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힘
종종 사람과 인간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인간이란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강조하는 개념이라 좀 더 사회적 의미인 것으로 해석하면 되겠고, 사람이란 그 원래의 어의는 무엇일까? 살아있음을 의미하는 ‘살’에서 나온 것일 테고 거기에 명사형 어미가 붙은 것이리라 짐작해 본다. 그렇다면 살아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누군가는 생각이나 희망이나 사랑과 같은 어떤 정신이나 마음의 작동을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저항이나 진보를 말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숨을 쉬거나 움직이는 생리 현상을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것에 관통하는 어떤 게 있을 수 있을까? 니체는 그것을 힘으로 봤다. 어떤 방향에 의지가 작동하여 발휘되는 힘이 있어야 사람이라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본 것이다.
니체는 힘의 속성을 세 가지로 본다. 첫째, 힘은 복수로 존재한다.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작동한다. 그리고 그 관계는 차이와 거리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이를 통해 우리는 모든 부분이나 사건들은 서로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둘째 힘은 반드시 표현되는 것이다. 표현되지 않는 것은 힘이 아니다. 그런데 그 표현이라는 활동은 어떤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원자와 같은 주체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고대 인도의 베다에서 말하는 불멸불변의 절대 궁극인 브라흐만-아뜨만의 존재를 붓다가 부인하면서 그들이 말하는 그런 본질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듯, 니체는 본질이라는 원자와 같은 것을 주장하는 기독교 신앙을 반박했다. 셋째, 힘은 정지되어 있는 양이 아니다. 즉 멈추어 있는 힘이란 없다. 힘은 ‘정지’나 불변‘과 싸우면서 본질적으로 변화한다. 그런데 그 힘은 하나의 방향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어떤 힘이 나오면 그 힘에 대항하는 또 다른 의지에 의해 힘이 나온다. 그것이 니체가 말하는 힘의 기본 원리다.
니체의 힘을 좀 쉬운 일상의 예를 들어 이해해보자. 많은 사람들이 겪은 일이고 누구든 흔하게 무너져버린 담배에 대한 이야기다. 나도 그 숱한 사람들이 해왔듯, 담배를 끊은 숱한 경험을 가졌다. 최장 8개월까지 끊어봤으나 결국 현재는 담배를 피우고 있다. 담배를 끊어야 할 때 드는 여러 가지 충동과 논리들은 어떤 의지를 만들어 금연의 방향으로 힘을 작동하게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술을 마신다거나 부부 싸움을 한다거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전화를 받았다거나 누군가와 논쟁에 빠졌다거나 하는 일이 생기면 처음의 의지를 흔들어 결국 좌절시키는 또 다른 힘을 발생시킨다. 이러한 의지의 충돌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그것들은 계속 채워질 수 없는 욕망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사람은 결국 불행해 질 수 밖에 없다고, 염세주의 철학을 설파했지만 니체는 그 고통도 결국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것을 긍정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니체에게 모름지기 사람이란 고통을 이겨내기 위하여 끊임없이 싸워 이겨내는 강한 힘에의 의지를 가진 자다.
누군가는 담배를 끊는다. 하루에 두 갑을 피우던 사람도 끊는다. 아니 내 쪽의 변명은 하루에 두 갑을 피우는 사람이니까 끊을 수 있다. 나는 하루에 다섯 개비 이하를 피우기 때문에 그것을 끊지 못한다. 이걸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난, 고통이 다른 사람보다 크지 않기 때문에 담배를 끊어야 된다는 의지가 발동하여 힘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담배를 끊은 사람과 나같이 끊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는 분명히 질적인 차이가 존재해야 한다. 본질적으로 힘을 작동시키는 힘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차이를 없애고 평등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의 근본을 말려 죽여 버리는 아주 비(非)인간적인 조치다. 사랑과 연민을 발휘해 그 힘이 약한 사람을 구호하는 여러 제도나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능력을 인정하는 민주제나 사회주의 제도나 다 비인간적인 것이다. 이것이 니체의 기본 생각이다. 이에 대한 학문적 의미 부여에 대해서는 난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차이가 사회 제도로 어떻게 연계될 수 있을지, 그가 민주제와 사회주의의 기본 원리를 비판한 것인지, 차별 제도의 세습과 용인마저 인정해야 하는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 그가 말하는 강자 즉 힘 있는 자는 문자 그대로 ‘귀족’이나 ‘주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흔히 말하는 봉건적 의미에서의 그런 ‘귀족’이나 ‘주인’을 니체는 ‘천민’이라 불렀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힘’을 사회 제도의 문제로 직접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은 철학적 사유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저지른 과오라 본다.
그래서 나는 니체로부터 취할 수 있는 철학적 사유만 취할 것이다. 사람은 사람마다 힘에의 의지의 차이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힘이 부족한 사람은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고통을 겪고, 싸워 이겨내야 한다는 사실은 취할 것이다. 그것은 사회 제도와의 관련 이전에 사람 개체에 대한 본성적 고찰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말하듯, 힘의 원천인 주체적 관점을 기르고, 그 과정에서 타인들이 평가하는 바를 그대로 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니체가 말하는 노예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주변과 불편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감수할 부분은 감수하고 사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것은 내가 살아온 길이고 앞으로 살아갈 길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싸움의 길이 주체와 실존의 길이지, 타자에 대한 비판과 평가에 대한 길이 아님은 몇 번이고 되새김하고 또 되새김 할 것이다.
길지 않은 인생이지만 지난 60여 년, 돌이켜 반추해보면 삶은 끝없이 펼쳐지는 싸움의 연속이었다. 교수가 되기 위한 싸움, 대학과 사회를 민주화하기 위한 싸움, 학문을 하는데 온갖 유혹과 무능력을 이겨내기 위한 싸움, 아들과 딸을 잘 양육하고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도와주고 사랑하는 데 필요한 싸움. 굳이 정치적이나 사회적 혹은 국제적 차원에서의 집단 갈등이나 싸움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굳이 주체니, 자아니, 깨달음이니, 긍정이니 하는 따위의 철학적 차원에서의 싸움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나의 지난 삶은 작고 자잘하지만, 싸움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 사이에 어떨 때는 나의 의지에 반대 되는 방향에 꺾여 좌절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이겨내 다음 단계의 더 치열한 싸움으로 들어가면서 한껏 평화와 안락을 즐기는 경우도 있었다. 앞으로 남은 삶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무슨 일이 닥치고 벌어지더라도 그것을 이겨내는 힘에의 의지가 나의 삶을 이루는 실체가 될 것이다.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규정하거나 평가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 싸움을 요란하지 않고 잔잔하게 해나갔으면 하는 소망만 가질 뿐이다.
"어떤 사물, 어떤 관습, 어떤 기관의 ‘발전’이란 하나의 목적을 향한 진보 과정이 아니고 ... 오히려 그것은 다소간 깊어지고, 다소간 서로 독립적으로 그와 같은 사물, 관습, 기관에 미치는 제압 과정의 연속이며, 방어와 반(反)작용을 목적으로 시도된 형식의 변화이자 또한 성공한 반대 활동의 성과이기도 하다. 형식은 유동적이지만, 그러나 ‘의미’는 더욱 유동적이다."
《도덕의 계보》 제2 논문 12.
당신은 어떻게 혼자이고, 어떻게 함께 인가?
당신은 말을 할 수 있는가, 말을 할 수 없는가?
당신은 흘러가는가, 멈춰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