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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Jan 03. 2021

니체의 눈으로 보라. 17.

16. 예술

진리라는 건 없다. 그 어떠한 것도 본질인 것은 없고, 모든 건 역사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불변의 진리, 만고의 진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니체가 그 진리보다 예술이 더 가치 있다고 한 것은 당연하다. 진리를 평생 찾아가야 하는 뭇 구도자들에게는 참으로 모욕적인 말로 들릴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망치를 든 철학자라거나 다이너마이트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그런 기존의 틀에 얽매여 아직도 그런 구조를 하는 소위 그 선지자, 스승, 지식인들을 통렬히 부인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의 예술에 대한 태도를 한 발 더 들어가 들어보면, 단순히 진리에 대한 모욕의 차원에서 나오는 그런 단순한 것은 아니다.      


니체는 예술을 거짓말과 같다고 했다. 그에게 진리는 경직되고 폐쇄된 것으로 전락하고 예술은 자유와 해석의 산물로 추앙된다. 니체가 말하는 그 진리는 실체가 없는 환상이라 할 것이고, 예술은 환상에서 벗어난 것이기는 하나, 실체는 아니고 실체인 듯 보이게 한 허구이다. 그에 따르면, 진리가 환상이니, 그 진리에 따르는 삶은 허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진리라고 하는 종교나 이념의 도그마에 스스로를 얽어 매, 수동적인 삶을 살게 하기 때문이다. 마치 찬란한 빛이 내려오기 위해 그 빛의 찬란함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만든 잿더미로 뒤덮인 그런 세상을 좇는 격이다. 그런데 그 진리를 거역하는 예술가는 잿빛으로 변한 세상에서 없는 빛을 만들어내는 거짓을 행하는 자다. 니체는 예술을 여기까지 보았다.      


예술도 예술 나름이다. 니체는 진리를 추구하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혹은 사람의 마음을 아름답게 하고 치유하는 예술에 대해서는 독설을 날렸다. 합리주의와 기독교 노예 도덕에 물든 것이라 했다. 심지어 형식성에 치우친 예술 즉 흔히 말하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질병이라고까지 하였다. 그런 낭만주의 예술이란 고통을 마주하고, 그것을 거스르면서 극복하기 위해 안간 힘을 다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8세기 그들이 설정한 낭만주의는 이상을 그렸다. 그들이 설정한 유토피아라는 것은 역사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거짓을 만들어냈는데, 그 거짓이라는 게 고통을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거짓이 아니고, 치유 받고자 하는 아편 같은 거짓이다. 니체는 노예의 도덕을 바탕에 깔고 있는 그런 예술은 예술이 아니고, 허무한 퇴폐일 뿐이라고 했다.      


니체가 낭만주의를 그렇게 평가하는 것은 그가 삶을 고통으로 보았던 데서 출마한다. 그가  예의 좋은 예술의 예도 그리스에서 찾는 것은 그 고통에 대한 관점과 연결된다. 그리스인들은 삶을 끔찍하고 고통스럽게 봤다. 그 속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풀 수도 없는 수수께끼 같은 거대한 현실의 장벽을 피하지 않고 맞닥뜨렸다. 그리고 그 앞에서 어떠한 예외도 없이  삶을 헤쳐 나아가야 함을 높은 가치로 삼았다. 이러한 그리스인들의 삶의 태도가 니체에게 전형으로 박혔다. 반면 고대 인도인들은 이와 정반대의 태도를 가졌다. 삶을 고통으로, 그 고통은 끝없이 우주적 시간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본 붓다와 달리 주류의 세계관은 끝없는 윤회의 시간 속에서 저 영원한 곳 어딘가에 유토피아가 있다고 설정해두었다. 그 이상에 꽂혀 인간 주체적으로 이승의 삶을 살 것을 포기하고 도덕과 율법의 굴레 속에서 그곳 유토피아로 갈 것만을 기대하고 살았다. 현실을 맞닥뜨린 그리스는 비극을 꽃피웠고, 현실에 가치를 두지 않고 저 세상을 추구하는 인도는 희극을 꽃 피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스인들의 고통을 바탕으로 한 비극을 토대로 니체는 이 세상의 질서를 깨부수고 어지럽히는 것을 예술의 기치로 삼는다. 그래서 질서 정연한 아폴론에서 그 예술의 정신을 찾지 않고, 난장판을 벌이는 디오니소스에서 그 정신을 찾는다. 고통의 찬미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와 비슷하게 보이지만 분명히 다르다. 쇼펜하우어 염세주의와는 비슷하게 출발하지만 끝 부분에서 완전히 다른 길로 갈린다. 니체는 세계는 고통이라는 부분에서 쇼펜하우어와 입장을 같이 하지만, 그의 염세주의를 버리고 초(超)긍정주의의 길을 택했다. 반면 고대 힌두 사회에서는 질서와 이상 그리고 단계별 환영에의 도달이라는 과정을 통해 삶은 철저히 종교와 의례에 얽매이게 하였고, 그 안에서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지 않았다. 항상 질서와 율법에 순종하는 자는 진리를 볼 수 있다. 신화 속 인생은 해피엔딩으로 질서와 낙관으로 점철된다. 그래서  그 안에 담긴  현실은 무기력 그 자체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니체가 높이 가치 평가하는 그리스 비극은 '현실을 반영하는 디오니소스적 광기가 아폴론적 이성에 의해 조화롭게 포장된 것'이다. 아폴론적 이성은 디오니소스적 광기가 스스로 파멸하는 것을 막고, 디오니소스적 광기는 아폴론적 이성이 현실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막아서 서로 조화를 이룬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 비극 속에 녹아 있는 탈(脫)이성의 우연과 불합리 등을 통해 논리적 이성으로는 도저히 건드릴 수 없었던 삶의 생생한 고통과 한계를 직면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삶의 고통에 대한 묘사는 바로 삶에 대한 찬미이며, 이를 보여주는 예술이야말로 자기 긍정의 자양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성만을 중시하는 소크라테스를 거치면서 그 디오니소스적 광기가 유럽 문화에서 힘을 잃었다. 그리고 그 뒤를 기독교 전통이 이어 받으면서 예술은 완전한 종교의 시녀로 전락된다. 그리고 현실의 삶과는 완전히 멀어져버리게 된다. 니체는 바로 이 디오니소스적 탈(脫)이성, 불합리, 무질서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 제대로 된 인간다운 건강한 삶을 되찾는 것이라 했다.      


돌이켜 살펴보면, 인간이란 현실에서 살아남기보다는 환영에서 살아남기를 더 선호한다. 그러니 결국 그 환영으로 인해 삶은 더욱 파괴되고, 난장판은 더욱 심해진다. 그럴수록 해피엔딩으로 귀결되는 신화가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순환계를 깨부수고, 난장판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것이 예술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이 인간애를 추구하는 힘이 있는 예술이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마력 아래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유대만 다시 맺어지는 것 아니다. 소외되고 적대시되거나 억압되어 왔던 자연도 자신의 잃어버린 탕아인 인간과 화해의 축연을 다시 여는 것이다. ...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한 폭의 그림으로 바꾸어 보아라. 그리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땅에 엎드릴 때도 상상력을 버리지도, 움츠려들지도 말아라. 그러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다가설 수 있으리라."

《비극의 탄생》 음악정신으로부터 나온 비극의 탄생 1. 

흔들리지 않으면서 피는 꽃이 있더냐고 물으니

꽃이 아닌 꽃도 꽃이더냐고 되묻는다.

진(眞)과 위(僞), 실(實)과 허(虛)를 구별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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