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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Jan 03. 2021

니체의 눈으로 보라. 18

17. 의지

흔히 안 봐도 안다, 라고 하거나 안 보고도 믿는다, 라고들 한다. 기독교 신자든 아니든 《바이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을 툭하면 들먹일 정도로 사람들은 믿음이 이성보다 더 앞선 것임을 말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의 반대는 ‘불신’이 아니고 지식이고 과학이다. 그런데 요즘은 희한한 게, 그 믿음을 증명하는 길로 과학을 동원한다. 소위 창조과학이라는 것을 말하려 하는 것이다. ‘믿음’을 과학이라는 지식으로 증명한다는 것인데, 사실 그로 인해 ‘믿음’의 존재론적 가치 자체가 부인되어 버리는 것인데, 그걸 모른다. 믿음조차도 과학 즉 지식에 종속되어버린 세태의 결과다. 그만큼 그 믿음의 세계에 발을 디딘 사람들의 철학이 빈곤하다는 것이다. 그 세계에 있으면서도 믿음보다 그 믿음 세계 바깥의 논리인 과학 지식에 더 기댄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은 저 믿음도 저 지식도 모두 다 자기 자신의 주체적인 것이 아니다. 의지가 결여되어 있어서 무엇을 위해 믿음이든 지식이든 그 어떤 것을 기반으로 삼고, 그 위에서 스스로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모른다. 그것이 없으니 뭔가에 속박될 수밖에 없다. 때로는 믿음에 때로는 과학에 때로는 종교나 이념에 말이다.      


그런데 니체가 비판한 기독교의 원리는 그 믿음이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이런 모순이 어떻게 가능한가? 기독교 논리의 근간을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인간은 죄를 지어 심판을 받는데, 하나님인 예수가 죽음으로 구속(救贖)했고 그것을 믿는 사람은 의롭게 되어 심판을 면한다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의 행적을 바울이 로마라는 공간에서 코스모폴리탄 정신에 걸맞게 제도 종교로 전환시켜버린 결과다. 그런데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 죄를 지은 자는 자기 의지도 없이 죄를 짓게 되고 자기 책임도 아닌 그 죄를 다른 어떤 존재에 의해 사함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죄 사함을 받기 위해 무조건적으로 주어진 어떤 조건을 믿어야 하니,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 되어야 하니, 그것은 절대적인 신의 섭리에 의해서, 가 된다. 그래서 이 믿음의 세계에서는 지고의 선인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영광으로서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누구나 반드시 죄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믿음이 절대적인 열쇠가 되고, 그래서 믿음이 현실을 구축해버리고, 심지어는 가해자가 믿음을 가져 믿음을 갖지 않는 희생자를 구축해버리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결국 그 믿음의 세계에 인간의 의지 같은 건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도 자유의지가 중심이라고 한다.      


구원을 받기 위해 스스로 죄인이 되어야 함을 감사해 하는 인간적 행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것을 허무로 볼 것인가, 퇴폐로 볼 것인가, 염세주의로 볼 것인가? 행위라 하는 것은 행위자가 할 의지가 있어서 행하는 것이다. 자기의 의지로 행한 것이 행위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행위가 아니다. 행위라는 것은 법적 포상이나 처벌을 받는 근거가 되는 것인데, 거기에 행위자의 주체적 의지가 없으면 법이 규제할 수가 없게 된다. 따라서 어떤 행위가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행위자가 의지를 지니고 있어서 선택을 해야 한다. 그 행위를 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 이것을 할 것인지, 저것을 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 말이다. 행위자가 자기 행위에 상으로든 벌로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선택을 하게 하는 그의 의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믿음의 세계는 의지가 필요 없는 세계다. 이 모순을 어찌 해야 하는가?     


그러다 보니 기독교의 초기 논리가 궁색해 진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에게 신이 자유의지를 주었다고 설파하는 신학자들이 생겨나게 된다. 오로지 심판을 해야 하는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차원이다. 자유의지가 없는 상태에서 지은 죄를 신이 심판한다면 아무도 그 심판을 순순히 따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그런 신학자들의 논리에 의하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는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이유로 고안된 것이고, 그 안에서 인간은 무조건적으로 죄인이 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일련의 논리 체계를 믿는 사람만 구원을 받고,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를 니체는 철저한 노예의 논리라고 한 것이다. 그 노예의 논리가 때와 장소에 따라 모양은 달라지지만 하나의 정신으로 세계 각지의 여러 종교로 나타난다. 비단 니체가 말하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불교도 그렇고 힌두교도 그렇고 이슬람도 넓은 의미에서 다 마찬가지다.      


그러면 궁극적으로 무엇이 문제인가? 구원이나 은혜의 동의어는 죄인가? 죄가 있으니 은혜를 내려 구원을 하는 것이라는 그 논리를 당신이 가진 종교 밖에서의 일에서라면 그렇게 선선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당신의 딸이 강간을 당하고 그 강간범을 하나님이 용서해줘서 그 큰 사랑과 은혜를 체험을 했고, 당신은 그의 죄를 용서하지 못해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인이 되고, 그래서 그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손가락질 당하면서 죄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영화 《밀양》에서 보여주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믿음이란 의지가 결여되면 될수록 더욱 병적으로 나타난다. 북한과 평화협상을 노력하는 우리 정부를 지지하는 미국의 외교 대표 앞에서 엎드려 절을 하며 친북 대통령을 처단해 주십사 하고 굿을 하는 사람들이 노예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의지란 힘의 결정적 표징이기 때문에 자주적이고 주체적이어서 자신을 명령을 내리는 자로 만들고 기존의 틀이라는 권위에 반항하는 자로 만들 수밖에 없다. 그것이 주인의 길이고 그렇지 못하는 자는 노예의 길을 간다. 스스로 명령할 줄 모르는 자는 그만큼 더 간절하게 명령하는 자를 갈망한다. 그것이 바로 노예다.     


결국, 의지가 없이 벌이는 노예 행위는 예정되어 있든지 자기 의지로 저지른 것이든지 결국 노예이기 때문에 속박이라는 결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서 예정과 자유의지는 동음이의어로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궁극은 죄라는 그 자체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의문을 던져야 한다. 죄가 인간의 삶에 본질적으로 있어야 하는가? 왜 반드시 있어야 하는가? 없어도 된다면 인간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좀 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개척해 나아가야 하는데, 그 길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그 ‘죄’의 존재를 부인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 의지의 길이다.     

"신앙인에게 '참'과 '거짓'이라는 문제에 대한 양심을 갖는 것은 자기 뜻에 달려 있지 않다. 따라서 그가 그 문제에 대해서 성실한 태도를 취하면 그는 즉각 파멸하게 된다. 확신을 가진 사람은 병적으로 제약된 자신의 관점 때문에 사보나롤라(Savonarola), 루터, 루소, 로베스피에르, 생시몽과 같은 광신자들, 즉 강하고 자유롭게 된 영혼의 반대 유형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병든 영혼들, 즉 개념의 간질병자들의 과장된 태도가 많은 대중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 광신자들은 근사해 보인다. 인류는 《이성적인》 근거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몸짓을 보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이다."

 <안티크리스트> 54절



언제 뛰쳐나갈 것인가?

아니다.

언제까지 이대로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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