 현명한 대비를 하면 된다.


7. 걷기 코스


걷기 코스는 살고 있는 곳의 환경과 처지에 맞게 스스로 구성해야 한다. 단조롭지 않도록 서너 개의 길을 만든다. 복잡하지 않게 준비하는 게 좋겠다. 결심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곳은 전원주택지다. 처음에 나는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잘 걸을 자신이 없어서 언제든 집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4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주로 자동차 도로였기에 걷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차들이 다녔고 집집마다 대문을 지키던 개들이 시끄럽게 짖어댔다. 안전하지 않았고 피곤했다. 집에서 가까운 산속 숲길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갔다. 지역의 걷기 코스와 연결된 길이었는데 전나무숲이 있고 낙엽이 가득한 길이다. 중간엔 약수터도 있어서 따로 물을 들고 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 길은 내게 구원이었고 치유의 공간이었다. 숲길을 걸으며 나는 점차 회복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숲 속의 약수터에서 물을 마시며 시끄러운 세상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은 굉장히 편안했다. 다만 뱀이 간혹 출현해서 놀랄 때도 있었지만 누구 말대로 나 때문에 뱀이 더 놀랐을 거다. 따뜻해지기 시작하면 방울 달린 스틱을 들고 다녔다. 직선거리의 단조로운 길이 아니라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고 빽빽한 전나무 숲과 목을 축일수 있는 약수터가 있는 숲길에서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미소를 지었다. 요즘은 지역마다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으니 그런 곳을 물색하는 것도 좋겠다.


8. 그 밖의 블라블라


걷기를 통해 사람이 되었고 수영을 통해 자유를 얻었다고 나는 말하곤 한다. 지금은 10Km의 걷기가 아니라 2, 30분의 짧은 산책을 하고 있다. 그러나 걷지 않는 날은 거의 없다. 아침마다 우리 집 개와 산책을 하고 저녁에도 별 일이 없다면 공원으로 가서 산책을 한다. 전원에 산다는 것은 분명 행운이다. 아스팔트가 아니라 흙길과 낙엽이 뒤덮인 길을 매일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허벅지나 엉덩이가 가렵지 않고 수영장에선 거뜬하게 레인을 돈다. 집으로 오는 오르막 길도 헉헉대지 않고 쉼 없이 한 번에 올라온다. 슬프고 비관적인 감상에 자주 빠지곤 했는데 나는 다시 명랑해졌다.


리베카 솔닛은 "보행의 리듬은 생각의 리듬을 낳는다."라고 썼다. "풍경 속을 지나가는 일은 생각 속을 지나가는 일의 메아리면서 자극제"이고 "마음의 보행과 두 발의 보행이 묘하게 어우러진다"라고 했다.(리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많은 작가들이나 예술가들은 걷기를 통해 영감을 얻었고 그 영감은 창작으로 이어졌다. 또한 걷기는 사회적인 운동의 평화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간디가 그랬고 마르틴 루터 킹 목사 또한 자신들의 신념을 대중과 함께 알리는 방법으로 걷기의 행진을 했다. 걷기는 단순한 신체활동이 아니라 정신적이며 사회 문화적인 움직임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구체적 행동이다. 마음이 아파 병원에 간 나는 햇빛을 보며 걸으라는 의사의 처방을 받았다. 커튼을 닫고 침대에 누워 지난 일을 곱씹으며 원망과 미움 속에서 망가져갔지만 일어나 걸었다. 사람은 스스로 일어날 힘을 갖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어느 날 무작정 걷기 시작한 나는 전보다 더 건강해졌고 다시 마음이 무너져도 어떻게 나를 일으켜 세울지 알기에 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


걷다가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볼 때가 있다. 꽤 멀리 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 기분이 묘해진다. 저 길을 내 두 발로 걸어왔구나, 이렇게 비가 내리는데도 내가 걸어왔구나, 하며 스스로 대견해진다. 비가 내려도 해가 뜨거워도 묵묵히 걷는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삶에서 그렇게 걷고 있다.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 그러나 마음을 일으켜 걷기 시작하면 변화가 일어나고 이 변화는 몸을 건강하게 한다. 건강해진 몸은 다시 마음을 돌보는 선순환으로 이어진다. 혹시 누구 때문에, 어떤 상황과 사건 때문에 상처를 입었다면 상처 입은 상태로 웅크리고 있지 마시라. 일단 집밖으로 뛰어나가 다리가 아프고 목이 마를 때까지 걸어 보라. 비가 오거나 너무 더워서, 혹은 너무 추워서 못 걷겠다? 그런 것들은 오히려 더 큰 성취감을 안겨준다.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면, 나를 회복하고 싶다면, 누굴 미워하는 감정 소모에서 해방되고 싶다면, 내일부터가 아니라 지금 당장 걸으시라. 변화는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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