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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 Apr 19. 2024

#.32 연필처럼

주간 <임울림>

오랜만에 친구랑 한 잔 걸치다가, 20대 '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친구는 내게 '넌 연필 같은 사람이었어'라고 말했다. 나의 20대를 되돌아보니 내가 써 내려간 것들에 대해 자신감으로 충만해있던 시절이었다.(충만을 넘어서 오만하기까지 했다)


문예창작을 전공으로 했던 나. 단편소설 두 편, 시 다섯 편, 평론 한 편이었나? 졸업작품을 가져와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기대 데킬라를 때려 넣던 친구들에게 읽어보라고 자신 있게 건네던 시절이었다.

친구는 그때의 나를 기억했다. 친구는 '너는 너만의 것을 가진 사람이었고, 문학 얘기를 떠들 때 가장 멋있었다'고 말했다. 그러곤 '사회적 책임을 위해 사는 인생도 좋지만, 그 찬란하게 빛나던 너만의 것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군 선임으로 있던 형을 만났을 때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중국에서 건축 일을 하던 형인데, 한국에 들어와서 터를 잡았다고 했다. 형수님이 쌍둥이를 임신했다는 기쁜 소식과 함께 얼굴을 마주했다.

형에게 지난 연애에 대해 이야기하며 '나는 나를 내려놓지 못해 걱정이야'라고 말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반응을 꺼내보였다.


'왜? 나는 네 에너지가 좋은데? 단지 그 에너지가 적절히 쓰일 곳을 못 찾았을 뿐이야.'


내가 가진 모습 그대로가 인연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외부적 요인을 고려하며 진실된 모습을 숨기기 때문에 부자연스러워지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사회적 시선에 맞춰 질책하기보다, 존중해 보는 건 어떻냐고 말했다.

그러게, 형. 나는 왜 나를 안아주기보다 질책하기만 했을까.


30대를 넘어가면서 내 인생, 늘 최선이 아닌 차선을 위해 달렸다. 그 엿 같은 책임감. 몇 년간 차선만을 위해 달리니까, 늘 하고 싶었던 것들을 등지고 내면의 나를 소홀히 하니까 그렇게 조급해지지, 멍청아.

10대와 20대의 나는 늘 내면의 나와 친밀감을 갖고 살아왔다. 마치 헤르만 헤세 소설의 주인공처럼, 내면의 목소리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명확히 들을 줄 알았고, 그걸 충족시키고 달랠 줄 알았고, 그때 가장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29살 때까지 취업 생각이 없어서 가족들은 나를 다그쳤다. 그때마다 나는 '제주도에 내려가 편의점 야간알바하면서 180만 원 받고 기타 퉁기며 살 거'라고 말했다. 돈은 그렇게 벌어도 된다고. (이런 무모한. 어디서 나온 깡다구야?)

그럼에도 나는 29살을 기점으로 내가 그동안 쌓아 올렸던 업보에 이정표를 찍고 취업했다. 그래, 결국에는 어떻게든 다 찾게 돼 있다. 시절이 톱니처럼 맞물리지 않았을 뿐, 나는 늘 스스로에 대해 자신 있었다.


'연필'로 비유해 준 친구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연필은 속에 까맣게 타들어간 마음을 품고 있다. 그건 응큼한 흑심이 아니라, 내면의 갈등과 고뇌를 이겨내어 응축시킨 산물이다. 그 까만 마음으로 한 글자씩 곱씹어 써 내려가던 내 모습을 잊지 말아야지.


개발자로 전향한 이후, 많은 사람들이 내게 '왜 글을 쓰지 않냐'고 물었다. 취재하다 만난 교수님도, 후배도, 스터디에서 만났던 분도, 고3 담임선생님도 창작에 대한 안부를 물었다. 나는 '코딩도 쓰는 건데요! 하고 있잖아요'라고 웃으면서 넘기곤 했는데, 사실 돌아보면 가슴 한 편에 씁쓸함이 남아있었다. 이제 다시 쓸 거다. 펜촉이 무뎌지고 게을러졌는데, 쓰다 보면 감각이야 금방 돌아오겠지.


연필의 장점은 쉽게 지우고 다시 써 내려갈 수 있다는 점이며, 글을 쓰는데 가장 중요한 건 퇴고다. 연필과 퇴고는 상성이 좋다. 퇴고는 늘 덜어내는 데 중점을 두는 행위다. 퇴고하는 자세가 삶을 살아가는 자세라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가.


커트 보니것의 작품에 나온 기도문을 빌린다.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차분한 마음과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와

언제나 그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요즘 스스로 많이 무너졌다고 느꼈다. 어쩌겠어? 다시 쌓아야지. 많이 무너져봤잖아. 나는 쌓기의 달인.

마음이 다할 때까지 마음을 쓴다. 비워내고 덜어내는 퇴고의 마음으로. 비록 잘못 적어낸 글자를 지우느라 종이가 더러워진다 하더라도,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쓴다. 나는 연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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