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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샐빛 Jan 26. 2022

6. 어떻게든 끝나긴 할 테니까

통깁스를 하고 나서 아이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통증도 줄어들고 근처 의료 상가에서 휠체어를 빌려 집안에서 움직일 수도 있게 되었다. 아이들은 확실히 적응이 빨랐다.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불편보다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니는 재미를 더 먼저 느끼고 있었다. 하루 24시간 대소변 수발을 드는 엄마의 고단함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아이가 차도를 보이고 있는 동안, 나는 병원에 가서 조직검사를 받았다. 일반 촬영 검사도 굉장한 고통과 부끄러움을 동반하는데, 그나마 조직검사는 부분 마취를 하고 나서 진행되는 거라 고통은 없었다. 다만 무시무시한 바늘이 내 가슴을 뚫고 들어가는 모습과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각종 피, 조직 같은 것을 눈으로 보고 있으려니 좀 섬뜩했다. 검사가 끝나고 나서 압박붕대를 감고 있어야 하는데 그게 제일 힘들었다. 당분간 힘쓰지 말고 팔을 들지도 말라는 데 당장 아이를 들고 화장실에 가야 하는 내 팔은, 안타깝지만 그런 호사를 누릴 수 없었다. 


다른 많은 일들도 내가 처리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아이는 유치원에서 퇴원 절차를 밟았다. 유치원 중퇴라니. 아직 7세밖에 안 되는 인생에 이상한 학적사항이 기록되었다. 3년을 다니고 졸업까지 할 줄 알았는데, 아니 적어도 하노이에 가기 전까지는 등원을 할 줄 알았는데. 아이가 유치원에 간 시간 동안 차근차근 나머지 일들을 진행하려고 했던 모든 계획은 어그러졌고 아이는 정든 유치원에서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한마디 인사도 못한 채 혼자서 작별을 해야 했다.


게다가 남편이 쓸데없이 신분증을 가지고 하노이로 가 버리는 바람에, 남편 명의로 된 모든 것들을 해지하거나 처리하는 데에도 애를 먹었다. 국제우편으로 겨우 신분증을 받았지만 각종 렌털 기기, 인터넷 등을 해지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수없이 통화하고 민원을 제기했지만 이민이 아닌 해외 거주는 인정해 주지 않아 해지 수수료를 물어야 하는 것들도 있었고, 차 명의 이전을 위해 인감을 대리로 떼는 과정에서는 남편이 위임장을 써 준 척 가져갔다가 위임장을 잘못 작성했다며 다시 떼오라길래 겨우 남편과 통화를 한 후 인감을 떼기도 했다. 


집 계약도 순탄치 않았다. 새로 들어올 임차인이 우리 집 상태에 대해 태클?을 걸면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수리 비용을 물어줘야 했다. 좀 더 쌈닭이 될 수도 있었으나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은 돈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잔금도 치르지 않고 가구를 들여놓는 걸 양해해 줬는데도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게 괘씸해 잔금을 받기 전날 현관 비밀번호를 바꿔버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소심하고도 유일한 복수였다.


그리고 마지막 복병은 짐 정리였다. 이사를 처음 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힘든 적은 처음이었다. 일단 견적을 받을 때부터 컨테이너 하나에 다 들어가기에는 아슬아슬하니 짐 정리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어서 온 집안을 뒤집어 가며 버릴 것들을 찾았다. 그동안은 혹시 몰라 이고 지고 다녔던 한복, 오래된 침구류, 안 입는 옷들, 아이 장난감, 묵혀두었던 서류나 책, 온갖 전자기기 설명서 등 서랍 하나하나를 뒤져가며 버리고 또 버렸다. 이삿짐을 싸기 편하도록 자질구레한 것들은 다 지퍼백에 담아 놓았고 귀중품은 따로 챙겨야 했다. 냉장고를 가득 채운 음식들, 수납장 속 조미료들은 가져갈 수 없어 엄마가 한 보따리 싸서 친정으로 옮겼다. 


잠시라도 엉덩이 붙일 짬이 날 때에는 모바일 쇼핑을 하느라 쉴 수도 없었다. 하노이에서 구하기 힘든 것, 아이에게 필요한 것들, 가서 당장 써야 하는 물건 등 자질구레한 것들을 사모으느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원래 모바일 쇼핑을 좋아하지 않는 나였지만 가까운 마트에 조차 갈 수가 없으니 모든 것은 온라인으로 해결해야 했다. 날마다 산더미 같은 박스들이 문 앞에 쌓였다. 한쪽에서는 열심히 버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열심히 사 모으는 모순의 나날들이었다. 


이 모든 일들이 통 깁스한 아이에게 삼시 세 끼를 해다 바치고, 대소변 수발을 들며 아이는 아이대로, 나는 나대로 병원에 검사받으러 갔다가 결과 들으러 다니는 동안 틈틈이 해치운 일들이었다. 휴가까지 내고 집 정리를 도와주러 온 언니, 병원에 갈 때마다 아이를 봐준 엄마, 운전을 대신해 준 아빠까지 혼자서는 너무 벅차 결국 가족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대망의 이삿날이 왔고, 아이와 직접 가져가야 할 짐들은 모두 친정으로 보내 놓은 채 하루 종일 이삿짐이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이사를 와 아이를 전담으로 돌보며 4년을 살았던 곳이었다. 특별하게 많은 일들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소소하게 정이 든 곳이었고 아이의 인생이 오롯이 담긴 곳이었다. 갑자기 일어난 모든 일들 때문에 천천히 정리할 시간도 없이, 그동안 쌓아왔던 인연들과 얼굴 보며 인사할 시간도 없이 꼭 도망치는 것처럼 떠나오는 꼴이 되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정말 끝이 나 있었다. 이제 하노이에서 입국 허가서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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