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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Jan 02. 2021

니체의 눈으로 보라. 16.

15. 지식

인간을 한정 짓는 그 많은 명구들. ‘생각하는’, ‘도구를 만드는’, ‘위계의’, ‘놀이하는’ 등 그 많고 많은 것들 가운데 지금 여기 이 나라에 가장 잘 어울리는 건 무엇일까? ‘욕망하는’이 아닐까? 누구 말을 패러디 해보면, 세상은 넓고 참으로 천재는 많다. 그 천재는 전교 1등을 하고 서울대를 가거나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을 가는 것으로, 판검사나 의사가 되어 강남에 아파트를 사서 삶을 구질구질 하지 않게, 시크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 천재는 암기와 계산을 잘 하고, 성실하고 참을성이 좋아 어린 나이에도 선행 학습을 잘 해내고, 집단 규율을 잘 지키고, 모질기까지 해 그 험난한 경쟁에서 승리를 거머쥐는 사람이다. 그런데 독특한 자기 의견이 없고, 창의성이라는 건 아예 그 가능성마저 제로라서 주체적 인간으로는 크게 미달한 사람이다. 그들은 그런 주체적, 실존적 인간 그런 거 괘념치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이 택한 이러한 삶의 방식이 뭇 사람들이 따라야 할 모델이 되고, 그들이 살아온 경쟁에서의 이기는 방식은 우리 모두가 소비해야 할 샘플로 자리 잡는다. 

     

그들 소위 천재가 주는 폐해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그들의 천박한 지식이 다른 고급 지식들을 쫓아내버리는 일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지식의 세계가 그 천박함으로 획일화 되어 버린다. 그들의 지식은 삶이나 인격과는 아무런 관계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오로지 물질을 모으는 데만 쓰이고 그것을 소비하는 데만 유용하게 된다. 그것도 이 나라에서만 유독 영향력이 커진 매우 정교하게 획일화 된 객관 정보 기술일 뿐이다. 그 지식이라는 것은,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철저하게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고, 비인격화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객관이라는 이름으로 과학을 수단으로 삼아 그것의 적실성을 증명하면서 이제는 학문이란 지위까지 부여받지만, 사실 기술일 뿐이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가 사는 이곳은 지혜를 사랑하는 길은 어느 덧 쓰레기 처리장에 처박혀 버리고, 객관과 증명만이 유일신이 되었다. 이른바 공리주의이자 사회과학이 모든 지식의 외경의 대상으로 우뚝 섰다.      


그 소위 널리 통용되는 객관의 진리는 오로지 하나로 존재한다, 라는 주장은 플라톤에서부터 시작하여 기독교를 거쳐 근대성과 과학이 보장해주면서 오늘날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탄탄하게 자리 잡았다. 그러면서 현대인의 행위를 결정하는 기저 세계관이 되었다. 그 독단의 세계관은 여러 관점과 해석들을 부인하는 절대의 철옹성을 쌓았다. 진리란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그런’ 것이라는 지식이다. 사실, 실제의 현대 사회는 더 이상 그렇게 단일할 수만은 없지만, 허구의 힘에 밀려 자리를 잡지 못한다. 어떤 초월성에 의해 본질이 결정되어 변화하지 않는 신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그 절대성의 유일 독존 위치가 지금 학문의 세계에서는 많은 도전을 받고 있다. 이른바 ‘포스트’ 시대가 시작되면서 기존의 세계관에 큰 균열이 생긴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도 그 균열의 조짐은 어렵지 않게 눈에 띈다. 실제 사회에서 그렇다. 과거 누구나가 갈망하는 절대적으로 변할 것 같지 않은 그 부와 출세의 길이 과거와 같이 엄청난 갈망의 대상으로 인정받는 시대는 갔다. 고시 열풍은 사라지고, 서울대 나와서 9급 공무원 하면서 가늘고 길게 사는 길을 가는 사람이 당당하게 나오는 세상이다. 어차피 권력이라는 것이 과거와 같이 무소불위의 성질을 갖지 못하다는 엄청난 사회 변화에 따른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의 아들이 가난한 예술가의 길로 간다. 많은 젊은 여성이 결혼을 거부하고 혼자 사는 삶을 택한다. 그런 삶들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여부는 판단할 수 없다. 다만,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를 자기 관점으로 푼 결과다.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은 니체가 통렬하게 비판한 사회에서 다수가 특히 부모가 관습적으로 정해 내려준 그 틀의 기준을 깨고 나간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그 톡 튀어나온 못 같이 사는 사람들을 경원하고, 싫어한다. 무난하지 못하고 원만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그러나 그 힘은 예전과 같이 막강하지는 않다. 도처에서 작은 위버멘쉬들이 각자 자기의 길에서 주체적으로 실존적으로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는 여전하다. 파괴의 힘과 반대로 작동하는 유지의 힘도 여전히 막강하다. 4년제 대학만 나오라는 부모의 간청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대학생 아이들, 아홉 번 아니라 아흔아홉 번이라도 고시를 패스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야망을 불태운 어떤 검사, 유능함으로 인정받고 싶은 혹은 성실함으로 뿌듯해 하고 싶은 욕망에 일을 끊지 못하는 워크홀릭 샐러리맨...그들로 인해 세상은 여전히 여여(如如)하다.      


흥미로운 것은 자아를 상실하고, 그 연장선에서 독립적으로 자기 삶의 길을 결정할 수 없는 것을 그들 현대인은 원만함 혹은 무난함으로 가리느라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는 사실이다. 그러지 않아도 가지고 있지 못한 힘을 그런데다 낭비하니, 사람이라는 게 겉으로는 살아 있는데, 속으로는 죽어 있으니 영락없는 좀비다. 그들이 취한 여러 방편 가운데 하나가 예술이다. 자아 확인이나 실존 차원의 예술이 아닌 예술을 위한 예술로서 돈과 명예 혹은 치장으로서 하는 예술이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이 교양이라고 말을 하곤 하는 잡학 지식이다. 삶의 지혜가 아닌 처세술이나 출세를 위한 여러 경영의 기술이 또한 그렇다. 더욱 한심한 것은 그들이 지식인이라는 이름으로 스승 노릇을 하기까지 한다. 그러니 그들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는 성공을 향해 가는 길을 보여주는 가짜 선지자들이 하는 짓밖에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에 열광한다.      


목표에 목마른 현대인들은 항상 원만하게 두루뭉술하기 때문에 자기 의지에 따른 결정과 난국에 부닥치면 헤쳐 나갈 줄을 모른다. 그러니 거대한 기계의 볼트 너트로서밖에 살지 못한다.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파헤쳐 볼 시간이 없다. 그저 사건에 쫓겨 다닐 뿐이다. 그러면서 초조하고 안절부절 한다. 독립 자아가 없으니 때를 기다릴 수가 없다. 그래서 매일 매일 어떤 거대한 체계에 사용되고, 소진되다 결국 닳고 만다. 휴가나 힐링이 잠시 있을 뿐, 본질적으로 그 영혼 없는 지식의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불행한 삶이다.      


"슬프다! 인간이 동경의 화살을 자신의 너머로 쏘지 못하고, 윙윙거리며 활시위를 울리게 할 줄도 모르는 그런 때가 머지않아 오겠구나! 그대들에게 말하거니와, 춤추는 별을 낳으려면 자신 속에 혼돈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머리말 5.


배워서 남 주냐는 말에 

배워서 남 줘야지, 라고 대꾸하는 그 말에,

실존 인간의 삶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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