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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Jan 02. 2021

니체의 눈으로 보라. 15.

14. 극복

대학생들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은 참 곤혹스러운 일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난, 젊은이들이 삶을 살아야 하는 태도는 주로 니체가 설파하는 바에 따라 실존, 주체, 저항, 독립, 현실, 관점, 해석 등을 기준으로 우리 현실에 맞게 고쳐서 가르친다. 니체의 철학은 다른 철학자들의 고담준론과 달라서 젊은이들이 현실을 살아가는데 많은 좋은 시사점을 던져주니 참 좋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는 현실에 순응하고 조직과 틀에 맞춰 사는 것을 거부하라고 한다. 그런 태도는 사회 생활하는데 독약이나 다름없다. 차라리 사회는 니체가 하지 말라는 방향의 삶을 요구한다. 이 두 가지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나는 그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저항하면서 극복해야 하는가, 순응해야 하는가? 니체가 살아보지 못한 이 험악한 경쟁 만능,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본가의 무한 약탈의 정글에서 말이다. 니체가 지금 이 정글의 사회에서 살았을 지라도 보편적 틀과 규율에서 무능력 하게 나락에 떨어진 그래서 개돼지만도 못하게 취급당하는 젊은이들에게 규율과 틀에 개체적으로 저항하며 난관을 극복하며 앞으로 나아가라 말할 수 있었을까?     


니체의 삶은 극복하는 삶이다. 주어진 운명이든 둘러싼 관습이든 그것을 극복해야만 현재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미래가 열린다. 니체는 그 장애물을 신을 중심으로 하는 도덕 체계로 파악했고, 그 신은 죽었음을 선포함으로써 실존 인간이 독립해야 함을 설파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한 이상적 인간을 위버멘쉬라고 정의했다. 그 위버맨쉬가 극복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포기나 신비의 세계로의 귀의가 아니다. 그러니 전통적 개념의 수도승이나 은둔자는 이 위버멘쉬에 포함될 수 없는 존재다. 물론 세상 권력을 쥐고 흔드는 초인도 위버멘쉬가 아닌 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히틀러가 악용한 니체의 위버맨쉬는 니체의 의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다만 그가 인종주의자였던 니체의 여동생과 함께 조작한 것이다. 그 둘 가운데 전자는, 니체가 비난하는 신을 따르는 자와 다를 바 없다. 그들은 기존의 신을 죽이긴 했으나 그 자리에 새로운 신을 만들어 안치해 두었다. 이는 그들이 종교를 버리고 인간을 세우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종교를 세운 것이다. 그 안에서 필요한 것은 인간을 죽이는 허무함이다. 후자는 신을 대체하는 초인으로서의 인간도 아니고, 인류를 구하는 수퍼맨도 아니다. 누구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고난을 극복하면서 난관을 헤쳐 나가는 존재가 위버맨쉬다. 신이 전지전능과 편재 혹은 자연의 상상물이듯 위버맨쉬는 극복하는 인간의 상징물이다.      


니체의 위버멘쉬는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인간이면서 동시에 가장 건강한 인간의 상징이다. 신체, 자유, 해석, 주체, 개체와 같은 인간이 갖춰야 할 긍정적 개념을 총체적으로 모아놓은 개념이다. 보기에 따라선 신과 같은 인간으로 볼 수 있겠지만, 그 위치가 전적으로 다르다. 그렇다면 위치상으로 볼 때 그 위버맨쉬는 초월적 존재로서 신과 같은 초인이 아니고 현실 속에서 저런 여러 자질을 끈질기게 완성해나가는 평범한 한 실존의 개체다. 난, 이렇게 해석한다. 그러니 위버멘쉬는 어쩌면 완료형이 아니고 주어진 난관을 극복해 나가는 진행형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니체가 말하는 극복을 좀 더 구체적인 삶에서 생각해 보자. 극복에 대해 우리가 현실에서 적용할 수 있는 범주를 찾아보자는 말이다. 니체의 극복은 자기 삶에 대한 긍정이고, 그 긍정은 소극적 의미의 생존이 아니고 적극적 의미의 도전이다. 따라서 그 도전은 삶을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차원이 아니다. 살아남는 것은, 니체의 눈에는, 소극적이다. 그 살아남아야 하는 본능 넘어 독립된 개체로서 새로운 차원의 삶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 독립은 익숙해져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결별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붓다가 말한 바와 같이 천상천하에서 주체적 개인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뭇 사람들, 그들에 대한 사랑과 자비와 동정으로부터도 독립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이나 그들이나 그러한 사랑과 자비의 동정이 난관의 극복과 그 후의 변화를 가로막고 있음을 깨우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그리고서는 어느 한 틀에 안주하지 말고, 중심으로부터 벗어나 끊임없이 탈주하는 것이 위버맨쉬로서 현대인이 갖추어야 할 태도다.      


네모반듯한 삶은 결국 낭비고 권태다. 삶의 알맹이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는 것이다. 자신을 세우지 못하고 남에 대한 동정이나 사랑으로 사는 것은 위선이다. 숱하게 많은 교회, 절 그리고 자선단체 등이 행하는 행위가 사랑인지, 위선인지는 이 시대를 주의 깊게 지켜보면서 사는 사람은 결국 간파할 수 있다. 국민을 위한다는 정치 그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사랑의 탈을 쓴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위선이라면 그 행위들은 이 사회에서 한 개인 개인을 바꿀 수 있는 에너지원이 될 수 없다. 그냥 그 자리에서 만족하여 안주하는 엔터테인먼트 소재가 될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고 극복해 나가야 하는데, 그 안에 사로 잡혀 그 포로로써 사육되어 살기를 더 좋아한다.      


글 서두에 말한 바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 지방 사립대에 다니는 그 청춘들에게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관습과 질서가 정하는 여러 가치 평가의 틀을 깨부수고 나가라고 하는 것은 니체의 위버맨쉬가 되고자 가는 것과 동일할 것이다. 그러나 각 상황의 맥락에 따라 구체적으로 질적으로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나는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는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달리 규정되는 – 이 개념은 니체가 아주 강조한 것이다. -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본다. 스스로 자기 해석에 따라 수위와 정도를 조절해서 자기 삶에 맞추어 만드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결국, 그 어떤 상황에서도 질적으로 동일한 하나의 위버맨쉬 상(像) 혹은 모델이란 존재하지 않아야 니체의 위버멘쉬라고 할 수 있다. 위버맨쉬는 다 상대적 존재로 이해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위버맨쉬는 우리 사회나 정치의 리더가 아니다. 예수 시대에 히브리 땅에서 그들이 바라던 메시아가 아니다. 누구나 범접할 수 있는 기존의 틀에 저항하고 극복하는 주체적 인간일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대중에게 니체의 위버맨쉬는 하등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허탄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 같은 현실주의자가 그것을 설파했을 리 없다. 난, 위버맨쉬는 자신에게 주어진 난관을 극복하는 모든 작은 인간을 의미한다고, 지방 사립대 학생들도 얼마든지 도달할 수 있는 인간의 단계라고, 나는 믿는다. 적어도 그것이 21세기 이 짐승 같은 한국 사회에서 찾는 위버멘쉬다.     


"그대들이 세계라고 부르는 것, 그것은 우선 그대들에 의해 창조되어야 한다. 이 세계는 그대들의 이성, 그대들의 심상(心像), 그대들의 의지, 그대들의 사랑 안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그대들 인식하는 자들이여. 그러면 그대들은 그대들의 행복에 도달하게 되리라!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II 행복의 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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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백마 타고 오는 게 아니다.

흔하고 흔한 세상 안에 개백정 같이 사는 그 삶 속에

위버맨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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